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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의 독서] 일하다 아픈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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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281회 작성일 24-05-0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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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지난번 나는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신다은, 한겨레)라는 책의 독후감을 썼다. 이번에도 그에 이어 산재 문제를 다룬 책을 들고 왔다. 지난번 글에서는 일터에서 매년 사망 사고로 숨진 노동자가 800여 명이라고, 그 명백한 죽음조차 세상에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묻힌다고 썼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거제에서는 선박 수리 작업 중 폭발 사고로 1명이 죽고 10여 명이 다쳤다. 사망 사고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번 다루지 못한 일터의 죽음들이 있다. 사고가 산재로 인식되는 데 비해 질병은 산재로 인식이 잘 안 된다. 2022년 한 해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 2223명 중 사망사고로 죽은 사람이 874명인데 질병 사망자의 수는 1349명에 달한다. 2017년부터 한국에서는 각종 질환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사망 사고자보다 더 많아졌다. 이같은 경향은 아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해질 것이다.

 

사망자만 두고 얘기해도 이럴진대, 노동으로 인해 병을 얻고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게 아니다. 아프지 않아야 하는데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아프다.

 

이 책은 산재 사망사고가 아닌 질병 산재 사망만을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질병에 좀 더 주안점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죽음만을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노동자의 건강이 그동안 누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는지 질문하고 위험젠더관점에서 정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활동가, 연구자, 전문의, 노무사 등 6명의 저자가 19명의 여성 노동자, 장애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 산재 피해자 가족 등을 만나 들은 이야기와 그간의 연구를 아우르고 있다.

 

일터의 기본값

 

한국 사회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기본값은 건강한 남성 노동력’, 평균 남성으로 상정한다. 다른 나라 역시 그렇고, 세계적 차원으로 보자면 유럽과 북아메리카 백인 남성의 평균적 체형과 사이즈를 평균 남성으로 상정한다. 그 기준은 예컨대 진동, 소음, 고온, 저온, 분진 등의 유해 요인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구 설계와 제품 생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일터에서 여성들이 개인 보호구를 요구해도 지급이 거절되기 일쑤다. 사용자 측에서는 여성들의 몸에 적합한 보호구가 없다고 핑계를 댄다. 아마도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이 노동 현장의 기본값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평균 남성의 몸에 맞춰진 일터라는 현실은 이로부터 배제되거나 그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추려낼 수 있게 해준다. 여성, ‘평균 남성에 못 미치는 남성, 성소수자, 자본이 요구하는 몸을 갖지 못한 장애 노동자, 그리고 이 책에서 충분히 담아내지 않았지만 함께 추려지는 노인, 이주노동자, 청소년 등이 추려진다.

 

이 책의 부제는 왜 여성의 산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가?’이다. 하지만 기업이 생산성, 효율성 측면에서 노동할 수 없는 몸혹은 비생산적인 몸으로 여러 주체들을 지목할 때 이들은 함께 배제되거나 차별되곤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젠더 관점

 

그렇기 때문에 젠더관점에서 일터와 위험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여성들만을 위한 관점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팔팔한 청춘 시절 입사한 조선소에서 잔뼈가 굵은 고참 노동자가 있다고 치자. 기술과 경험은 훨씬 늘어났지만 무릎이 꺾이고 걸음이 느려졌다. 늘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아파 젊은 시절 번쩍 들던 공구함이 버겁다. 그가 평균 남성의 생산량만큼을 채우지 못할 때 그에게 평균 남성의 생산량만큼을 요구하는 것은 과로할 것을, 산재 당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 없다. 기준 자체가 그가 감당하기 힘들게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몸들에게는 그 몸들에 맞는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생산력과 비용을 따지는 기업과 사용자 측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기본값 설정의 문제는 산재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 남성의 평균 키에 맞게 만들어진 작업대가 있다고 치자.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작업대 자체가 높다. 그러면 이들은 늘 어깨 통증을 안고서 일을 해야 한다. 구체적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키와 몸에 맞게 작업대 높이가 조정될 수는 없는 것일까?

 

많은 경우 보호구들은 백인 남성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한국 남성들에게도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물며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조선소에서 용접 가스나 흄 가스를 막기 위한 마스크 역시 여성들의 얼굴에는 잘 맞지 않기 일쑤다.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가스를 막지 못한다면 그런 보호구는 착용하나 마나다. 건설 현장에서 일본의 전동공구 회사인 마끼다도 널리 쓰이는데 그 이유는 미국, 유럽의 공구들에 비해 비교적 체구와 손이 작은 한국 남성들에게도 잘 맞기 때문이라 한다.

