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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민주노총 2기 이갑용 집행부는 통일운동의 본격적인 대중사업으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추진했다. 단순한 축구가 아닌 민족의 화해와 단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노동자 스스로 실현해 나가자는 취지를 담았다. 임원선거에서 통일사업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이규재 부위원장의 역할이 컸다.
민주노총은 1998년 6월부터 통일축구대회 추진을 논의하기 시작해 1999년 3월 남북대표단 1차 협상(북경), 4월 27일부터 5월 4일까지 2차 협상(평양), 8월 4~6일 3차 협상을 거쳐 8월 10~14일 평양에서 4박 5일 일정으로 ‘99 통일 염원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개최했다.
민주노총은 1999년 6월에 지역대표팀을 선발하고, 7월 17일 잠실주경기장에서 4강전과 통일문화제를 진행했다. 전국에서 총 206개 팀, 선수만 4,000여 명이 참가한 결과 민주노총 선수 대표로 22명이 선발됐다. 6월에 벌어진 서해교전(제1연평해전) 때문에 대회 성사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는데, 8월 3일 북측에서 팩스로 “평양에서 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하자”고 연락해왔다. 이에 따라 분단 54년 만에 처음으로 하늘길을 통해 민주노총 이갑용 위원장 등 노동자 대표단 37명이 평양을 공식 방문하게 됐다.
북녘 동포 10만여 명이 평양 거리에서 민주노총 노동자 대표단을 열렬히 환영했다. 통일축구대회는 8월 13일 8만 명의 관중이 참가한 가운데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렸다. 경기 결과는 4대 4 무승부였고, 이 과정에서 승부를 뛰어넘는 동포애를 확인했다.
8월 14일 민주노총 대표단은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했다. 조선직업총동맹(직총) 지도부와는 선물을 교환하고, 향후 민주노총과 직총이 공동주최하는 통일대토론회와 ‘2000년 남북노동자축구대회’ 성사를 위해 공동 노력하자고 합의했다. 대표단은 판문각과 임진각을 거쳐 남으로 귀환했으며, 통일대축전 전야제가 열린 경희대에서 환영식에 참가한 뒤 민주노총에 돌아와 해단식을 했다.
이후 정부 당국은 이갑용 위원장의 환영답례 인사 발언 등을 문제 삼아 참고인에 대한 영장 발부 및 강제연행 조사, 체포영장 발부 등의 탄압을 자행했다. 또 한동안 북한 주민접촉 승인을 유보하는 등 남북노동자 자주교류사업을 방해하는 구시대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는 분단 54년 만에 최초로 성사된 남북노동자의 대중적 교류협력사업이다. 기층민중이 주체가 된 통일운동을 활성화하고 자주적이며 대중적인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게 했다. 1999년에 이루어진 남북노동자 합의를 바탕으로, 2000년 12월 11~14일 양대노총 31명과 직총 39명이 참가한 가운데 금강산에서 남북노동자 통일대토론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한국노총·직총 3조직 대표는 “조국통일 3대 원칙과 6.15 남북공동선언을 공동의 강령으로 삼자”는 내용의 ‘남북노동자들에게 드리는 공동호소문’을 채택했다. 아울러 2001년부터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가 여러 차례 열렸으며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노동자회의’가 구성됐다.
금속·공공·공무원·보건·화학섬유를 비롯한 산별, 울산·인천 등 지역 차원에서도 교류사업과 남북노동자 서로돕기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2007년에는 북측 노동자들이 방남해 4월 30일 창원종합운동장에서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개최했고, 5월 1일 남북노동자가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노동절 행사를 진행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5.24 조치 등 남북관계 발전에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발생했다. 그러나 2015년 광복 70년을 맞아 “만나야 통일이다”라는 기치로 남측 노동자들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를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했다. 그 결과 양대노총 대표단 160명이 방북해 평양 능라도경기장에서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다시 열어냈다.
이렇듯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는 1999년 민주노총이 처음으로 성사시킨 이래 남북노동자 자주교류사업과 노동자 통일운동 대중화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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