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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 목포 신안 소작쟁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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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400회 작성일 24-02-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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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들불처럼 번지는 소작쟁의

 

1924~26년까지 무안군 (현재의 신안군, 함평군)의 각 섬에서는 연이은 항쟁이 일어났다.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승리에 고무받은 소작쟁의는 도초도, 자은도, 지도, 매화도 등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는 각종 조직이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 군을 넘어 면 단위까지 청년회, 소작인회, 노동조합, 형평사, 청년회, 여성조직 등이 건설되었다. 이는 3.1운동의 결과로 조선총독부의 통치방식이 문화통치로 전환한 열린 공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 민중의 광범위한 각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듯 각성한 민중은 전국 도처에서 자신의 조직들을 만들어냈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더구나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유입된 사회주의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전망을 갖게 하였다. 19204월 조선노동공제회의 설립과 19244월 조선노농총동맹이라는 조직의 설립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패배와 이후 부재했던 전국적 조직의 지원과 지도속에서 더욱 왕성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산업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농민의 처지는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 증산계획 등으로 쌀과 토지의 자본주의적 상품거래가 본격화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고 이러한 조건은 계급적으로 각성된 민중의 상태와 맞물려 거센 소작쟁의로 타올랐다. 소작쟁의는 1920~22년까지 66건이던 것이 23~26년까지 642건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소작쟁의는 특히 전남지방에서 두드러졌는데 예를 들어 25년 전국의 소작쟁의 건수 164건 중 59, 25204건 중 105건이 전남에서 발생하였다. 일제 관헌은 1920년대의 이러한 소작쟁의를 일컬어 농촌사회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일컬을 정도가 되었다.

 

 

소작쟁의의 연대성

 

이처럼 소작쟁의가 23년 이후 폭증하는 것은 229월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의 개최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를 조직적 소작쟁의 출발로 본다. 진주 소작노동자대회는 1000여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대회에서 결의한 결의안은 이후 여타지역의 요구안과 대동소이했다. 주요 요구안은 1, 소작료 인하 2. 소작권이동반대, 3. 지세와 소작료의 운반 지주부담, 4. 봉건적 잔재 폐지 등이 요구였으며, 이러한 요구에 대한 소작 농민의 호응은 대단히 높아 231월이 되면 진주지역의 84%에 달하는 소작농이 진주지회에 참여하게 되고 소작인의 요구를 수용한 지주의 비율이 70%가 넘는 곳이 6개 면에 달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진주와 순천 농민들의 승리 소식은 전남 서남부 지역 도서 지역에도 전해져와 암태도를 필두로 소작인회가 결성되었고 암태도에서도 소작쟁의가 벌어졌다. 이 투쟁은 순천에서의 소작쟁의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요구안의 유사성을로 봤을 때 이 시기의 투쟁 요구는 이미 전국화되어있었고 주요활동가들은 종횡으로 각종 사상단체와 노동단체 등의 교류에 큰 영향을 상호 간에 미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재철과 암태도의 소작인들

 

암태도에서 먼저 시작된 전남 서남부 도서 지역의 소작쟁의는 지역의 대지주인 문재철과 일본인 부재지주, 그리고 일제 관헌을 넘어야 했다. 문재철의 집안은 선희궁 감관 나주목 호방 암태도 면장 등을 지낸 지역 유력집안이었고 소금을 구워 파는 화렵업, 고리대금, 선상무역등을 통해 재산을 증식하였다.

 

문재철은 이재에도 밝아, 토지조사 사업의 기간인 1915년 선대보다 20배나 더 넓은 토지를 집적하였다. 그의 토지 규모는 1915160여만 평,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300여만 평에 이르렀다. 그의 토지는 암태, 도초, 자은, 지도등 전남 신안군 일대는 물론 전남북 충남북에 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시초로 1920년대 중반 전남 섬 지역에서 벌어진 소작쟁의는 모두 문재철의 가혹한 소작료 때문이었다.

 

대지주 문재철은 기존 소작관행이었던 반분 타조법에서 잡을도조라 불리는 집조법이 실시 되었다. 소작료의 변동은 1차 세계대전으로 호황을 누리던 일본 경제가 전쟁 이후 조선에서 사들이는 쌀값의 하락이 이유였고 문재철 등의 대지주는 쌀값 하락분의 손실을 소작인에게 떠넘겼다. 이러한 거대 지주는 소작인회의 결의사항에 따른 교섭으로 중소지주가 소작인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해도 따르지 않거나, 여론과 쟁의의 확대를 막으려는 일제 경찰의 중재로 합의를 한다고 해도 이를 뒤집거나 소작인회를 분열 회유 약화하려는 책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넘어설 수 있었던 힘은 놀라우리만치 단결된 소작인들의 힘이었다.

