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⑥ 전두환의 정화지침과 노동조합 업무조사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전두환정권은 노동법을 개악하면서 산별 형태로 돼 있던 노동조합을 기업별노조로 전환시켰다. ‘80년의 봄’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운동을 담장에 가두어 두려는 발상이었다. 기존에 분회와 지부는 규모에 상관없이 노동조합으로 승격(?)했고, 분회장과 지부장은 모두 위원장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기존 노동조합들 상당수는 전두환의 이런 조치를 반겼으나 민주노조진영은 연이은 노동법 개악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결국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5.18광주민중항쟁 후 노동조합 활동은 지하활동이 되었다. 신군부는 노동조합 예산지침을 내려 노조활동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예산의 관, 항, 목의 비율까지 정해주는 지침이었다. 지침에 따르면 쟁의사업비나 조직사업비 예산 편성은 불법이었다. 노동조합 예산은 대부분 후생복지비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침이었다. 한마디로 노동조합을 상조회로 전락시킨 꼴이다. 회사 내에 정화위원회가 꾸려지고 노동조합에 업무조사가 들어왔다. 토론으로 조합원들과 ‘의도된 탄압’ 본질 이해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은 회계원장과 금전출납부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일계표와 영수증만 뒤져서 영수철을 들고 노동조합이 지출한 비용이 맞는지 확인하러 나가자고 한다. 문방구, 서점, 식당, 인쇄소 등을 돌며 확인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큰 비용이 지출된 인쇄소에 들어가자마자 “행정관청에서 나왔다”고 협박하면서 “거래 내역을 확인해보고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 세무서에서 세무조사 나 올 수 있으니 정확히 기억이 안 나면 안 난다고 하라”며 답까지 준다. 노동조합에서 들고 나간 영수증은 간이세금계산서인데 그 원본을 보관하는 데는 한 곳도 없었다. 그러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뻔한 답변이었고 가는 곳마다 같은 양상이었다. 그렇게 현장실사를 하고 온 근로감독관들은 그들이 준비한 큰 종이 10여 장에 노동조합 업무조사 결과를 써서 게시판마다 붙였다. “상기 노동조합 업무조사를 0월 0일 0시부터 0시까지 실시한 결과 노동조합 임원들이 조합비 000원을 횡령하였음을 확인했고 변상 조치시켰다”는 내용이다. 공장은 발칵 뒤집혔다. 노동조합에 관심 없는 조합원도 집행부가 돈을 해 먹었다고 하면 거의 이성을 잃는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지탱하기 쉽지 않게 된다. 간부ㆍ대의원들과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경과를 보고하고 정권의 의도된 탄압으로 규정, 조합원 토론을 통해 사안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수습하는데 3개월이 넘게 걸렸다. 노조가 추구하는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1982년 여름에는 서강대 부설 산업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민주노조간부 수련회에 참석했다. 두 가지 코스가 있었는데 첫째는 1주일 합숙형태로 진행하는 교육과정이었고, 또 하나는 3개월간 동안 퇴근 후에 2시간씩 받는 교육과정이었다. 나는 첫 번째 과정인 1주일 합숙교육이었다. 5일째 교육에서 강사로부터 귀에 익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노동자, 노동조합이 추구하는 세상은 자본주의가 아니다”는 거였다. 그 짧은 한마디가 매우 충격으로 다가온 게 사실이다. 교육시간 내내 “노동조합이 추구하는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이 자본주의가 아니면 도대체 뭐냐고 질문했다. 답변은 “사회주의”라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얘기하자”고 교육을 끝냈다. 사회주의가 뭘까? 솔직히 당시에는 사회주의가 뭔지 몰랐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머리에 뿔 달린 공산당 정도로 이해했지만, 사회주의는 배우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같이 교육을 받으러 온 다른 간부들도 전혀 모른다고 했으니, 나만 무식했던 까닭은 아닌 듯했다. 1주일 합숙교육이 끝나고 조합으로 돌아와 교육 소감도 얘기할 겸 위원장을 찾아가 교육과정을 보고했다. 교육 소감을 이야기하면서 “강사가 노동조합이 추구하는 세상은 사회주의라는데, 사회주의가 뭐냐?”고 물으니 위원장 왈 “사회주의란 사회생활 하는 것”이란다. 문화활동가 모임으로 노동조합 활동가 양성 안양 시내를 걷다가 전봇대에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왔는데, 근로자회관에서 하는 풍물강습이었다. 찾아가서 알아보니 근로자회관 주최는 아니고 문화활동가들이 회관의 공간을 빌려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저녁 시간에 풍물강습을 했고 한번은 풍물, 한번은 노동운동에 대한 토론으로 진행됐다. 그곳에서 토론하며 CA 동지들, 삼민 동지들과 인연을 맺었다. 풍물 가락을 어느 정도 익혀갈 즈음, 노동조합 간부들 몇 명과 토론 끝에 문화활동가를 조직하기로 했다. 노동조합이 직접 관여하는 써클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운영하기로 해서 풍물, 민중미술, 독서회, 탈, 노래, 밴드 6개 써클이 만들어졌다. 풍물패는 50여 명, 미술은 7~8명, 독서는 10여 명, 탈은 15명, 노래 20명, 밴드 8명, 각각의 써클에는 패장이 있었다. 이 문화팀을 통틀어 ‘연우회’로 이름 짓고 내가 회장을 맡았다.  대우연우회 회장 양규헌. 1980년 12월 송년회 모습
연우회원은 100여 명 넘었고 이들은 노동조합의 핵심활동가들이었다. 각각의 써클은 일주일에 두 번씩 연습했는데 한번은 기능, 한번은 학습하는 형식으로 운영하면서 학습과목에 따라 외부 강사를 초청하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에 회사의 신입생 모집은 그 형식이 달랐다. 지방(호남)에 있는 여자상업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하고 학교 졸업식 날 통근버스가 광주 등으로 내려가 몇 대씩 태워왔다. 아마도 그들이 얘기하는 불순세력 개입의 여지를 없앤다는 방침에서 비롯된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신입조합원이 들어오면 노동조합은 신입조합원 교육을 한다.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노동가를 먼저 가르친다. ‘노동해방가’를 가르치는 중 한 여성 동지가 질문 있다고 손을 들었다. “밝고 건전한 노래가 많은데 왜 하필 칙칙하고 어두운 노래를 부르냐”는 문제 제기였다. “노동자가 살아가는 현실을 노래로 만들었으며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냐”고 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교육을 마치고 그 동지와 2시간을 토론했으나 노동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의 차이는 좁힐 수 없었고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 동지의 이름은 ‘임금연’이었다. 문화패 소모임을 하던 동지들과 연대투쟁을 시작하게 됐다. 같은 대우그룹인 대우어패럴 투쟁현장(구로동맹파업)도 다니고 연대에 관한 소감을 발표하며 토론하는 동지들은 매우 진지했고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학습 시간이 누적되면서 동지들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위원장 활동이 미온적이고 생각이 고정돼있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활동가들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활동가들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운동의 진정성을 찾는 것인데, 대체로 우리 활동방식에 동의하는 위원장을 바꿔야 하겠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사실 당시 위원장(이성구)은 한국노총의 한계와 민주노조활동에 동의하는 편이었으나 연대나 투쟁에 함께 실천하지 못하는 한계는 있었다. 활동가 그룹의 주장이 강해지면 그에 반해 노동조합 활동에 부담을 갖는 조합원이 생겨나고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조합 조직력은 문제가 생긴다. 활동가와 조합원 간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일상활동에 충실해야 한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