 

아픈 몸

 

일터의 작업 조건, 공구, 노동 환경, 노동 시간, 강도 등이 모두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몸에 맞지 않으니 아픈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프다가 토~일요일 쉬면 깜쪽 같이 낫는 경우가 단순히 우스갯소리가 아닌 리얼리티를 갖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늘 아프다, 아프다 소리를 달고 산다.

 

예를 들어 이 책 속에 등장한 병명들만 나열해 보면 내 주위 사람들, 이웃과 친구, 가족들이 아이고하면서 늘어놓았던 그 병들이다. 위궤양, 관절염, 터널증후군, 급성 위염, 두통, 월경 불순, 근골격계 질환, 족저근막염, 요통, 백내장, 녹내장, 회전근개 파열, 요추간판탈출증잘 들어보지 못한 병명도 있다. 방아쇠수지증후군, 수근관증후군, 삼각섬유연골복합체파열, 드퀘르벵, 반월상 연골 파열, 자궁질탈출, 급성 고관절활액막염죽음에 이르거나 심각한 병들도 있다. 백혈병, 직업성 암, 파킨슨병, 뇌경색, 뇌출혈, 심근경색이쯤 되면 질병은 신체의 예외적 상태가 아니라 건강한 몸이 예외적 상태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이 질병들은 산재로 인정되지 않았던 적도 많았다. 어떤 질병이 산재로 인정되고 사회적 문제가 된 이후에야 사례 수가 급증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러한 질병들도 업무 연관성을 입증하는 사회적 실천과 투쟁을 거치면서 비로소 산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21년 대한항공 승무원의 백혈병이 우주 방사선으로 인한 산업재해임을 승인 받으면서 승무원들의 유방암, 위암 등 7건의 질병이 직업성 질병으로 인정받았다. 방사선 덩어리인 오로라 가까이 지나는 북극 항공로를 주로 오간 항공 승무원들의 피폭량은 핵발전소 근무자보다 높다. 또 학교 급식 노동자의 예도 들 수 있다. 한정된 조리 구역에서 다량으로 배출되는 독성 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급식 노동자들이 2021년 최초로 폐암이 산재로 승인된 후 산재 신청과 승인 건수가 늘어나 202310월 기준으로 113명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산재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는 그간 일터의 문제로 인해서 건강이 훼손되었다고 간주되지 않았던 것들이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그런 또 다른 사례로는 감정 노동과 정신 건강 문제도 있다. 이를테면 직장 내 괴롭힘 같은 것도 있지만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으로 인한 우울증 등 정신건강 상의 문제도 점차 산재로 인정받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맹점과 보정

 

눈은 우리의 창이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자연과 사람, 물건과 풍경은 빛으로 눈에 감각된다. 망막에 맺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망막에는 시세포가 없어 그 빛이 감지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블라인드 스팟 blind spot, 맹점’(盲點)이다. 맹점의 위치는 망막의 중심부에서 코쪽으로 약 15° 아래에 있고 그 형태는 타원형 모양이라고 한다. 버젓이 눈을 뜬 채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한계를 우린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평소에 이러한 한계를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는 한쪽 눈이 갖고 있는 맹점을 다른 눈이 간취하기 때문이라 한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기획한 <일하다 아픈 여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일터와 몸들이 처한 현실, 그 가운데 부서지고 아파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고 있는 몸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게 되는바로 그 맹점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귀한 책이다.

 

더 잘 들여다보고 더 잘 직시함으로써 더 많은 질병과 죽음이 산재로 인정받는 것, 은 그것도 중요한 목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에 머무른다면 그건 그저 보장되는 산재까지만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일터의 문제로 인한 질병과 사망이 없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구체적인 투쟁과 조직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을 기획하고 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같은 연구단체라든가 구체적 사태가 벌어졌을 때 투쟁을 해나갈 수 있는 노동조합, 그리고 수많은 활동가들과 산재 당사자, 가족들의 피, , 눈물이 우리의 맹점을 끊임없이 보정해 왔던 원동력이었다. 눈을 뜨자. 크게 뜨자. 두 눈을 뜨자. 더 자세히 보고 더 들여다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보자. 어깨를 겯고 봐야 멀리 보이고 더 많이 함께한 만큼 우리의 일터는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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