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주)통일 노동자들의 투쟁
⦁ 시기 : 1987년 8월 7일 ~ 28일 (주)통일은 통일교 교주 문선명의 6촌인 문성균이 대표이사로 있는 통일그룹의 주력 제조업체였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주)통일은 입사할 때 1주일간 통일교 원리교육을 받도록 하고 재직 중에도 관리직에 의해 임의로 작성된 계획에 따라 일주일씩 강제로 원리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은 지옥훈련처럼 5시 기상, 밤 11시 취침, 술 담배와 외출금지 등으로 규율훈련을 강요하며 인권을 유린했다. 심지어 교육결과에 따라 차등 대우를 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신도와 비신도로 양분시켜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만들었으며, 임금도 창원공단의 평균임금을 밑도는 등 불만을 누적시키고 있었다.
한편 통일노동자들의 투쟁은 1985년부터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왔는데, 1985년 4월 25일에는 과격농성 주도와 위장취업으로 당시 노조 위원장 문성현을 징계회부한 것에 항의해 400여 명의 조합원이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중식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을 전개해 회사측을 굴복시키고 노조를 민주화하기도 하는 등 강력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었다.
8월 7일, 아침 8시 출근과 동시에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등의 현수막을 앞세우고 1공장과 2공장을 돌며 △어용노조 퇴진 △임금정액 2,000원 인상 △통일교 원리교육 즉각 중단 △강제잔업 철폐 △해고자 전원복직 등 7개항을 요구하다가 본관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7일에는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고 이어 8일에는 ‘왜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파업농성에 돌입하는가?’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개최했으며 매일 계속되는 가두방송을 통해 회사측의 기만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작태를 폭로하는 등 체계적인 파업농성을 전개했다. 아침 기상과 집단 체조, 문화 프로그램과 집회를 통해 “왜 싸워야 하는가?” “6․29선언의 허구성” “노동자와 민주주의의 관계” 등에 관한 자체 토론을 진행했다. 통일노동자들의 선진성과 이에 대한 긍지는 그들이 회사 정문에 내건 현수막 ‘민주노조 쟁취 시범업체’라는 구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는 농성노동자들의 협상대표(진영규 외 3명)를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며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의 파업농성을 분쇄할 구사단을 조직하고 무기한 휴업조치로 조업을 중단한 후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이러한 회사에 맞서 8일에는 노동자들이 자체적인 경비대를 편성해 정문과 후문 여러 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한편, 옥상과 1층, 2층, 정문, 외곽경비조, 연락조, 방송조 등 10개로 조를 편성했다. 10일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합류하자 16개조로 확대 편성했다. 방송조의 경우 음주 엄금 등의 내부규칙 사항을 공지하고, “왜 우리는 농성을 하는가?” 등의 내용을 옥상 양측에 설치한 확성기로 주변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방송하는 한편 틈틈이 노동조합가 등의 노래를 틀어 놓았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이렇게 10일까지 경비대를 중심으로 한 250여 명의 노동자들이 농성장을 사수해냈다.
8월 11일, 오후 1시경 농성중인 노동자들이 노무과에서 충격적인 문서를 발견했다. 1983년 노동조합이 창립된 이래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단결된 힘으로 선도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주)통일노동조합이 1985년 노조 파괴공작에 의해 당시 노조 위원장 등 주요 간부가 구속되면서 어용화됐는데, 이 어용노조를 유지하기 위한 공작자료, 블랙리스트, 현 어용노조 위원장·사무장·부사장·이사 등 4명의 공동명의로 된 예금통장, 해고노동자 명단, 소그룹활동 명단, 그리고 ‘노사분규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팸플릿이 발견된 것이다. 노무과에서 작성한 문서들에 따르면 1987년도 노동조합 대의원선거 대책으로 △현 집행부 중심으로 대의원 자격요건 수정을 위해 대의원 자격을 30세 이상으로 하고, 반장 대의원이 과반수가 되도록 한다 △문제 조합원(출마가능자)을 발견하면 같은 부서로 이동시키고 선거구를 구성하되 반장이 추천한 자에 한해서 출마하도록 한다 △대의원 자격은 군필자로 수정하여 현 집행부 구상에 따라 대의원을 선출한 다음 개인관리토록 한다는 등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또한 블랙리스트에는 해고노동자들의 연명부가 작성되어 있었고, 현재 노조에 뜻을 두고 활동하는 사람 등 25명의 사진과 신상명세서 등이 첨부돼 있었으며, 위 통장에는 8월 3일 현재 잔액이 4,500여만 원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노사분규 원인’이라는 팜플릿에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술을 사주며 경조사에 열심히 다니고 각종 독서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다른 노동자를 동지로 포섭하려는 불순한 사람”이라고 규정됐 있기도 했다. 이러한 회사측의 공작 내용은 며칠 후 또 다른 문건을 통해서도 드러났는데, 7~8개 관계부처에 구정, 여름휴가, 추석, 연말 등에 4차례에 걸쳐 지급할 예산, 지출 명세서를 정리한 문서와 7월 22일자로 작성한 무술유단자 명단, 세칭 비자금 3,772만 원의 내역 등이 적혀 있었다.
