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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1990년 11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0-11-11 조회 262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199011)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개요

19901111일 전노협, 대기업노조, 업종회의는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모 `90 전국노동자대회를 고려대에서 열었다. 이 대회는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적 단결의 계기이자, 전노협 결성 이후 집요하게 자행되어온 정부와 자본측의 탄압에 맞선 공동투쟁이었으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계승·발전시켜 민주노조운동을 정착시키고 전태일 열사의 20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이날은 전노협 결성 원년이자 전태일 열사 분신 20주기라는 점에서 대회위원회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통한 민주노조운동의 토대구축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사전행사로 114일 마석 전태일 열사 묘소참배와 추모식을 시작으로, 116일에는 민주노조 탄압에 대한 대국민 선전전을 진행했고, 1111일 전국노동자대회 이후에는 1113일 단사별 전국노동자대회 보고대회를 개최하는 등 총력적으로 치러졌다. 또 대회위원회는 이 대회를 중앙 중심의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역과 단위사업장 모두가 참여하는 전국행사로 치르기 위해 대회문화사업, 대회언론홍보사업, 대회조직사업, 대회전술지도사업 등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준비했다.

19901111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전국노동자대회가 정부와 자본의 침탈로 끝까지 원만하게 치러지지는 못했지만, 대회 침탈을 계기로 정부와 자본의 반노동자 성격을 다시 한번 부각켰다. 또한 대회 침탈에 대한 항의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단결투쟁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후 지역과 단위사업장별 기념행사를 통해 민주노조 진영의 노동자 축제의 상을 구체화했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의의와 목표

대회의 의의와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자본가와 정권의 민주노조 말살 책동에도 전노협, 업종노조연맹()을 비롯한 민주노조 진영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1990년 하반기에는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민주화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어 전체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적 단결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반면 아직까지 제조업과 사무직, 지역과 업종, 그리고 대공장 등을 망라한 전국적 통일단결의 수준이 낮은 상태여서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막아내기 위한 강고한 연대전선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므로 전국노동자대회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오늘에 계승하면서 전국의 민주노조가 한자리에 모여 단결과 투쟁을 대내외적으로 과시,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결속을 다짐하는 민주노조 총단결투쟁의 계기가 돼야 한다.

둘째, 전국노동자대회의 내용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사안별로 쟁점을 계속 확산시키며 강화되고 있는 노동운동 탄압에 공동대응하고, 자주적인 노동조합 활동의 족쇄로 이용되는 노동악법에 대한 전대중적 철폐투쟁의 결의를 모으는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노동악법철폐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되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해서는 하반기 단체협약 갱신투쟁을 공동으로 수행하고, 각종 사안별 연대투쟁을 심화하는 한편, 문화활동, 교육활동의 성과를 총결집해 더욱 첨예한 대립이 예상되는 1991년 임금인상투쟁을 조직적으로 대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즉 전국노동자대회는 ‘1990년 투쟁의 총결집점이자 ‘1991년 투쟁을 향한 사전출정식으로 위치 지워져야 한다.

넷째, 마지막으로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만의 단결과 노동자의 기본적 요구를 쟁점화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 민중·민주진영의 주도세력으로서 민중운동을 압살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현 정권에 대해 확고한 투쟁 의지를 표명, 전체 민중진영의 대동단결을 선도하는 노동자대회가 되어야 한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주요 요구

민주노조 진영이 투쟁으로 극복해야 할 최대 관건이 노동운동탄압 분쇄와 민주노조 총단결을 통한 전국적 조직력과 지도력 강화에 있었기 때문에, 대회의 요구와 주안점 역시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한 표어로 모아졌다. 전국노동자대회의 주요 요구로는 민주노조 총단결’, ‘노동운동탄압 분쇄’, ‘구속노동자 석방 및 원직복직’,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악법 철폐’, ‘우루과이라운드 저지’, ‘민중생존권 쟁취’, ‘보안사·안기부 해체’, ‘국민사찰 중지등이었다.

