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동운동사건
..... 삼척탄좌 노동자들의 1~2차 파업투쟁(1987년 8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8-04 조회 348

삼척탄좌 노동자들의 1~2차 파업투쟁

 

⦁ 시기 : 1987년 8월 4일 ~ 9월 2일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는 사북의 동원탄좌와 함께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으로 노동자수가 2,700여 명에 연 매출액이 560억 원에 이르는 굴지의 광업소였다. 계열기업으로 삼천리연탄, 삼천리주택, 삼천리제약, 삼한광업, 삼천리기계, 미성상사, 경인도시가스, 삼덕탄광, 서진탄광, 중앙개발, 인동탄광 등을 거느리고 있는 거대기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규모와 달리 노동강도는 거세서 노동자 1인당 1일 생산량(OMS)1.84(국내 평균 1.24)으로 국내 제일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월 평균 임금은 34만 원에 지나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에게는 철저한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고용할 때는 항문까지 들여다보는 등 노예시장의 노예를 고르듯 했으며, 관리자들에게는 어디서나 거수경례를 붙이게 하는 등 봉건적 노무관리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84, 채탄 후산부 마진수 등 노동자 11명이 모임을 갖고 88일 삼척탄좌도 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85일 모임을 확대해 24명의 노동자들로 삼척탄좌 노동조건개선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86일 이들 중 13명이 다시 모여 토론한 결과 88일이 토요일이므로 이틀 연기해 810일 총파업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87일부터 24명의 명단을 파악한 후 이들 전원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정운환(당시 25, 기채과 후산부 근무. 강원대 중퇴, 김영민이란 이름으로 위장취업, 14개월째 삼척탄좌에서 근무)노동조건개선 추진위원일부가 유인물을 제작하여 88일 새벽 구사택과 신사택에 배포했다.

 

[유인물 전문]

 

삼탄 동료 여러분!

그동안 회사의 온갖 기만과 횡포에도 묵묵히 참으며 일만 하는 우리를 회사는 끝내 무시하려 하고 있습니다. 회사와 야합한 어용노조의 엉터리 임금인상과 여러가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단결, 궐기하려는 우리의 낌새를 눈치챈 사장과 그 똘마니들은 87일 주동자 20여명을 납치, 회유하며 우리의 의지를 꺾으려 들었습니다. 한 수 더 뜬 회사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비웃기나 하는 듯이 임금과 상여금 등은 무시하고 겨우 보안장비 지급 등으로 우리를 조롱하는 개수작을 늘어놓았으나 우리는 그들의 그 따위 소리를 까뭉개고 일한 만큼 받으려는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삼탄 노동자의 기개를 보여주기 위해 뭉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행동요령에 따라 13개 조항에 달하는 우리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한 사람의 이탈도 없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행동 요령

음주금지 비폭력 원칙 고수, 파괴금지 노동조건개선 추진위원회의 통제에 순응 정해진 교섭단의 원칙에 어긋나는 개별적 교섭 등 개인행동 절대금지

 

우리의 주장 

도급제 철폐하고 월급제 실시(선산부 월 60만 원, 후산부 55만 원, 갱내간 접부 45만 원, 갱외부 40만 원노동자와 사업자간 3:1로 임금감시위원회 발족 상여금을 현 총 소득의 270%에서 400%로 인상 월 만근공수 현재 26공수에서 24공수로 하계휴가를 유급으로 하고 휴가비 10만 원, 김장보너스 5만 원, 구정, 신정, 추석명절 때 각 3만 원씩 지급 보안장비 무상 지급(마스크 연 1, 장화 4컬레, 척추보호대 연 2, 마스크휠타 월 6중식비 현 270원에서 1,000원으로 인상 진폐의증시 종전과 같이 통상임금의 200일분 지급 가족수당 지급 회사 경영실태를 정기적으로 공개 근기법 상 지하작업은 16시간인데 8시간 동안 일하고 있으니 2시간에 대한 임금 지급 이상과 같은 사항을 조광하청에도 동일하게 실시 마을금고·소비조합을 노조에 이양하든지 노사 공동운영 

 

구호

"어용노조 몰아내고 민주노조 쟁취하자"

"도급제 철폐하고 월급제 쟁취하자"

 

- 삼척탄좌 노동조건 개선 추진위원회

 

이러한 유인물은 즉각 효과를 나타냈다. 현장노동자들이 술렁대기 시작했고 본사에서 온 사장 박우병은 출근자들을 모아놓고 2시간 동안 이 유인물을 읽어주며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유인물 내용을 선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출근자들이 파업 돌입 여부를 놓고 웅성대는 사이 갱 내에서도 파업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작업을 중지하고 갱 밖으로 나와 출근자들과 합세해 광업소 앞 광장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노조위원장 김종호는 이 자리에서 사표를 냈다.

 

농성자들은 순식간에 3,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회사측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밤 1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한역으로 진출했다. 한편 남아있던 일부 대표들이 재협상을 하려하자 노동자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모두 고한읍으로 총집결할 것을 결의했다. 새벽 4시경 고한역에 집결한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고한역으로부터 마이크시설을 인계받고 500여 명이 계속 농성을 벌이다 날이 새자 집으로 돌아갔다. 810일은 일요일임에도 3,000여 명이 다시 집결했다. 그러나 회사측과는 몇 차례의 협상을 진행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811일 새벽 4시경 전경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 1,000여 명이 지켰지만 별다른 변동사항이 없자 200여 명만 남고 귀가했다. 그러나 아침 7시경 500여 명의 전경들이 몰래 숨어들어 몽둥이와 군화발로 짓밟고 무참히 해산시킨 뒤 15명을 연행해 갔다. 이러한 경찰의 만행에 분노한 노동자 3,000여 명이 고한역 주변에 집결해 역사를 점거한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의 직격최루탄에 맞은 노동자 3명이 중상을 입고 원주로 후송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자 삼척탄좌의 조광업체인 인동탄광과 중앙개발 노동자들이 덤프트럭을 타고 내려와 대오에 합류했다. 이에 힘입은 노동자들이 다시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저녁 8시경, 경찰들은 연행해 갔던 노동자들을 슬그머니 석방시키고 철수했다.

