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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세계노동운동사] 대공황 이후 시기의 유럽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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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24-04-0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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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

 


 

체제의 주력은 노동

 

자본주의 세계질서는 1929년 대공황 이후 격변을 거듭하며 새로운 전쟁의 위협과 함께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정당들의 반파시즘반전운동을 불러왔다.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강화되면서 자본주의적 과학화와 합리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경제체제에 대한 국가들의 개입력이 강화하면서 노동자의 고용형태와 질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생산단위의 국제화, 국제 분업의 발전, 수출 수입에 바탕을 둔 국가 간의 무역 관계 확대, 노동인구 이주이민의 증가 등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촉진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자본주의국가들의 고용노동자 수는 8,500만 명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초에는 14,12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임금노동자의 비중은 이후로도 가파르게 상승하여 40년대에 들어서는 8~90%(미국, 영국 등)에 육박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공장 노동자였는데, 이 시기에는 공업집중도가 높아지면서도 중소영세기업이 공존했으며, 오히려 중소영세기업은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대기업으로의 집중과 독점화는 소규모 기업에 대한 흡수와 통합을 수반했지만, 새로운 중소영세기업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기술의 발전은 보다 높은 교육수준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화이트칼라가 증가하면서 근대적 노무관리 또한 확립되었다.

특히 프레드릭 테일러가 창안한 과학적 노무관리는 노동자의 표준작업량을 설정하고 생산공정을 자동화함으로써 노동의 밀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와 함께 1920~30년대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노동시간 규제와 실업보험 등을 포함한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개입력을 한껏 증대해나갔다.

 

 

평등을 위한 투쟁

 

한편, 노동제도 개혁에 관한 요구는 노동운동의 고양과 침체 국면에 따라 그 실현 정도가 결정되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노동조건은 노동자의 투쟁의 양과 질에 비례했으며, 반면 파시즘이 정권을 장악한 국가의 경우 주요산업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나 농민은 대규모 실업을 겪기도 했다. 1935년 독일에서는 청년들의 강제 노동봉사제도가 도입되어 군수산업에 청년노동자들이 예편되기도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권의 유착관계에 저항하는 대규모 정치투쟁을 일으켰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의 특징은 노동조합의 조직이 특정한 분쟁이 생겼을 때 출현했다가 분쟁의 종식과 함께 사라지곤 했다는 것(비영구적)과 노동과 자본은 법적으로 평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노동자들의 투쟁은 반드시 불법적인 음모로 간주되어 처벌받았다. 고용계약을 위반한 노동자는 형사처벌을 받았으나 사용자는 민사적인 책임만을 수행하는 식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명백한 차별은 근대화 과정에서 점차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따라서 당시 노동운동의 가장 큰 정치적 목표는 노동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력을 확대하는 것이었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결사와 투쟁은 향후 노동조합운동에도 중요한 토대로 작용했다.

 

 

1926년 영국 총파업

 

1920년대 초 영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산업의 성장을 주도하던 사용자들은 오히려 경제위기를 근거로 이들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노동시간을 늘릴 것을 위협했고, 특히 광산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상황에 놓여있었다. 192653일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광산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이는 영국 전역으로 번졌다. 이에 영국 정부는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투쟁을 탄압했다. 그럼에도 파업은 9일간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시위는 360만명의 다양한 업종과 지역이 결합하는 총파업의 형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의 패배는 가혹했다. 1926년 영국의회는 탄광노동자의 노동시간을 7시간에서 8시간으로 연장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정치파업과 연대파업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등 비합법파업을 조직하거나 가담한 자에 대해서는 벌금이나 2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대중적인 피케팅을 엄격하게 제한했으며 손해배상와 민사소송에 따른 노조의 기금을 조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공공 부문의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영국노조회의와 노동당의 가입을 금지하고 노동조합의 정치자금 모금을 금지했다.

 

 

노동자 투쟁의 산물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에서는 1920년대 중반 내내 쉼없는 장기파업이 지속되었으며, 그 중 핀란드 고무공업과 항만노동자들의 파업은 1년 동안 벌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시기 유럽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경제정책과 노동자 권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그 결과 높은 공업성장률을 바탕으로 호황을 누리던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계급 간의 협조를 강조하는 일종의 양보 정책이 이루어졌다. 이는 노동자의 권한을 새롭게 제한하면서 일종의 반노동자적인 지향을 가졌는데, 노르웨이의 경우 비공인 파업(와일드캣)’의 처벌을 강화하고 단체협약을 새롭게 해석하는 노동재판소의 설치를 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를 간접적으로 제한했다. 또한 스웨덴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단체협약법과 노동쟁의강제조정법이 제정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국경와 지역, 업종을 가리지 않고 서로 정치경제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노동운동에 있어서 정치적 연대의 원리를 도입하고 발전시켜나갔다. 영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경제적 조직과 노동조합 그리고 협동조합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 등이 생겨났고, 이는 사회적 파업의 권력기관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연쇄파업‘(이탈리아식)태업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이처럼 노동자의 투쟁은 끊임없이 정부와 자본의 탄압에 대응하며 수세적인 국면에 놓였지만, 그 과정을 돌파하면서 노동자 권리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인식을 강화해나갔다. 모두 체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도전과 투쟁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에드워드 호퍼, 1942

 

[참고자료] 세계노동운동사, 김금수,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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