대회위원회는 민주노조 진영의 요구들을 관철할 수 있는 실천과제를 설정, 민주노조 진영의 조직력과 투쟁력의 극대화를 꾀했다. 설정된 실천과제는 첫째, 대공장·중간노조·업종, 그리고 한국노총까지 포함하여 폭넓은 노조 진영의 주체적 동참을 조직하기 위해 대회 요구와 형식, 그리고 프로그램 구성을 최대한 유연하게 배치한다. 둘째, 광범위한 대중의 동참을 조직하기 위해 합법공간 및 언론을 최대한 활용하여 1111일 대회를 정치적으로 부각시키며, 아울러 조직적인 선전·홍보작업이 강화돼야 한다. 셋째, 이와 함께 민주노조 진영의 10월 사업계획이 1111일 대회의 사전조직화 과정으로 배치될 수 있도록 각 부서 및 연대사업 내용이 재점검되고 총력 집중되어야 한다. 넷째, 이번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적 발전전망과 관련해 대회 내용(요구·프로그램)의 측면에서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다섯째, 정부측의 원천봉쇄를 비롯한 대회 방해 책동에 대비,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대회 참여가 불가능한 노동자들도 동참할 수 있는 전술방침을 준비해야 한다 등이었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조직화 활동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는 912일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 개최를 결정하고, 1012일 업종연맹()에서 공동개최를 결정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1015일부터 실무 준비회의를 시작, 10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전국노동자대회 개최를 공표했다.

대회준비위원회는 각 지노협과 업종협의 침체된 조직들의 연대활동을 최대한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따라 대공장 민주노조, 미가입 중간노조, 업종협 등의 공동 참여를 최대한 조직하기 위해 지노협과 업종협 일상사업을 총화하는 가을문화제와 대중행사를 추진했다. 행사는 전국노동자대회 중간 결집의 장이자 당면 투쟁 현안 및 전국노동자대회 선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027~28, 113~4일 사이에 전국에서 동시에 개최했다. 대회위원회는 대중적 형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등반대회, 체육대회, 대동놀이, 장터, 문화공연, 경연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기획됐다. 특히 대회위원회는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에 대한 결의와 요구를 사전 선전 임무로 강조했으며, 대중행사 진행 과정에서 전태일 20주기의 의미와 정신을 되살리는 내용과 형식을 강구하도록 했다. 가을문화제는 17개 지역·업종에서 다채롭게 진행됐다.

전국노동자대회 사전 조직화는 단위사업장에서 공식회의를 통해 참여를 결의하고 동원 인원을 결정, 이를 지역 차원으로 확대해 갔다. 또 지역별 결의수준을 높여내기 위해 가능한 대중적 프로그램을 사전에 배치하고, 선동단을 활용하며, 대회 당일의 전술지침에 따른 동원·집결방침을 인솔조장들에게 충분히 숙지시켰다. 특히 각 지역 운영위원회에서는 현시기 노동운동 탄압과 노동악법을 돌파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결집과 업종회의와 공동주최가 의미하는 민주노조 단결의 성과를 적극 설명하고 공유했다. 지역 차원의 동원목표와 행사 일정, 미가입노조 참가조직을 위한 계획과 역할 분담에 기초한 동원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한편 전국노동자대회 이후 발생한 부상·구속자 대책 수립과 단사별 보고대회, 대회평가 등을 적극적으로 조직했다. 이렇게 투쟁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한편 11월 말 또는 12월 초로 예정된 민중대회와 1991년 임금인상 투쟁을 결의해 나갔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문화사업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를 힘차게 준비하기 위한 문화준비팀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전노협 문화국, 업종() 문화국, 전노문협 대표, 전국문화운동대표자회의 대표로 구성된 행사준비팀 내 문화준비팀은 민예총과 기타 행사준비 및 진행을 함께 할 단체의 참여를 요청했다. 산하에 풍물, 노래공연 작품팀을 구성하고 각 문화단체의 결합을 추동하면서 여러 차례 기획회의를 거쳤다.

