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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그때 그사람들] 목포 신안 소작쟁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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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331회 작성일 24-03-1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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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

 

 

암태도의 승리로 확산되는 소작쟁의

 

지도(智島)에서는 보리 수확 철을 앞둔 246월에 지도소작인공조회는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였고, 928일 면민대회를 통해 대중적으로 확대된 요구를 하게 되어 지도의 지주들은 10월 말 소작인의 요구인 4할 소작료를 수용하였다

자은도에서는 241월에 소작인회가 결성되어 102일 임시총회를 통해 소작료 4할을 요구하여 같은 달 지주 측과 협상에서 논 4, 3할로 합의를 하였다.

도초도에서는 2410월에 소작인회 결성되어 지주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다수의 지주는 용인하지 않았다. 이들 섬의 대지주들은 암태도의 승리 이후 소작쟁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특히 암태도에서는 대지주 문재철이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이로인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1925년 초부터 소작쟁의의 양상이 대결구도가 된다. 이는 이 지역의 대지주들이 소작인회와의 합의를 파기 혹은 해태하면서 주도했다. , 문재철, 나카미치 세이타로 (中道淸太郞), 우치다 유우키(內田佑義), 박종섭등은 소작인회의 요구를 부정하며, 기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조작쟁의의 주요 활동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섬을 넘어 목포 무안지역을 아우르는 조직을 구상한다. 이는 24년에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의사항이기도 하였다. 그 시작의 물꼬는 암태도가 텃다. 암태소작인회 간부들이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암태도의 청년회는 12월 암태청년회의 임시총회를 통해 무안군과 목포부에서의 지역연대를 위한 무목청년연맹을 결성하기로 결의한 즈음 이었다. 이 과정에서 각 섬들의 청년회는 기존의 지주출신등과 동거 상태였던 청년회의 경우 혁신 총회를 개최하여 지도부를 개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부 정비를 통한 결과 무목청년연맹은 1925110일 창립총회를 열고 목포무산청년회, 암태, 비금, 도초, 지도, 임자도 해제면의 청년회가 결합하여 총 8개 단체로 출발하여 지주들과 맞서게 되었다. 무목청년회는 계급적 각성’, ‘무산계급운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적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지주측은 조직적인 반격을 시도한다. 이들은 19254월 전남농담회 2회 총회에 전남각지에서 온 70여명의 대지주들중 일부로 참여하는데, 이는 당시 전남지방에 일반적 현상으로 까지 번져가던 소작쟁의에 대한 지주측의 계급적 대응을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일제 행정당국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였고 일제 당국도 그 요구에 호응하게 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암태, 도초, 자은, 지도등의 지주들은 8월 다도농담회를 결성하여 전년도 합의사항을 파기했다. 이에 암태도, 지도, 자은도, 도초도 등지에서는 동시다발적 소작쟁의가 벌어지고 마침내 소작인 대 지주와 일제 관헌의 대결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지주와 일제관헌의 공세

 

각 섬의 대지주들과 일제 경찰 1925년 이후 소작쟁의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에 나섰다. 2월 지도에서는 나만성외 6인의 간부를 수감하였고, 일제 경찰은 소작인회의 불납동맹에 맞선 지주 측의 차압요구가 들어오면 집달리와 경찰이 함께 강제집행을 하였다. 소작인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면 목포경찰에 한정하지 않고 전남지역 경찰력을 동원하여 120~200여명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각 섬의 쟁의에 개입하였다. 2510월 도초도 소작인들은 구속된 소작간부의 석방을 위해 200여명이 목포로 원정시위에 나섰지만, 앞선 해인 24년도 암태도 소작인회의 투쟁을 교훈삼아 쟁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폭력적 진압을 하여 수십 명이 다치고 15명의 간부가 검거되었다. 지역의 대지주들은 소작인회와 청년회 등의 약화와 분열을 끊임없이 조장하였고 합의된 내용을 번복하거나 이행하지 않았다. 이 전개과정은 마치 판박이 마냥 각 섬에서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지주들의 합의 불이행과 소작권 이전에 대해 소작인회는 소작료 불납과 공동경작으로 맞섰고, 지주가 강제 차압이나 공권력을 동원하면 소작인회의 단결로써 저지투쟁을 벌렸다. 또한, 소작인회 간부들이 검거·투옥되면 수백명씩 목포 광주로 건너가 농성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게 구속과 부상자가 속출하여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소작인회의 항쟁과 승리

 

24년도 일시적 양보를 하였던 암태도는 지주 문재철이 추수 간평을 고의적으로 늦추고, 소작인회가 개설하는 강습소 개설을 방해하며, 그동안 암태청년회가 맡아 운영하던 목포 암태간 운송을 담당하던 남일운수 운영권을 임의로 이전하는등 고의적으로 소작인회와 충돌을 빚어 구속자를 양산하였다. 지주 문재철은 다도농담회를 조직하여 합의된 소작료 4할을 5할로 올린다고 통보하였지만 암태소작인회는 불납동맹과 소작권 이동을 막아내며 지켰다. 결국 암태소작인회는 기존 합의를 지켜내고, 소작권의 이동까지 막아내며 승리를 일구어냈다.