(주)통일에서 농성투쟁이 일어나자 시민, 학생 그리고 해고노동자들은 열렬하게 지지투쟁을 전개했다. 회사의 휴업조치로 농성 장기화가 예상되자 농성자들은 조합원 자체 모금운동을 벌여 농성자금을 확보했고, 미처 농성에 참여하지 못한 노동자, 시민, 노동자 가족들은 음료수, 밥, 담배 등을 농성장에 반입시켜 사기를 북돋웠다. 또한 9일에는 경남대 학생회에서도 농성을 지지하며 학생들이 모금한 90,900원의 성금을 집행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1985년에 해고된 문성현의 가족과 민주단체들을 중심으로 회사 정문 앞에서 농성투쟁에 돌입하여 투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해고노동자들은 농성 시작 때부터 1공장 잔디밭에 천막을 설치하고 현장노동자들과 함께 농성을 전개했다. 농성에 합류한 해고자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된 가운데 8월 15일에는 전경 400여 명과 백골단 200여 명이 투입돼 해고자들의 천막을 강제철거하고 한 명에게는 구류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8월 17일에는 회사측이 비농성자들과 협상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농성집행부와 함께 항의투쟁을 전개하다 2명의 해고자가 구속되기도 했다. 정부와 회사측은 이들을 외부세력이라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통일노동자들은 이러한 공격을 믿지 않았고, “우리들 노동자에게 내부도 외부도 없다. 오직 단결된 하나의 노동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단결을 과시했다.
(주)통일에서 1985년 이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직전까지 노동운동으로 해고된 사람은 28명에 이른다. 이들은 해고된 후 회사 앞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현장 동료들과 노동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기도 했고, <통일노동자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8월 13일, 농성 7일째를 맞아 ‘어떤 각오로 투쟁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조별 토론을 한 후 조별 발표에서 “노동자의 문제는 노동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세로 끝까지 투쟁하자” “해고자 복직을 위한 투쟁” “지도부에 따르자” 등의 토론이 이루어졌고, 13일 이후에도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개최했다. ‘노동자의 위치’라는 토론회에서는 한 노동자가 “자신 있는 생활을 하려 했지만 회사가 오히려 의욕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과감히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갖자. 이제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다”라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농성과정을 통해 노동자 특유의 공동체 의식과 어두운 노동현장의 현실을 타개하려는 의지들이 결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파업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파업농성 18일째인 8월 24일경에 이르러서다. 현대자동차 등 3개 자동차회사에 공급되는 부품이 조달되지 않자, 현대자동차 관리자들이 회사 주위에 찾아와 협조요청을 위한 전단을 뿌렸다. 이날 아침 9시40분경 회사측은 800여 명의 구사대를 동원해여 파업농성을 분쇄하려고 했다. 이들 구사대들의 숫자에 압도당한 농성노동자들이 옥상으로 밀려났고, 이 과정에서 미처 옥상으로 피신하지 못한 노동자 2명이 구사대에 떠밀려 2층에서 떨어져 척추가 절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농성노동자들은 경찰에 병원 후송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이를 묵살한 채 비농성자들의 합류만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비농성자들이 2공장 후문을 통해 농성자들과 합세하자, 그때까지 구사대 폭력을 방관하던 경찰이 그때서야 구사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격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농성자 300여 명은 2공장으로 가서 격투 끝에 구사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이 과정에서 구사대를 진두지휘했던 부사장을 사로잡아 각서를 받아낸 후 풀어주었다.
8월 28일, 드디어 회사측과의 협상을 통해 민주노조 인정, 강제잔업 철폐, 원리교육 중단 등 3개항을 타결했다. 이어 28일에 마지막까지 줄다리기를 하던 임금문제 관련 일당 1,000원 인상, 가족수당 5,000원, 일률적인 2만 원 수당지급, 해고자 복직 등을 쟁취하면서 22일간의 투쟁을 마무리지었다. 회사와 경찰은 9월 21일 새벽 통일노조 위원장 진영규 등 6명과 기아기공노조 간부 3명을 강제 연행하여 구속했고, 이에 분노한 통일 노동자들은 가두투쟁, 상경투쟁 등을 전개하며 약 한 달간 줄기찬 투쟁을 전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