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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사북항쟁
첨부파일 -- 작성일 2010-04-05 조회 1428
 

사북항쟁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1980년 4월 사북. ‘광산쟁이’라 불리던 노동자와 가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를 두고 이재기 지부장파와 이원갑파의 노조 지부장직을 둘러싼 권력다툼에서 촉발되었고 광부들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사태가 번진 것이라고 언론은 보도했고 오랫동안 그렇게 왜곡되어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체들이 그 진실을 밝혔다. 30년 전, 사북지역 전체를 투쟁의 물결이 휩쓸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당시 산재 관련 통계를 보면 1979년 전국의 탄광 노동자 수가 5만 3,000여 명이었는데 그 해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 수가 5,300명이 넘었다 (사망 221명, 부상 5,100여 명). 국내 최대 영 탄좌였던 동원탄좌는 1980년 당시 직영에서만 3,052명의 노동자가 3,609ha, 23개 광구에서 연 160톤의 석탄을 캐내고 있었고, 하청탄광에서도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연 70만 톤을 캐내고 있는 대형탄광이었다. 대형 탄좌라고 해서 노동조건이 나았던 것은 아니다. 사북에 사는 아이들의 눈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일하는 곳이 지옥으로 보였다.

나는 지옥이
어떤 곳인 줄
알아요.
좁은 길에다
모두가 컴컴해요.
오직
온갖 소리만
나는 곳이에요.       (사북초등학교 6학년 노민영, “막장”)

 노동자들이 사는 사택은 6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고, 공동우물과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노동자들은 탄광에서 나와 샤워 시설이 없어 씻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임금은 월평균 15만 5,000원. 월급날은 빚쟁이들과 싸우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아버지 월급은 콩알만 하네.
아버지 월급 쓸 것도 없네.       (사북초등학교 6학년 정재옥, “아버지 월급” )

이렇게 목숨을 걸고 저임금 노동을 하는 노동자를 위한 조직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국광산노조연맹 동원탄좌 노조지부는 1964년 설립되었다. 노조가 있었지만 노동자를 위한 사업을 하지 않고 보험금 횡령 등으로 지부장이 잡혀가는 등 비리가 들끓었다. 몇몇이서 간선제라는 점을 이용해 깡패를 동원하고 돈봉투로 대의원을 매수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1979년 노동자들은 6대 지부장 선거를 앞두고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장기 권력을 잡은 이재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이번에는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원갑은 떨어지고 이재기가 또다시 당선되었다. 부정선거였다. 조합원들은 광산노련에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광산노련은 이재기와 지부 임원 선거를 다시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선거 직전 이재기는 연임을 위해 대의원 제주도 나들이를 한 후 집행부 신임투표를 강행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분노를 산 건 이재기가 회사와 20% 인상에 합의한 점이다. 이는 광산노련의 1980년 임금인상 요구액 8만 5,000원(42.75%)조차 무시한 것이었다.
1980년 3월 5일 이원갑을 중심으로 대의원 8명이 무자격자라며 광산노련에 이의를 제기했고,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촉구서도 제출했다. 4월 16일에는 서울 광산노련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임금인상 문제에 대한 이재기의 해명을 조건으로 광노가 중재를 해 사북으로 내려왔지만 문제는 거기서 해결되지 않았다.
4월 18일 노동자들은 21일 조합원 총회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이재기 퇴진과 40%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이재기는 눈도 꿈쩍 안 했다. 한 술 더 떠 경찰에 신변보장을 요청하였고 경찰은 앞장서 투쟁하던 신경을 연행했다. 노동자들은 사북지서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였고 결국 신경이 석방되었다. 경찰은 집회를 허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21일 집회는 불허되었다. 노동자들이 지서로 몰려가 이에 항의하자 정선경찰서 이운선이 도망쳐 지프에 올라탔고 이를 막아서자 그대로 출발해 사람을 타고 넘고 들이 받아버렸다.
이 사건은 “경찰이 광산 노동자를 죽였다”는 이야기로 퍼졌다. 노동자들은 지서를 파괴하고 지서장을 폭행했다. 밤이 되면서 노동자들은 광업소 간부들과 어용노조 간부, 공화당 간부 집을 공격했고, 22일에는 가족들까지 가세해 숫자가 3,000여 명으로 불었다. 이날 지부장 처를 찾아내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오전부터 100여 명의 기동경찰이 투입되어 안경다리를 두고 노동자와 경찰이 격전을 벌였다. 공포와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오후 들어 경찰이 밀려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협상을 제안했고, 22일과 23일 협상이 진행되어 4월 24일 11개 항의 합의문서가 만들어졌다. 합의내용은 1) 이재기 지부장과 노조 집행부 사퇴 2) 부상자치료 및 보상금 회사 부담 3) 피해주택 복구 회사 부담 4) 하청업체의 노임과 상여금 상향조정 결의 5) 신용협동조합 미지급금 회사부담 6) 79년 징계자 상여금 삭제액 지급 7) 사건으로 인한 4일분 휴업수당 지급 8) 1.2월분 임금인상 소급분 20%를 5월에 지급하고 탄가인상 때 재조정 9) 상여금 250%를 400%로 인상 10) 경찰 실력행사 절대 삼가 11) 회사와 당국 사태해결 최대노력 등이었다.
4월 28일 정상조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합의를 어기고 신군부는 약속을 어기고 파업주동자 색출과 적극가담자 검거하기 시작했다. 숱한 사람들이 연행되었고 70여 명이 넘는 광산노동자와 부인들이 계엄군에게 고문을 당해야 했다. 주동자는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투쟁 이후 신군부는 동원탄좌로부터 10억 원을 내게 해 동원복지회관을 건립하고, 임금인상과 각종 교육비를 지원했다. 노동자들은 그제서야 탄광에서 나와 씻고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사북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용 노조에 대해 경종을 울렸고 지역 전체 투쟁으로 확산된 투쟁이었다. 조직적 대응을 하지 못해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사북항쟁은 80년 봄 전국의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고한의 3개 덕대 광산광부 농성, 부평 반도상사 임금인상 요구 농성 등 사북항쟁 이후 농성이 번지고 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이 투쟁은 5월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며 신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북항쟁은 오랜 시간 왜곡되었고, 그 주인공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 투쟁의 경험은 87년 8월 노동자대투쟁의 물결로 이어졌다.

사북항쟁은 시간이 흐르면서 주체들에 의해 그 먼지를 털어냈던 것이다.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참고 : 사북청년회의소가 낸『탄광촌의 삶과 애환』, 사북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이를 엮은 임길택 선생님의『아버지 월급 콩알 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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