도초도 소작인회에서는 1030일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하였고 간부들이 구속된 광주에 간부들을 파견하여 구속 동지들을 지원하고 투쟁상황을 알려 나갔다. 해를 넘긴 도초도 소작쟁의는 소작료 불납동맹을 굳건히 유지하였고 수감된 간부들이 풀려날 때까지 투쟁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소작인들의 투쟁에 50여 명의 지주 중 40여 명은 소작인회의 요구안을 수용하였으나 문재철 나카미치 세이타로 (中道淸太郞) 등 몇몇 대지주는 강경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이후 도초소작인회는 26215일 총회를 열어 조직명칭을 도초농민조합으로 변경하고 경찰과 무안군의 중재로 지주와 소작인간의 협정에 대한 거부를 결정했다.

자은도 또한 문재철 등의 지주 등의 합의 파기에 맞서 소작료 불납동맹 단행과 강제차압에 단결된 힘으로 저항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전남일대에서 모집된 180여 명의 무장경관대가 자은도에 도착해 소작인회 회원 40여명을 체포하였고 자은도 전체를 포위하여 섬을 봉쇄하였다. 공권력 투입을 통해 쟁의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쟁의는 26130일 지주 문재철, 나카미치 세이타로 등과 경찰서장 군수 면장이 참가한 가운데 협정에 날인하게 된다. 합의 내용은 소작료 5:5로 결정하였지만, 지주 몫 가운데 10%를 장롱비(將農費)로 내주게 하여 실제 소작료는 5.5:4.5로 타결하였다.

지도에서는 지주 측의 소작인회 분열에 맞서 252월 리 단위까지 조직하는 을축동맹으로 조직을 강화하였다. 또한, 지도소작인공조회를 약화하기 위해 지도 농민인 박채언을 매수하여 허위로 소작인회 간부들을 고소하여 6인을 구속했다. 하지만 이것이 매수로 인한 허위사실로로 드러났다. 이에 지주들은 소작권 박탈 등 강경한 수단을 썻지만, 지도소작인공조회는 한편으론 공동경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주회의 대표자인 박종섭을 상대로 소작인 1000여 명이 아사동맹으로 맞섰다. 사태가 악화하자 지주회는 지도 소작인회가 요구한 논 4, 밭 소작료 면화 10근을 수용하고 무리한 소작권 이동 또한 철회하기로 발표함으로써 지도 소작인회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맺으며

 

1924년부터 1926년 동안 진행된 목포, 무안지역의 섬들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작쟁의는 각 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각 소작쟁의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그 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적 계급적 각성을 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3.1운동을 넘어 사회주의 이념을 폭넓게 수용하여 섬을 넘어, 지역을 넘어, 전국적, 계급적 전망 속에 운동을 발전 추동해 나갔다. 이 소작쟁의들의 승리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더 나은 삶을 향한 소작 농민의 굳센 단결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은 1920년 이후 당시 조선 변혁운동 사회에서 주류 이념으로 떠오른 사회주의의 영향과 그것의 전국적인 조직체의 지원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대표되는 계급대중조직은 당시 전국의 주요 투쟁에 단호한 지지와 지도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노농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과 운영에는 새로운 사회전망을 가지고 민족해방운동을 개척한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투쟁의 조직적 성과는 목포지역을 중심생활권으로 하는 위 도서지역의 소작인 단체들은 1925913일 무목노농연맹을 조직함으로써 일보 전진하게 되었다. 무목노농연맹은 목포지역과 인근 도서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이 25830일 사상단체인 전위동맹을 설립하면서 추진한 사업으로 보여진다. 일례로 무목노농연맹의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을 보면, 암태소작인회 박복영, 자은소작인회 송기화, 도초소작인회의 김용택, 지도소작공조회의 김상수등 소작쟁의를 이끌었던 주요활동가들과 배치문, 조극환, 박제민, 설준석등 소작쟁의를 연대 지지하였던 목포지역 사회주의자들의 결합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사진] 왼쪽 나만성, 오른쪽 서태석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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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

1920년 무안군 도서지역 소작쟁의의 전개와 지역사회운동2014.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20년 무안군 도서지역 소작쟁의의 전개와 지역사회청람사학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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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일제시기 전남 도서지역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신안군 암태면, 지도면, 도초면의 사례를 중심으로-1993.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박찬승: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과정한국근현대사연구 2010년 가을호 제54

이기훈: 민주장정 100, 광주 ·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민족독립운동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이정선: 일제시기 자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도서문화 제56

이창영: 1920년대 무안군 도초도 농민운동 연구2016.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정병준: 암태도소작쟁의 주역의 세 가지 길 서태석·박복영·문재철-한국민족운동사연구 51

탁현진: 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도서문화 제56

최성환:

1920년대 목포청년운동과 지역엘리트의 성격에 대한 연구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51

1920년대 박복영의 암태도 소작쟁의 역할과 대외활동인문과학 제90

암태도 소작쟁의의 참여 인물과 쟁의의 특징도서문화 제56

일제강점기 도초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한국사학보 제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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