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⑨ 대우전자부품노조 파업투쟁에 나서다 노동자투쟁이 확산되는 상황을 자본가들은 유행병처럼 번진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뜨거운 연대투쟁의 열기를 담아 요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조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최대한 확보해 간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요구를 받아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활동을 통해 요구와 분노를 모아내고, 투쟁으로 요구를 관철하는 노동자조직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조합은 수동적이고 형식적으로 조합원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대리기구가 아니라 요구를 조직해 투쟁하는 투쟁조직이다. 그래서 한국노총의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노조운동’이라고 했다. 87년 여름. 대우전자부품노조도 15차례의 임금협상을 진행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회사는 “노동조합 집행부는 파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파업 전에는 협상안을 내기 어렵다”는 말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지역 연대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활동가들과 간부들의 투쟁성으로 봤을 때 회사 얘기가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민주노조진영의 공동임투는 지역에서부터 일정을 조율하 다른 사업장의 임투 상황을 고려할 수 없었고, 조직력에 따라 먼저 파업에 들어갈 수 있는 노조가 투쟁을 시작함으로써 다른 사업장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노조 내부에는 늘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에 임투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조직력 점검에 집중해야 하고, 취약한 현장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밤잠을 못 자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 시점에서 디데이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노동자 스스로 토론과 투쟁으로 의식 변화 저녁 9시쯤 조용히 조직차장을 찾아서 상황점검 좀 하자고 하면서 정문 상황을 살폈는데 별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경비들의 경직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 안에는 예비군 대대가 있었다. 정문 옆쪽으로 무기고가 있고, 평소에도 수류탄을 비롯하여 소총과 실탄들이 꽤 많았다. 품 안에 절단기를 감추고 무기고로 가는데 조직차장이 “여기는 왜 가냐””며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우리 파업투쟁 대오가 오래 버티려면 우리가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자 조직차장은 이해가 안 가는지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반문하는 사이 무기고 앞에 도착했는데, 무기고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무기고는 텅 비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회사에서 미리 눈치채고 소총, 실탄, 수류탄 따위 무기들을 바깥으로 모두 뺐다는 거다. 무기탈취는 미수에 그쳤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미수에 그친 게 다행이다. 파업대책위 명의로 다음날 파업에 돌입했다. 100여 개의 만장과 깃발, 현수막, 대자보가 공장을 도배했다. ‘파업에 돌입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주제로 조별, 반별로 토론이 진행됐다. 파업 프로그램과 규찰 등에 대한 방안들이 노조 집행부가 아니라 현장에서 속속 제출돼 결의로 모아다. 조합원 토론은 예상을 뛰어넘어 알차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함성과 구호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파업대책위는 밤과 낮이 없었다. 야간 규찰에 200~300명이 투입되기 때문에 야간에 교대를 서는 규찰들과의 소통과 토론은 매우 중요하다. 공장 담장을 한 바퀴 도는 순찰은 한 시간 이상 걸렸는데, 때에 따라서는 몇 시간(4시간) 이상도 걸린다. 규찰을 서는 동지들과 토론을 하기 때문이다. 파업으로 부쩍 성장한 조합원들 회사 담장에는 노동조합이 설치한 초소가 20여 개 있었고, 초소마다 3명의 동지가 교대로 규찰을 섰다. 7번 초소쯤 갔을 때 규찰 서던 동지가 매우 반갑게 맞으며 우선 사과부터 하겠단다. 신입조합원 교육할 때 ‘노동해방가’를 부른 것에 문제 제기했던 동지(임금연)였다. 그 동지는 “스스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교육시간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파업을 준비하면서 노동자의 처지를 알게 되었고,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는 것이다. “투쟁공간을 통해 회사의 부당함과 사회구조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면서 “노동자가 추구해야 할 세상이 어떤 건지 알고 싶으니 얘기 좀 해 달라”는 거였다. 함께 규찰을 서는 두 명의 동지들도 ‘파업을 왜 하는지’ ‘빨갱이가 뭔지’에 대해 알고 싶다며 초소 순찰은 다른 사람에게 하게 하고 오늘은 자신들과 시간을 갖자고 졸라댔다. 노동자가 추구해야 할 사회상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계속되는 질문에 진도는 계속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설명하느라고 시간이 길어졌다. 경험담, 서강대에서 있었던 민주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들로 얘기를 진행하면서 노동해방 속에 담긴 뜻은 ‘사회주의’라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풀었는데 의외로 쉽고도 당연하다는 투로 받아들였다. 그 초소에서 밤새우면서 진행했던 질문 형식의 토론은 5시간 동안 진행됐지만 지루함보다는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3명의 동지는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이후에 ‘노동자대학’에서 파견 교육 형식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자신들은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 동지들은 공장 내 소조장 역할을 담당했다. 10여 일의 파업은 요구안과 비교하면 완전히 쟁취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파업이라는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식이 확장되고 조직력이 확대강화 되었다는 측면에서 성과 있는 파업이었다.  1987년 12월 3일 대우전자부품노조 편집회의 논의 사항을 메모한 양규헌 노트
훗날, 봉고차로 전국 누비며 조직화·투쟁 이후 위원장이 된 후 적치된 조합비가 있어서 봉고차를 하나 사들였다. 그 차는 주로 지역활동이나 경기노련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차였다. 때로는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전노협 지도부, 지도위원 등이 함께 봉고차를 타고 대우조선에 다녀오기도 했다. 한번은 대우조선에 다녀오다가 검문을 당했는데, 신분증을 가져가서 신원조회를 하고 온 경찰관이 신분증을 돌려주면서 한마디 남긴다. “이 차 안에는 별이 가득하네요”라고. 지역에 가투(가두투쟁)가 있을 때는 어김없이 봉고차가 이용됐는데 주로 화염병 나르는 용도였다. 대림대, 안양대 등에서 만들어 놓은 화염병을 봉고차에 가득 싣고 가투 예상지역 골목에 대기하고 있다가 싸움이 시작되면 선봉대에 전달했다. 봉고차를 운전한 대우전자부품노조 사무국장은 지금도 만나면 “그때 수명이 5년은 단축됐다”고 설레발을 깐다. 민주노조운동의 격변기에 사무국장 본인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달리 운전을 한다는 이유로 거제에서 서울까지 전국을 누볐다. 그리고 지노협에 차량이 필요하다고 하면 즉시 달려나가야 했다. 내가 수배되거나 구속되었을 때 뒷바라지와 수발도 힘들었을 테고. 그 후에 만난 사무국장의 하소연은 화염병 운반 지정 차량으로서 차 안에 신나 냄새가 없어질 날이 없었다는 푸념이었는데, 몸 고생과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하지만 “운동이 그런 건데 어떡하느냐”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