 

 

아사동맹

 

이에 일제 경찰은 쟁의를 조직한 소작인회의 주요간부를 구속하고 탄압하는 한편, 50정보(15만평)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은 전남 동부 지역의 소작쟁의와 암태소작쟁의에 자극을 받아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24414일 전남농담회(全南農談會)를 조직하였다. 노동자 농민 진영에서도 24420일 경성에서 조선노농총동맹 결성대회가 진행되어 소작료 3할 지세와 공과금은 지주부담 등을 결의한 상황이었다. 이로써 암태소작쟁의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지주층과 조선노농총동맹간의 싸움으로 확대되었고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에 암태소작인회는 5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소작료 불납동맹을 준수할 것과 2선 지도부의 선출, 소작권 이동에 대한 반대결의, 전체 소작인의 총단결 등을 결정하였고 6월 면민대회를 개최하여 회원 400여 명이 목포로 상륙하여 석방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에 65일 암태 남녀주민 400여 명은 범선 7척에 나누어 타고 목포에 도착하여 목포경찰서 앞에서 구속간부 석방 투쟁을 전개하였다.

 

소작인들은 목포 법원 지청으로 몰려가 구내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7일 예심판사로부터 7일 이내 예심을 마치겠다는 것과 목포형무소에서 구속 간부를 면회하였고 목포에 거주하는 천후빈으로부터 소작인회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받고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자 배를 타고 암태도로 떠났다. 하지만 예심의 결과 가해자인 문재철 측 인사들은 2명만 구속되었는데 피해자인 소작인 회 측 13인은 면소되지 않고 공판에 회부되자 78일 다시 500여 명이 목포 원정투쟁을 단행한다. 이들은 열세사람을 놓아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아사동맹에 돌입하였다. 단식투쟁과 노숙투쟁을 600여 명이 단행하는 모습은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공을 이불삼아 (중략)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진행되었다.

 

67일간 진행된 아사동맹은 문재철 집 앞에서의 시위와 일제 경찰의 강제해산과 압박 속에 암태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암태소작인회의 원정시위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전국 각지의 지원과 관심을 불러왔다. 당시 주요 언론사였던 조선, 동아, 시대일보는 물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에서도 다루게 되었고 조선노농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도 연설회와 동정금 모금 실지조사원 파견 등 발 빠르게 지원 투쟁에 나섰다.

 

 

암태도의 일시적 승리

 

하지만 일제는 간부 13명을 목포형무소에서 광주형무소로 압송하였고 이에 727일 암태소작인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소작인들이 광주로 몰려가 수감된 이들과 죽음을 같이하자고 결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목포경찰서장 나카지마(中島)은 암태도를 방문해 소작인회와 구속자를 위로하고 문재철과 소작인회 사이에 248월에 중재에 나선다. 여기에는 경찰서장, 도 경찰부장, 군수도 쌍방의 830일 협정식에 입회하였다. 지주 문재철과 암태소작인회는 소작료 4할과 1할의 농업장려기금, 소작계약기간 3년으로 하며, 소작료를 체납하거나 소작권을 매매하는 경우가 아니면 해제치 아니하며, 형사사건 쌍방취하, 소작인 기부금 2천 원 기증등으로 합의를 하였다. 일제가 나서서 중재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선 암태소작인회를 중심으로 하는 수백 명의 농성과 시위 드센 단결력과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가 어떠하였든지 간에 이는 암태소작인회의 간부 모두가 석방되지는 못하였지만 소중한 승리가 분명하였다. 이 승리는 암태도와 이웃 도서였던 도초도, 자은도, 지도, 진도로 번져나간다.

 

 

 

[참고자료]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매일신문, 조선신보등 신문자료

고석규: 20세기 자은도의 시련과 화해도서문화 제21

김경태: 1920년 무안군 도서지역 소작쟁의의 전개와 지역사회운동2014.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20년 무안군 도서지역 소작쟁의의 전개와 지역사회청람사학 24

김상욱: 암태도 소작쟁의2007.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박상수: 일제시기 전남 도서지역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신안군 암태면, 지도면, 도초면의 사례를 중심으로-1993.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박찬승: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과정한국근현대사연구 2010년 가을호 제54

이기훈: 민주장정 100, 광주 ·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민족독립운동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이정선: 일제시기 자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도서문화 제56

이창영: 1920년대 무안군 도초도 농민운동 연구2016.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정병준: 암태도소작쟁의 주역의 세 가지 길 서태석·박복영·문재철-한국민족운동사연구 51

탁현진: 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도서문화 제56

최성환: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에 대한 연구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51

1920년대 박복영의 암태도 소작쟁의 역할과 대외활동인문과학 제90

암태도 소작쟁의의 참여 인물과 쟁의의 특징도서문화 제56

일제강점기 도초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한국사학보 제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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