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기포를 아시나요? - 동학농민군,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올리다 | |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은 투쟁이 확대하지 못하자 동학 조직의 세력이 가장 컸던 무장(호남지방)의 손화중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전국적인 농민혁명을 일으키자고 뜻을 모으고, 주변 지역의 농민군을 무장 당산마을로 집결시켰다. 3월 16일부터 당산마을에 주둔한 농민군은 탈취한 무기로 군사훈련을 하면서 주변 농민군을 조직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각지의 동학 지도자들에게 무장으로 집결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무기와 군량을 마련한 농민군은 포고문을 발표하고 제폭구민 보국안민 깃발을 높이 쳐들고 고부 백산으로 향했다. 1894년 음력 3월 20일 4,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무장에서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무장 창의문을 발표했는데, 이를 고창 무장기포라 한다. (기포는 동학 조직인 ‘포’에서 들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발생한 농민봉기는 대부분 각 고을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고을 단위의 농민봉기는 수탈과 탐학의 당사자인 수령을 축출하고 아전(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 관리)들을 처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봉기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고통이 지방관의 잘못이지 정부의 제도나 국왕의 실정 탓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장기포는 고을 단위가 아닌 중앙정부를 향한 전국적인 농민봉기 선언이었다. 무장에서 봉기하여 백산에 이르기까지 농민군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무장기포의 목적은 수령과 아전의 타도가 아니라 중앙정부의 권세가와 탐관오리의 숙청이었기에 향리들에게도 무장봉기에 합세할 것을 요구했다. 비록 무장 포고문의 내용이 국왕을 부정하지 못했어도 이는 조선왕조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무장기포가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조건은 동학 교단의 교조신원운동 경험이었다. 고을 단위의 피지배층 조직이었던 동학은 1892년부터 시작된 세 차례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마련한 농민동원의 연락망과 조직망을 농민군에게 제공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억과 전승은 봉건체제의 억압과 질곡의 한계를 극복해갔던 농민들의 투쟁과 의식의 변화를 세밀히 살피는 과정에서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참고문헌] 신영우, 「1894년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의 진압과 민보군」, 『동학학회』, 2012 배항섭, 「동학농민군의 <무장기포>와 <무장포고문>에 대한 이해의 변천과정 고찰」, 『호서사학회』, 2016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동학학회』, 2012 박준성, 「1894년 농민전쟁의 ‘무장창의문’과 ‘백산격문’」, 『내일을 여는 역사』, 2003 박준성, 「1894년 농민전쟁 기념조형물을 찾아서(1)」,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고창군청 고창동학농민혁명(www.gochang.go.kr/donghak/index.gocha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