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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사건] 8시간 노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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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24-04-0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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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제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

 

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장시간 곱빼기 노동

 

해태제과는 1945년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에 설립됐다. 1978년 말 현재 종업원 3,000명을 고용한 제과업체로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전국화학노조 해태제과지부가 1962년에 이미 결성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조합원은 노동조합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주야교대로 12시간을 일해 왔으며 일요일에는 낮 12시에 들어가 밤을 새우고 이튿날 아침 7시에 나옵니다. 19시간을 일한 셈입니다. 이렇게 일을 하고 나오는 날은 너무 지쳐서 밥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 지고 맙니다. 야간을 들어갈 때나 곱빼기를 할 때는 견 딜 수가 없어서 피로회복제와 잠 안오는 약 타이밍을 먹고 들어가 일을 해왔습니다. 만약 일을 하는 도중 졸 다가 들키면 야단을 맞기 때문입니다.”

- 1976년 해고노동자 서정남 호소문 중 일부

 

해태 노동자들은 17~19시간 곱빼기 노동을 했으며 주당 근로시간이 72시간에서 90시간이나 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노동자들은 피로와 졸음을 쫓느라고 수면 방지용 약인 타이밍을 상습 복용했고 변비와 신경통을 달고 살았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부서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온몸이 동상에 걸리기도 하고, 12시간 계속 과자를 싸는 노동자들은 손가락에 피가 맺히기도 했다. 그렇게 일을 해도 6년 경력의 노동자 월 기본급이 1만 9,000원이었고 수당까지 합쳐 4만 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 쌀 한 가마(80kg) 가격이 3만 5,000원 정도였으니 생활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곱빼기 노동 철폐 투쟁

 

197599일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노동청 지방사무소에 18시간 곱빼기 노동과 휴일 근무를 바로잡아 달라고 진정하고 19763월까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 하루 12시간만 일하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매일 12시간 이상씩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인 것을 알고 있지만 회사가 일이 바쁘다고 하니 12시간까지는 우리가 참고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12시간 이상은 너무 힘들어서 할 수가 없습니다.

2. 일주일에 하루씩만 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씩 쉴 수 있다는 노동법상의 혜택을 못 받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혹사를 시키면서도 종종 곱배기노동을 시키고 있어 할 수 없이 18시간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참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 197599일 노동청 지방사무소에 제출한 진성서 내용 중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외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국제자유노련은 한국노총이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진상을 규명하도록 요청했다. 이런 분위기에 고무된 해태 노동자들이 투쟁한 결과 18시간 노동에서 112시간 노동으로, 7부제 작업에서 휴일 근무제로, 식사시간 30분에 휴식 30분을 연장했다.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

 

18시간 곱빼기 노동 철폐 투쟁을 거치면서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적정 노동시간이 필요함을 알아갔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필요성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8시간 노동은 노동자 건강과 직결된 문제인 동시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임금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전체 호응이 어렵고 특히 남자 노동자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힐가능성이 크다. “사측은 남녀노동자 사이 갈등을 만들어 결국 남자들의 폭력을 동원할 것이고 입사 소개자들을 통해 압력을 가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사건을 예측해가며 활동가들은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1979717일 해태제과 노동자 100여 명은 영등포 산업선교회관에 모여 8시간 노동제 쟁취를 결의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언제부터 8시간 노동을 실시할 것인지 확답을 듣자는 것이었다. 비스킷 부가 먼저 8시간만 일하고 퇴근했다. 캔디 부와 캐러멜 부도 동참하면서 투쟁이 확대됐다. 참여한 노동자는 600~700명이었다.

 

사측이 가만있지 않았다. 불황이 지나고 나면 노동시간을 줄여주겠다는 회유가 먹히지 않자 남자 기사들을 동원해 퇴근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대의원 이숙자를 감금한 채 협박하기도 했다. 급기야 직접적 충돌이 벌어졌다. 84일 새벽 330분경, 비스킷 부 A조 야간 퇴근 현장에 남성 기사 15명이 나타나 폭언을 퍼부었다. “8시간 일하고 나가는 년들 모가지를 비틀겠다.” “먹어버리겠어.” “밟아 죽이겠다.” 그러더니 퇴근하는 노동자의 팔을 비틀고 목을 조르며 넘어뜨렸다. 현장에 있는 인두, 선풍기 등을 던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매일매일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8시간만 일하고 일손을 놓았다. 투쟁은 더 확대되어 87일 껌 부도 동참했다.

 

810일 노조는 갑자기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는 대의원을 압박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대의원 수는 52명이었고 이중 5명이 해당되었다. 투쟁하는 노동자에 대한 집중 탄압은 무자비했다. 이숙자 대의원은 영등포경찰서 정보과장, 사촌형부, 아버지까지 동원한 합동작전에 시골집으로 끌고 갔고 결국 3일 만에 사표를 내야했다. 김순례, 김고만은 폭행을 당해 실신, 중환자실로 실려가기도 했다. 탄압과 공포가 많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해고되거나 강제로 사표를 쓴 노동자가 70~90명이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8시간제 투쟁을 힘겹게 전개하며 계속 탄원서를 보내고 폭력을 행사한 자를 고소했으며 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불매운동을 했다.

827일 회사 사장이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911일 화학노련이 식품업계 대표(해태제과는 불참)들과 노사협의회를 열었다. 모두 12시간 연장근로를 하는 사업장들이었다. 여기서 8시간 근무제 시행과 20~30% 줄어들 임금 보전에 대해 합의했다.

 

104일자 신문에 “925일 해태제과 대표이사가 임금은 현 수준을 유지하면서 현재의 112시간 근로를 8시간으로 낮추고 19803월부터 시행한다고 약속한 사실이 보도되었다.(<한국일보>, 1979104) 사측을 믿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회사와 노조에 이 사실을 공고하라고 요구하며 8시간 일하고 퇴근하기를 계속했다. 해고된 9명의 복직투쟁도 이어졌다.

결국 19802월 마지막 날 현장 관리자는 조회에서 32일 월요일부터 8시간 노동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시간은 4시간 단축됐음에도 임금은 10% 인상됐다. 승리였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투쟁에 힘입어 롯데제과, 동양제과, 서울식품, 크라운제과, 삼양식품, 농심, 한국콘티넨탈, 삼립식품 등에서도 12시간 교대가 8시간 3교대로 바뀌었다. 임금이 줄어드는 차액을 전액 보전하는 등 높은 임금인상 효과도 가져왔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장시간 노동에 한 획을 긋는 투쟁이자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확보하는 싸움을 전개한 투쟁이었다.

 

 

 

[참고자료]

순점순, 8시간 노동을 위하여, 풀빛, 1984 

이옥지,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 1, 한울아카데미, 2001

이영재, 공장과 신화, 학민사, 2016

김보현, 해태제과 여성들의 ‘8시간 노동제실현」 『기억과 전망2001년 겨울호(통권 45)

박민나, 하루 8시간 노동, 파이팅-해태제과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사진] 197983일 해태노동자 탄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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