이렇게 구성된 문화준비팀은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의 행사 기조와 전야제 프로그램을 지침으로 제출했다. 전야제 행사 기조는 전국노동자 연대 고취 및 지역 간 교류와 이해를 높이는 대중적 참여 프로그램 중심적으로 배치 본대회의 결의 끌어내며,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모식과 결의를 결합시켜 전태일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내용 있게 살려냄 3년여의 민주노조 활동 속에서 단련된 노동자 문화패의 역량을 향후 전망 속에서 결집 문화패의 장르별 독창성을 최대한 살려 각 문화패의 조직적 발전 도모 문화패의 준비·집행력 고려해 현실적 프로그램 마련 등이다. 문화준비팀은 이러한 행사 기조에 부응하는 전야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선전홍보

대회위원회는 대회선전물의 내용과 기조를 기본적으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법적·제도적 탄압에 두고, 부차적으로는 보안사 사찰과 민중탄압을 자행하는 현 정부에 대한 분노를 끌어내는 데 두었다. 선전홍보팀은 설정한 선전 기조를 실어내는 선전물 형태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타성적이고 의례적인 형태를 벗어나 실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고 도움이 되는 선전물 양식을 개발했다. 특히 구호선전물 활용, 단사와 가두에 부착하기 쉬운 크기의 선전물 제작에 집중했다.

언론홍보는 1020일 전노협 등 주최단위의 기자회견으로 본격화되었다. 1020일 현주억(전노협 부위원장), 배일도(중앙위원), 김경은(서노협 부의장), 권태구(민출노협 의장), 김문철(전문노련 위원장), 허장(사무노련 사무처장), 언론노련 사무처장 등이 참여해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은 여러 일간지에서 취재했으나 보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전술기획

당시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전노협 활동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업무조사를 전면 실시하겠다면서 전노협에 대한 전면적 탄압을 예고하고 있었다. 11일 대회 자체에 대한 침탈과 봉쇄, 아울러 업종회의와 최초로 공동주최한다는 점을 고려해 전노협을 폭력 과격집단으로 내몰아 업종회의와 분리를 획책하기 위해 폭력적인 선제공격이 예상됐다. 따라서 예상되는 원천봉쇄나 조기침탈에 대비해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결의와 뛰어난 기동력이 필요했다. 대회장에 결집, 빠르게 대회를 성사시켜내고 침탈에 맞서 강고히 투쟁하는 것이 대회의 관건이었다. 13명으로 구성된 대회 전술기획팀은 조합원들의 동참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을 배치하고 대회를 평화적으로 사수한다는 기조 아래 다섯 가지(상경, 지역규탄대회, 상경 후 이동, 대회, 가두)의 투쟁 전술계획을 수립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위한 선봉대 사업지침도 마련했다. 보안사의 불법사찰이 밝혀지면서 하반기 투쟁 전선에 새롭게 불이 붙었지만 노동자들은 상반기 임투 이후 이완된 투쟁력을 쉽게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중한 정세와 조합원의 동력침체라는 상황에서, 선봉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는 실로 막중했다.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모사업

대회준비위원회는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모기간114일부터 13일까지 설정하고 각종 추모기념 사업을 전개했다. 이는 전태일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이를 광범위하게 선전선동함으로써, 민주노조 진영의 역사적 의의와 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었다. 또한 정부와 자본의 노동운동탄압 분쇄를 위한 투쟁역량을 광범위하게 이끌어 내기 위해, 추모기간의 모든 행사에 조합원들의 폭넓은 참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국노동자대회가 진행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회위원회는 전태일 열사 추모사업의 대상을 조합원만으로 한정하지는 않았다. 대국민 홍보선전과 언론활동을 강화하여 전국노동자대회의 국민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민주노조운동의 국민적 합법성을 획득해 내기로 했다. 또한 추모사업을 통해 우선적으로 업종, 대공장노조 조합원들의 광범한 참여를 통한 민주노조 총단결의 힘과 결의를 결집시키고, 나아가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여론을 확산시켜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의 정당성을 전국민적으로 확보해 내고자 했다

전태일 열사 20주기 추모식은 11412,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역에서 전노협, 12개 업종회의, 전태일기념사업회 주최와 청계피복노동조합 주관으로 엄수했다.

