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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봄을 부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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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786회 작성일 24-01-3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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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5.16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위한 것입니다.”

 

1961516일 새벽 5시 중앙방송국의 뉴스가 이렇게 흘러나왔다. 이는 박정희 소장이 남산 중앙방송국에서 사전 협의 없이 장도영 참모총장의 이름으로 내보낸 방송이란다. (1989.5.16. 동아일보, 윤보선 회고록)

그 직후 쿠데타 세력은 포고령을 발표했다. 직장을 이탈하거나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한 사람, 옥외집회를 했다고 여겨지는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 처벌한다 했다. 저녁 7시부터 새벽 5시 사이에 집 밖에 있는 사람도 체포 대상이었다. 국내외 모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예금 인출 금액도 제한했고 출국 원천 봉쇄령도 내렸다. 입법기관을 해산하고 정당을 포함한 사회단체의 모든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4.19혁명 이후 터져나왔던 민주주의 요구와 누적 100만 명이 참여한 가두데모는 사라졌다. 사회는 이렇게 통제되었고 전 국민은 공포에 휩싸였다.

 

누구도 쿠데타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16일자 신문에 쿠데타가 발발했다고 보도했으나 다음날 그 용어는 사라졌다.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각국의 쿠데타 소식이 신문에 하루가 멀다 소개되었지만 한국만은 혁명이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장준하, 함석헌, 이휘호 등 지식인들도 혁명 정부의 재건운동에 힘을 보탰다.

한국노총은 1961107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3만 노동자를 모아 전국노동자총단결궐기대회를 열었다. 해산되었다가 재결성되자마자 연 대회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가 연단에서 꽃다발을 받았고 격려 연설도 했다. 한국노총은 군사혁명 지지를 다짐하며 노사협조를 이룩하여 경제 재건에 기여하겠다고 결의했다. 성대한 시가행진도 했다. 다음해 516일에는 군사혁명 1주년 기념 전국노동자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 사이 쿠데타는 혁명으로 자리 잡았고 전국은 군대 조직으로 변해갔다.

 

 

12.12

 

“12일 오후 7시 충돌로 이 일대(용산)를 비롯 서울 시내 11개 한강 다리 교통이 차단되는 바람에 강북에서 강남으로 퇴근하던 많은 시민들이 발이 묶여 걸어서 다리를 건너야 했다. 또 다리 위나 길 좌우에 차를 세워둔 채 차 안에서 잠을 자거나 일단 도보고 귀가했다가 13일 새벽에 나와 차를 끌고 가는 등 새벽까지 교통혼잡을 빚었다. 통금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교량 좌우 강변도로 등에는 수천 대의 민간 차량들이 서 있었고 승객들은 차에서 내려서 다리를 걸어서 건너거나 차 안에서 밤을 샜다. 미처 귀가를 못한 사람들은 근처 여관에서 합숙을 하기도 했다. 통행금지 5시간만인 13일 새벽 4시 통금이 풀리면서 차량 통행도 재개되었다.” (1979.12.13. 동아일보)

 

당시 언론은 대통령 시해 사건과 연루된 참모총장 연행 과정에 충돌이 있었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그렇게 두 번째 쿠데타는 교통통제 수준의 에피소드로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데 자신 있었을 것이다. 군부 쿠데타가 처음도 아니었으니. 전두환은 육군 대위로 5.16쿠데타를 보았다. 그는 5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을 모아 5·16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심었던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학습한 대로 하나회 결성, 군 정보체계 장악은 물론 합법 절차까지 밟으려 시도하며 쿠데타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19805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또 한번의 혁명으로 군부 권력의 연장을 꿈꿨을 것이다.

 

그들 군부는 5.16쿠데타와 12.12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오래 장악했다.

박정희 정권 18, 전두환과 노태우의 5~6공화국, 3당 합당으로 쿠데타 세력과 손잡고 대통령이 된 김영삼 정권, 5.16쿠데타 주도 세력이었던 김종필과 연합해 대통령이 된 김대중 정권까지 긴 시간이다. 대통령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서울지하철공사 같은 공기업 사장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장기집권을 꿈꾼 전두환의 계산과 달리 12.12는 일찌감치 쿠데타로 규정되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 과정의 일부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는 저항한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80년 봄, 노동쟁의가 늘어났다. 동일방직 해고자들과 원풍모방 노동자, 금속 노동자들이 해고자 복직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요구하며 한국노총 회관을 점거했다. 사북 탄광 노동자들이 지역민들과 함께 투쟁했고 해태제과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학원자율화를 요구하던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연일 시위를 이어갔다. 그리고 광주 민중들은 목숨 건 항쟁을 벌였다. 이러한 투쟁은 6월 항쟁으로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장기 군부독재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변혁을 꿈꿨던 이들이 있었다.

 

영화 <서울의 봄> 누적 관객 수가 13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배웠던 역사를 떠올리거나 경험을 되뇌며 보았을 것이다. 그 영화 뒤에는 시대의 폭력을 온몸으로 맞았던 이들, 그 폭력에서 비켜서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 당시 유치원생이었어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권력을 장악한다고 시대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동아일보, 1979년 12월 13일자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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