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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정치세력화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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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570회 작성일 24-03-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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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 (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

 

 

비판적 지지의 역사

 

19876월 항쟁 이후 치러진 첫 직선 대통령 선거 때는 20만 명이 넘는 대학생이 선거와 관련한 활동을 했다.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산하에 결성된 선거감시운동 전국본부에는 평민당에 37천여 명, 민주당에 25천여 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당시 대학생 수는 100만 명 정도였다. (조선일보 1987.12.30.) 이들의 바람은 선거를 통해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재야와 학생운동진영은 보수적이긴 하지만 민주주의 세력이라는 후보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김영삼으로) 단일 후보화김대중 비판적 지지로 의견그룹이 나뉘었고, 또 한편에서는 조건부 야권단일화를 표방하고 나선 백기완 후보를 민중후보로 추대했다.

비판적 지지와 단일 후보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민선 민간정부 수립을 목표로 했다. 독자후보를 추진한 이들은 선거판을 민족민주운동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위한 공간으로 규정하며 대선에 참여하되, ‘군부정치의 종식과 민주연립정부 쟁취를 위한 야권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통일민주당과 연대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광범위했다.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비롯한 재야인사, 민가협,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은 공식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했다. 이에 부응해 김대중 후보는 우리 정당 사상 노동자, 농민, 중산층 등 3대 계층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처음으로 천명하고 나선 정당의 후보라며 자신을 어필했다. (경향신문 1987.12.7. 대선 종반 유세 내용 중)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합집산의 혼란한 선거구도 속에서, 계급적 정책보다는 지역 중심의 투표로 내몰렸다. 결국 후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합법적으로 군부가 다시 집권한 것이다. 한편, 야당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은 입당 행렬을 이어갔다. ‘비판적지지를 주장한 이들은 대거 평민당에 입당했고 어렵지 않게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 행렬은 13, 14대 총선을 지나 15대 총선까지 계속 이어졌다. 비판적 지지에서 비판의 내용은 사라지고 지지의 형식만이 남은 셈이었다.

 

 

이쯤이면 맹목적 지지

 

19884.26총선 결과 야당 우세의 4당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재야 투사들이 의회로 진출했다. 노태우 정권은 노동계급 고립을 위해 제도권 안의 야당에 유화적 태도를, 변혁세력에 강경 탄압을 시작했다. 파업 현장에 경찰 병력이 투입되고 구사대가 판을 치며 노조 간부를 식칼로 테러해도 못 본 척했다. 공장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민주화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며 투쟁하는 이들에게 백골단과 최루탄 난사로 대응했다. 구속 수배 해고자 수는 급증했다.

 

목숨 걸고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는 이들을 향해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기자회견으로 답했다. 회견 내용의 핵심은 국민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5월 말까지 파업을 중지한다고 선언하라는 것이었다. 평민당이 노동자, 농민, 학생의 우군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경향신문 1989.4.20.) 이해관계를 중심으로한 정치적 야합의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선거 때마다 사회운동진영의 비판적 지지는 계속되었다. 1991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범민주연합후보 전술을 채택했다. 전국연합과 업종별 노조연맹, 기독교·천주교·불교단체 등 재야를 엮은 국민회의(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역시 그랬다. 199214대 총선과 대선에서는 대놓고 비판적 지지를 말했다. 재야 일부 세력은 제도권 정당과 연대하지 않는 정치 실험은 모두 실패했다고까지 했다. 13, 14대 총선을 통해 제도권 야당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투사들의 노력까지 더해져 비판적 지지 흐름은 계속되었다.

 

87체제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돌입했다. 정리해고 법제화와 무분별한 구조조정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며 산업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비정규직을 상시화하는 법이 제정되며 불안정노동은 일상화했고, 노동3권을 제한하는 법 개악은 정권마다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진보정치과 사회운동은 점차 소원해지고, 지지와 반대라는 허울만 남았다. 그럼에도 비판적 지지의 망령은 멈추지 않았다.

 

 

정치세력화의 주체


민주노총은 96-97 노동법 개정 투쟁 이후 대선에 임하면서 독자후보 전술을 채택하고 선거를 통한 정당건설을 목표로 천명하며 노동자 계급의 자주적인 조직을 건설하기로 했다. 이른바 노동자 정치세력화 전략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핵심은 노동자 내부의 정책과 계급노선을 강화하고, 현실정치의 이합집산 구도에 흔들리지 않고 당면한 정세에 계급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은 대의민주주의를 경계하고 민주성과 자주성을 역사적 원칙으로 삼아왔다.

 

그런 측면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계급 내부의 세력화를 표현하는 것이지, 국회 내부의 의석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운동과 현실정치가 서로 유기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의 측면이 강조된 것일 뿐, 진보정당의 의석수가 곧 사회운동의 실력과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비판적 지지는 주권 이행의 역사에 가까웠다지지의 내용은 비판적 지지를 획득한 당사자 혹은 세력의 의지나 판단에 따라  언제든 뒤집히거나 변질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은 '배신당하거나 실망하는 정치의 객체'로 전락했다. 비판적 지지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견제해온 셈이다. 역대 최악이라는 윤석열 정권에 이르러 흔들리는 것은 현실정치의 이해관계뿐만이 아니다. 사회운동과 노동정치의 역사적 원칙과 핵심적인 가치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동시에 모든 미디어와 언론은 여소야대 국면의 향방만을 주목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계급정치의 내용은 온데간데없이 희미하고, 비판적 지지의 역사는 노동자를 지지하지 않는다.

 

 

[사진] 1987년 대선 단일화 집회, 민청련 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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