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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작성일 2008-10-31 조회 702
 

뉴스레터 [한내] 2008년 11월호 (제3호)

이달의 노동자역사
묻힌 역사, 1975년과 1985년 전태일 열사 추도식

글과 사진 : 유경순(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1988년 연세대에서 처음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에 이어 해마다 11월 13일 전후로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비정규법 시행 1년이 지났으나 비정규직이 줄기는 커녕 간접고용이 늘어나고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2008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러 생각이 스친다. 1988년 이후 매년 있었던 전국노동자대회를 다시 돌아보기도 하고,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 그 시기 노동자들의 삶과 이 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열사 분신으로 결성된 청계피복 노조의 노동자들은 열사정신을 계승하는 날을 어떻게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전태일 열사 추도식 관련 자료를 뒤적였다. 평화시장의 ‘과거’에서 만난 두 추도식을 돌아보며, 전태일 열사정신과 그 계승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1970년대, 청계노조에서 나타난 전태일 정신에 대한 이해 차이


전태일 분신(1970.11.13)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인 청계노조는 전태일 분신이후 11월 27일 결성됐다. 노조결성을 주도한 삼동친목회원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 ‘노조를 하면 노동청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알 정도였다. 이들은 전태일 정신을 ‘근로기준법에 따르는 노동조건개선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조 안의 한국노총 세력과 대립하며 노조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으면서도, 노동조건개선을 위해 소수 노조간부 중심으로 자본가들을 협박하거나 타협하여 성과를 얻으려 했다.

이와 달리 현장에서는 새로운 열성조합원들의 움직임이 비밀스러운 소모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태일 정신을 노동조건개선과 권리확보를 위해 분신한 ‘저항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열성조합원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의 호소’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정권과 자본가들을 협박하고 타협을 통해 단순히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지키는 투쟁으로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조직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1975년부터 노조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975년, 노동자와 같이 투쟁을 결의한 ‘전태일 동지 추도식’

열성 조합원들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노조활동을 만들기 위해 1975년 5주기 전태일 추도식을 계기로 삼았다. 이들은 그동안 추도식이 ‘행사를 위한 행사’였으며 ‘투쟁하지 않는 행사’라는 데서 문제를 찾았다. 그동안 있었던 네 차례의 추도식은 몇몇 노조간부들만이 모란공원에 가서 간단히 하는 방식이었다. 대부분 작업하는 평일 낮 시간, 묘소에서 추도식을 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참석할 수 없었다. 열성조합원들은 전태일의 죽음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호소’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추도식 역시 노동자들의 당면한 요구를 투쟁으로 모아 주장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성 조합원들은 11월 13일 묘소에서 거행되는 집행부 주도의 추도식과는 별도로 조합원들이 작업을 끝내고 같이 참석할 수 있는 추도식을 비밀스럽게 기획했다. 이들은 주위 노동자들과 함께 ‘전태일 동지 5주기 추모위원회’를 만들었다.


노동교실, 1975년 전태일동지 5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곳이다

마침내 11월 13일 저녁 8시, 조합원들은 추도식을 노동교실에서 진행했다. 추도식은 국민의례, 묵념, 추모예배, 전태일 수기 낭독, 추도사와 추도시 낭독, 끝으로 결의문 낭독을 했다. 추도식에서 노동자들은 ‘시간단축, 주휴제 이행, 작업환경 개선, 다락방 철폐’와 같은 근로조건 개선, ‘부정축재 일소, 균등이익 분배’와 같은 정치적인 요구를 했고, 또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형사들과 조합원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고, 결의문낭독 후 조합원들이 농성을 하려했으나 간부들의 만류로 행사는 마무리됐다.

1975년 11월 13일, 노동자들은 추도식을 5년 만에 현실 노동자들의 문제를 제기하며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수호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노동시간단축, 임금인상, 노동조건개선을 투쟁으로 확보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청계노조는 민주노조의 정체성을 보다 뚜렷하게 만들어 갔다.