 

경찰이 철수하자 고한역에는 7,000여 명이 운집하여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다음 날 유성연 회장이 내려와 협상이 열려 7개 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적 성과는 지극히 미미한 것이어서 불씨는 계속 지펴져 있었다. 협상에 대한 불만은 당일에도 드러나 회장의 차를 가로막고 15분 동안 풀어주지 않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에 관리자들이 “70살 먹은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자 왜 그동안 손자 같은 애들과 아들 같은 노동자들을 고생시킨 것은 생각하지 않느냐며 항의했지만 곧 풀어주었다.

 

1차 파업이 종료된 후 노동자들은 협상결과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노동조합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를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해산했다. 그러나 파업이 종료된 뒤에 구 어용집행부를 중심으로 한 민주파 파괴공작이 심각해져 813일 밤에는 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구사택을 돌며 지도부 놈들이 회사측으로부터 돈을 먹었다. 나와서 다시 파업하자고 선동며 지도부에 소속돼 있던 노동자들의 집 유리창과 기물을 파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815, 일부 노민추 위원들이 모여 임시 노조 집행부를 선출했는데 위원장에 마진수, 부위원장에 홍구덕을 지명했고, 정운환이 총무로 선출됐다. 그러나 1차 파업 당시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다른 노동자들은 대부분 제외돼 버렸다. 817일에는 구 대의원단이 노조 재장악 야심을 노골화해 광업소 소장을 만나 자신들에게 대표권을 줄 것을 요청하자, 노민추의 대표권만을 인정하겠다던 약속을 파기하고 이를 승낙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818일에는 광산노련 간부들이 내려와 구 대의원과 신 집행부가 5:5의 지분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선거일정과 노조 교육까지 협의하자고 종용하면서 구 어용노조를 지원했다. 이에 신집행부 다수가 동요했지만 정운환, 권혁창 등 현장노동자의 강력한 반대로 취소됐다.

 

820, 신 집행부의 어용화에 실패한 구 대의원단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갖고 김경용을 위원장 직무대리로 선출하고 910일 노조위원장 선거를 직선제로 실시하겠다는 공고를 붙였다. 이러한 공고문은 파업 이후 현장에서 갖은 수모를 겪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821일 갑방 퇴근자들과 을방 출근자들을 중심으로 신집행부와 함께 파업을 선언하고 300여 명이 농성에 돌입했다. 822일 농성대오는 1,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824일 회사측은 기만적인 휴업조치에 돌입했다. 회사와 언론은 구사대들의 폭력은 무시하고 사실을 왜곡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노조 주도권 다툼으로 파업을 재개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광원 800여 명이 23일 구판장에서 식료품을 탈취하는가 하면 광원사택촌을 돌며 농성에 참가하지 않은 광원집의 유리창을 깨는 등 소란을 피웠다. 231230분께 광업소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400여 명의 광원들은 광업소 사무실을 점거, 직원 20여 명을 감금시킨 채 농성을 재개했다.”(고한, 유동희 기자)고 보도하자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망은 극에 달했다. 이 기간 동안 회사측의 회유공작에 말려 파업지도부 다수가 동요하고, 심지어 회사측의 주장에 동조하다 제명되기도 했다.

 

831, 새벽 6시경 자녀들을 학교로 보내기 위해 못골아파트로 내려가던 노동자 6명과 7명의 여성이 구사대 200여 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가까스로 몇 명이 도망쳐 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날이 밝으면서 폭력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 1,500여 명이 못골아파트로 진격해가고, 만항 쪽에서도 수백 명이 밀려 내려가기 시작하자 형사들과 구사대 200여 명은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이 과정에서 지도부 중 정운환과 신언도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쳐 버림으로써 지도부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91, 농성 12일째 되는 새벽 450분경, 전경들이 몰려들었다. 510분경 페퍼포그 2대를 앞세우고 1,500여 명의 전경들이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소장 심성보(국회의원 심명보의 일가친척)는 식당에 난입해 네 년들이 밥해 처먹였지? 이런 년들은 다 죽여야 돼라며 두들겨 팼다. 흡사 사냥과 같았던, 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무력진압은 1시간 반 만에 끝나고, 회사는 깡패들과 전경들로 가득 찼다. 쫓겨난 노동자 1,000여 명은 읍내로 다시 모여들어 전기통신공사 차를 뒤집어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전경들에게 밀리고 말았다. 전경들은 구 사택 쪽으로 내려오며 집집마다 닥치는 대로 최루탄을 까 넣었다. 수업 중인 고한중학교 안에도 아랑곳없이 최루탄을 쏘아댔다.

 

이러한 사냥은 이날 종일 벌어져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연행됐고, 다음날인 92일 노동자 500여 명의 마지막 항쟁을 끝으로 완전히 진압돼 총 15명이 구속됐다. 이렇게 1987년 노동자대투쟁 중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삼척탄좌 노동자들의 2차 파업은 종결되고 말았다.

 

⦁ 참고자료 안재성, <타오르는 광산> (돌베개, 1988)
 

이전글 마신산업 노동자들의 투쟁(1987년 8월)
다음글 원일기업 등 전북지역 운수노동자 투쟁(1987년 8월)
목록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