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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노동운동사건] 1980년 한국노총 민주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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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710회 작성일 24-02-0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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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한국노총 위원장실 단식농성

 

1980425일 민주노조를 사수하다 해고된 동일방직 노동자 27명은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해고노동자 124명 원상복귀, 구속동지 석방, 노동3권 보장 등 5가지 요구사항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해고자들은 복직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전국 사업장의 지부장, 분회장 앞으로 글을 보냈기도 했다.

 

우리는 그동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 엄마가 되도록 세월이 흘렀지만 복직에 대한 염원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너무도 처참하게 짓밟혔기 때문에 우리는 잊거나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기들은 마음껏 웃으며 노동의 보람을 느끼며 노동자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복직을 해야만 합니다.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단식하다 쓰러져 물만 먹어도 토하는 동지들이 병원으로 실려 가 버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어린 것을 끌어안고 젖을 먹이는 아기 엄마들을 보고 이젠 울기도 지쳤습니다. 아니 울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면 노총은 우리를 지금까지 이대로 둘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198051일 성명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선에서 수고하시는 지부장, 분회장님!발췌 )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하지 못했던 동료와 해고자들도 찾아왔다. 또 각계로부터 농성에 필요한 물품들이 속속 도착했다. 특히 투쟁 현장마다 100, 200명씩 조합원과 함께 연대투쟁을 진행하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회사 식당에서 밥, , 김치를 한 통씩 준비해 하루도 빠짐없이 노총 농성 현장으로 실어 날랐다. (한겨레신문, 201398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언니 82)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

 

5월 들어 한국노총을 상대로 한 노동자들의 민주화 투쟁이 본격화했다. 53일 금속노조 9개 분회가 한국노총 남서울지역 사무실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같은 달 9일 금속노조 대의원대회 날에는 금속노조 민주화운동 투쟁위원회가 김병용 위원장 사퇴를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노동3권 완전보장, 국가보위법 철폐, 동일방직 등 해고노동자 복직, 임금인상 및 근로조건 개선 등을 주장했고, 결국 정기대의원대회는 무기한 연기됐다.

한국노총은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513일 여의도 노총 강당에서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수도권 민주노조 활동가들도 바빠졌다. 활동가들은 한국노총의 궐기대회 시기에 맞춰 점거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하고 당일 조직화에 힘을 쏟았다.

 

 

한국노총 점거

 

513일 궐기대회.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노총 강당을 가득 메웠다. 한국노총 정한주 직무대행이 대회사를 낭독하는 순간 민주노조 활동가들이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직무대행을 끌어내리고 한국노총 물러가라구호를 외쳤다. 원풍모방 방용석 지부장이 마이크를 빼앗아 三金이 이 자리로 와 노동3권 완전보장과 해고자 원상회복을 약속할 것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와 금속노조 위원장 김병용을 제명할 것 보수정당에 노동3권 완전보장을 받아낼 것 등의 요구를 발표했다. 이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하고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자고 했다.

 

김영태, 김병용을 제명하라! 노동3권 쟁취하자!”

 

대회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들의 열화 같은 지지 속에 강당은 즉각 농성장으로 바뀌었다. 농성자들은 나무로 된 탁자를 해체해 북처럼 두들기며 투쟁가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를 부르고 조별로 장기자랑 등 급조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개별로 연단에 올라 한국노총의 어용 행태와 박정희 정권의 노동자 탄압에 대한 규탄연설도 이어갔다.

 

투쟁가는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하리라, 훌라송이었고, 군가였던 진짜 사나이도 불렀다. 노가바 중에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그때 그사람을 개사한 곡이었다. “유신하면 생각나는 그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사람/ 가장 믿던 재규에게 총을 맞고서/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사람...”(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이야기 다섯 번째, 한내레터, 노동자역사 한내)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간부들이 빠지고도 800여 명의 노동자가 출퇴근하며 농성장을 지켰다. 원풍모방 노조는 한 조가 근무 교대하면 버스 토큰을 40만 원어치나 사다 놓고 퇴근조 조합원들에게 나눠주면서 농성에 참여케 했다.

한국노총 점거 투쟁은 70년대 민주노조 주체들이 중심이 된 투쟁이었다. 1978년 김영태가 동일방직 해고자 124명의 블랙리스트를 중앙정보부로 넘기면서 해고자들의 취업은 국가권력에 의해 완전히 막혀버렸다.

한국노총은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로의 지향을 밝히면 바로 탄압으로 되갚는 반노동자적인 행태를 자행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노동자들이 점거 투쟁 목표를 한국노총 민주화에 두고 한국노총 지도부 퇴진을 주장한 이유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노동계 정화 지침

 

한국노총 점거 3일째, 전두환 신군부의 조짐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 지도부는 한국노총 점거 농성을 자진 해산했다. 해산 직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5.17 계엄 확대로 짓밟았고 노동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신군부는 821일 산별위원장 12명 사퇴, 지역지부 폐지를 골자로 한 노동조합 정화 지침을 발표하고 106개 지역지부를 해산시켰다.

민주노조 활동을 했거나 한국노총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노조 간부들은 신군부의 노동계 정화대상자 191명에 포함돼 제거됐다. 84명이 계엄사로 끌려가 사표를 강요당했고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신군부는 1231일 노동관계법을 개악해 노조조직 형태를 기업별노조로 바꿨다. 이 조치로 기업별 울타리에 노조를 가두었으며 한국노총의 독점적 지위를 재확인함으로써 민주노조의 진출을 철저히 봉쇄했다.

19811월 청계피복노조 해산명령을 시작으로 신군부의 민주노조 파괴 작전이 전개됐다. 노조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청계피복,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서통 등이 차례로 깨졌고 마지막으로 1982년 원풍모방 노조가 파괴됨으로써 한국노총을 점거했던 민주노조 활동가들의 공개 활동은 수면 아래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의 전망을 모색해야 했다.

 

 

[출처]

전국노동조합협의회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1기나긴 어둠을 찢어 버리고(1980~1989, 1997

 

[사진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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