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주오. /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자본가 단체들은 1991년 11월 22일 ‘기업체 10% 더 하기 운동 추진요령’(5대 더 하기 운동)을 발표했다. “경제분위기 재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경제위기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그 중에 자발적으로 일 더 하기 운동이 있었다. 10분 전 출근, 20분 후 퇴근. 30분 일 더하기 운동은 급기야 한 여성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30분 일 더 하기 운동과 권미경 열사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필자가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부모님과 놀아본 기억이 없다. 동생들이나 동네 아이들과 지내는 게 다였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은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일 일하느라 아이를 돌 볼 수 없었고 그게 당연시 되던 때였다. 요즘은 일도 열심히 하고 집에서는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노동자에게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서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지만 물에 젖은 솜처럼 처진 몸도 회복하고 훌륭한 부모가 되기란 쉽지 않다.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일을 더 시키려는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다. 1991년 ‘30분 일 더 하기 운동’ 1991년에는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한 자본의 공세가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다. ‘5대 더 하기 운동’이 그것이다. 1991년 11월 22일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자본가 단체들은 ‘기업체 10% 더 하기 운동 추진요령’을 발표했다. 내세운 명분은 과소비 척결, 경제 살리기였다. 더 하기 운동이란 “10% 절약 더 하기, 10% 저축 더 하기, 10% 생산성 더 제고하기, 10% 수출 더 증대하기, 자발적으로 일 더 하기”였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자본가 단체과 관변단체들은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MBC 뉴스데스크와 KBS 9시 뉴스는 신발업계 노조 구사운동, 초등학생들의 절약운동, 일요일에도 일하는 노동자 보도 등을 통해 자본을 적극 거들었다. 서울시는 “공무원이 앞장서서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을 벌임으로써 이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자”며 퇴근시간을 30분 늦췄다. 잔업과 특근이 일상인 제조업 노동자들에게는 일 더 하기가 의미를 갖지 못하니 생산성 향상을 위한 통제강화를 시도했다. 화장실에 몇 번 가는지, 작업장을 이탈한 시간이 얼마인지를 관리자가 일일이 기록하는 사업장도 있었고 ‘바코드 제도’를 도입해 통제하려다 노조의 반대로 실시가 보류된 사업장도 있었다.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은 19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 이전으로 노동조건을 되돌리려는 노동통제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회시간이 당연히 임금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된 노동자들이 일 더 하라면 더 하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은 주로 노조가 없거나 어용노조인 곳에 힘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 한 여성노동자의 죽음이 있었다. “지옥이 따로 있느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냐” 1991년 12월 6일 오후 4시 10분경 신발 제조업체인 ㈜대봉 본사에 근무 중인 생산직 노동자 권미경이 이 회사 3층 옥상 30m 높이에서 지하식당 앞 공터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되었다. 권미경 열사의 사체 왼쪽 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투신 전 권미경은 동료가 관리자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것을 보고 “지옥이 따로 있느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냐”고 울먹였다고 한다. 권미경의 죽음은 당시 전개되던 일 더하기 운동과 경제위기 노동자 책임설이 만든 것이었다. 세계 자본의 산업구조조정 흐름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한국 자본은 1991년 하반기부터 위기를 맞게 된다. 신발산업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의 신발 사업장 기업주들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지만 그 이윤을 기술이나 신제품 개발 등에 투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며 ‘애사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삼화의 ‘10분 일 더 하기 운동’, ㈜진양의 ‘불황극복 50일 작전’, 대신교역㈜의 ‘3무운동(무불량, 무이탈, 무미달)’, ㈜세신의 ‘무임금 1시간 일 더 하기 운동’ 등 노동 착취가 극에 달했다. ㈜대봉은 아디다스 등의 신발을 제조하여 수출과 내수를 겸하고 있는 전체 사원 3,500명 규모의 대규모 수출 업체였다. 이 회사는 작업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을 모방한 관리방식을 취했다. 1991년 11월 1일부터 노동조합의 협조아래 전체 사원이 ‘원가절감, 결근방지’라는 깃을 달고 작업하였고, 목표량 달성을 위하여 노동자들의 작업강도를 강화했다. 권미경의 현장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12월 들어서 목표량 달성을 촉구하는 관리자들의 독촉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이 초시계를 들고 다니면서 목표량 달성을 요구하였다.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훈시와 교육 등으로 통근버스를 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제 연장근로도 다반사로 진행되었다.(『전노협백서 4권』 중) 권미경이 말한 지옥은 자본의 착취가 판치는 노동현장이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멈출 수 없는 투쟁 노동자는 생활임금 쟁취, 노동시간 단축을 내걸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투쟁해왔다. 해방직후 전평이 하루 8시간 노동제 쟁취를 내걸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8시간 노동제를 위한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전노협의 주 40시간 쟁취 투쟁, 민주노총의 주5일제 쟁취투쟁으로 노동자들은 결국 2000년대 법 개정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실제 현장에서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사 대립은 끊이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분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자본이 노동시간을 가지고 꼼수를 내기도 한다.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이상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의 대립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