한편 전태일 열사 20주기 기념 심포지움도 진행했는데, 1990117~8, 연세대학교 장기원기념관에서 전태일기념사업회 주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업종노동조합연맹()의회의 후원으로 많은 선진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의 참여 속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전태일 노동상과 전태일 문학상 시상식, 전태일 열사 20주기 기념 ‘1990 노동예술제도 진행했다. 노동예술제는 노래판굿 꽃다지2’ 공연, 노동미술전을 비롯해 국악과 춤, 노래, 영화제, 마당극 등 거의 전 장르에 걸쳐서 펼쳐졌다.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 전개

1990년 전국노동자대회는 1부 대동제와 2부 본대회로 진행됐다.

앞서 1110일 밤 10시부터 전국의 노동자들이 각 지하철역에 도착, 과감하게 대규모 대오를 형성하고 대회장을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안내조를 따라 고려대 뒷산 길을 통해 대회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2310, 전국노동자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대회장인 고려대 민주광장에 집결했다. 대회장 연단에는 전노협과 업종회의의 대형깃발이 걸리고 전야제 준비가 시작됐다. 다음날 새벽 130분경 4,000여 명 집결했고, 낙오됐던 대오도 안내조를 따라 속속 집결했다. 그렇게 해서 1111일 새벽 130분부터 시작된 전야제를 마친 뒤 지역별 참가자들은 토론 후 취침했고, 대회장에는 사수를 위해 학생들이 남았다. 대회장 주변에는 노동자 선봉대 250여 명과 학생 4백여 명의 규찰 전투조를 배치했다.

아침 7, 참가자들은 체조와 구보를 하고 식사를 마친 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기세를 드높였다. 910분 전국노운협과 전대협 주최로 내각제 저지, 민자당 해체, 전국노동자대회 사수를 위한 노동자 학생 결의대회를 하고 1,000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이 정문으로 행진해 나갔다.

한편 920분부터 시작된 대동제는 풍물패의 판굿 열기 속에 마무리되고, 125분 본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8천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개회선언과 동시에 대회장 정면 옥상에서 대회를 축하하는 꽃가루가 뿌려지면서 대회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전노협이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하고 노동해방 만세삼창으로 본대회도 마무리됐다.

대회 폐회 선언 후 오후 2시부터 풍물패를 선두로 전노협, 업종회의, 각 지노협의 깃발을 높이 앞세우고 투쟁의 열기 속에 구호와 노래를 외치며 대회장을 나와 정문이 있는 대운동장으로 행진했다. 이때 신촌 로터리에서는 학생 400여 명이 1시간여 동안 가두 투쟁을 벌인 뒤 연세대로 들어가 1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노동자대회 지지집회를 하기도 했다.

1530분경 전국노동자대회가 종료됐다. 그러나 전철역으로 이동하는 노동자들은 물론 버스 안의 시민까지 무자비하게 연행됐다. 남은 노동자와 학생들은 해산을 멈추고 즉각 항의투쟁에 돌입했다. 고려대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은 지랄탄 연기 속에 노태우 정권 타도, 연행자 즉각 석방을 외치며 치열한 투쟁을 이어갔다. 오후 630분경 전술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남아있던 노동자들도 최종 집회를 하고 귀가했으나, 당시 총 연행자는 확인된 사람만 1,153명이었고, 실제로는 13백여 명으로 예상됐다.

저녁 830, 전노협 지도위원, 지노협 간부, 전노협 집행부, 국민연합 등 각 단체 지도자들이 신속하게 항의단을 구성해 서울시경을 항의방문한 결과, 서노협 소속 기소유예 중인 2명 등 10여 명만 남고 모두 석방됐다.

대회위원회는 명동성당에서 전국노동자대회 폭력침탈을 규탄하고, 전면적인 노동조합탄압 및 장기파업 사업장에 대한 탄압분쇄를 요구하며, 노동조합 진영의 공동대응과 민중연대의 강화를 위한 철야농성 투쟁을 13일 정오까지 3일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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