1983년, 청계노조 복구투쟁의 불씨로 되살아난 ‘전태일 동지의 13주기 추도식’

신군부정권은 1980~2년 민주노조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1981년 청계노조도 서울시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자, 조합원들은 아프리 농성투쟁으로 저항하다 구속되었고, 노조는 무력화됐다. 1982년 무렵 구속노동자들이 석방되자 이들을 중심으로 평화시장 주위의 야학에서 움직이던 노동자들이 모여 노조를 복구하기 위한 ‘청계모임’을 만들었다. 1983년, ‘청계모임’은 상당한 조직력을 갖추었고, 전태일 13주기를 맞아 ‘전태일 동지 13주기 추도위원회’를 만들어 공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청계노조가 해산 당한 지 3년 만이었다.

이 시기는 추도식을 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안기부와 경찰은 추도위원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감시, 미행, 집안에 연금시키기도 했다. 추도식 날 오전 10시, 동대문 종합시장 주차장에는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계약된 관광버스 네 대가 안기부의 압력 때문에 한 대만 왔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주차장 바닥에 주저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형사들이 몰려와 노동자들을 끌고 가려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이 ‘마석 모란공원까지 걸어가겠다’ 며 추도식 플래카드를 앞세워 행진을 하려했다. 다급해진 경찰은 관광버스를 다시 불렀고, 차를 탄 뒤 신이 난 노동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마석으로 향했다.


추도사를 하는 민종덕 추도위원장

모란공원에서 추도식이 진행됐다. 어떤 이가 ‘80년 이후 노동자들의 상황과 자신의 나약함’을 뼈아프게 고백하자 참석자들은 5.17 이후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분노를 삼키기도 했다. 청계모임, 블랙리스트 해고자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이어 풍물공연과 더 열악해진 노동현실을 풍자하는 청계노동자들의 촌극이 공연되었다.

추도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려하는데 안기부가 방해했다. 노동자들은 플래카드와 북, 장구 같은 풍물 악기들을 들고 시위 대오를 만들어 모란공원을 빠져나와 경춘가도로 들어섰다. 긴 대열이 이차선 국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농민가,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해방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마석 읍내로 향했다. 시외버스, 트럭, 관광버스들이 행렬을 비켜 지나가느라 난리가 났다. 시위대오가 마석역에 도착하자 전투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고, 페퍼포그 차까지 동원해 서울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았다. 노동자들과 경찰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이 차례로 나와 핸드마이크를 잡고 ‘전태일의 뜻을 이 땅에 널리 알리자’고 주장 했다. 한바탕 몸싸움 끝에 버스를 타고 한밤중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추도식이 끝나고 경춘국도에서 가두행진을 하는 모습.

마석의 국도 행진은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노동운동에 새로운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시위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은 제각기 돌아가 상황을 신나게 알렸고, 오랫동안 침묵에 빠져있던 노동운동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누구보다도 이번 시위를 통해 힘을 얻은 것은 청계모임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감을 회복했고, 조합원을 위한 청계노조사를 만들기도 하면서 노조복구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청계노동자들은 1984년 네 차례의 노조복구 가두투쟁과 합법성쟁취 토론회를 통해, 마침내 청계피복 노조를 복구해냈다. 물론 노동자들의 힘에 근거한 ‘법외’ 노조였다.

지금 여기서,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1970년대 청계노동자들이 열사정신의 문제와 노조의 방향을 둘러싸고 대립했던 것이 2008년 여러 상황은 달라졌어도 민주노조운동의 방향과 열사정신계승을 둘러싸고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권과 자본에게 타협하면서 협상능력을 높이기 위한 ‘압력용 투쟁’으로 노동조건의 일부 개선이라는 결과를 손에 쥘 것인지, 아니면 ‘자주성’을 지키는 투쟁으로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주체로 세워나갈 것인지. 그 답은 이미 1975년, 1983년 추도식을 추진한 청계 노동자들이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민주노조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힘으로 정권과 자본에게 타협하지 않는 투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열사정신의 계승 역시 형식적 집회나 추도식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서로의 상황을 주장하고 공유하며 ‘노동자는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투쟁의 현장에서 실천해가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고 처음 맞는 2008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어떻게 맞아야 할까. 역사 속에 ‘살아있는’ 열사정신 계승을 되새겨야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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