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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930년 8월 평양고무공장 파업노동자들이 보여준 '세 가지'_안태정(111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08-09 조회 2133
 

19308월 평양고무공장 파업노동자들이 내건 요구는 20가지였다. 1) 임금인하 절대 반대 2) 무리해고 반대, 해고 시에는 해고수당을 지급할 것 3) 대우개선 4) 일요일 기타 휴업일에 임금을 지불할 것 5) 야간작업 폐지(부득이한 경우에는 임금 1할 증가) 6) 공장제도 불충분에 의한 직공의 시간 착취 반대 7) 제화재료 배급 실시 및 배급의 공평 8) 작업으로 인한 상해보상금·치료비 지급 9) 기계수선 및 수선비 직공부담 철폐 10) 부정검사 축출 11) 징벌, 정업 또는 벌금제도 철폐 12) 불량품 배상제도 철폐 13) 보증금제도 철폐 14) 도구 무상대부 15) 청소 기타 무상노동 철폐 16) 연말 상여금 지불 17) 산전산후 3주일간 휴양 및 생활비 지급 18) 수유(授乳) 시간의 자유 19) 파업 중 직공모집 반대 20) 단체권·단체계약권 확립.

 

 

19308월 평양고무공장 파업노동자들이 보여준 세 가지

 

안 태정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당시 평양고무공장 파업노동자들이 보여준 세 가지를 미리 간략하게 말해보자. 그것은 첫째, 개량주의 지도부 축출과 혁명주의적 지도부 내세움, 둘째, ‘공장 습격 점거투쟁과 국가권력기구와 대립 충돌투쟁’, 셋째,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로서 협동조합적 생산양식창출 등이었다.

 

1930년 평양 시내 10개의 고무공장에서 2,100여 명(1929년 현재 여자 1,105, 남자 700, 기계공 300)의 노동자들이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고무공장 자본가들은 호경기시절에는 연 70~80%내지 100%의 이익배당금을 받았으며, ‘불경기에도 연 20% 이상의 배당금을 받았다. 그러나 노동자들 중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도급제의 제화공들은 다음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아침부터 밤늦도록까지 노동할 때에라야 1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고 1년 평균하면 하루에 30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억 만 켤레의 고무신을 만들면서도 올망졸망 크는 제 집 아이들에게 고무신 한 켤레 신기지 못해 동삼에도 발을 벗겨두었고 단칸방 셋집에 두 식구 세 식구가 끼여 살아야 했으며 누덕 포대기 하나로 세 아이를 길러야 하던 그렇게 처참했던 생활” “고무공장 큰아기들은 발목이 시게 번 돈으로 감독놈에게 고기근이나, 분탕근을 사다주어야 했고 빨래까지 해주어야 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만일 감독놈의 눈에 거슬리게 되는 날이면 의례히 공장을 쫓겨나야 했고 쫓겨나지 않는다 해도 일감(도급)을 얻어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9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의 고유한 모순이 한계점 달하여 경제공황이 발생했다. 자본계급은 경제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계급 등을 더욱 착취하고 억압하는 파쇼와 전쟁체제를 수립하려고 했다. 조선의 고무공업 자본계급도 1930523일 서울에서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열고 불경기로 인한 이윤하락을 막기 위하여 임금 10% 인하를 결의하여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려고 했다.

평양고무공업 자본계급의 조직인 평양고무동업조합에서는 81일에 역시 불경기를 빙자하여 임금을 평균 17% 인하할 것을 결의했다. 10%가 아니고 17%일까? 그것은 주로 조선인들로 이뤄진 평양고무공업 자본계급이 서울 등의 일본인 고무공업 자본계급과의 경쟁에서의 열세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강화로 만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임금인하의 통고를 받은 평양고무직공조합’(1926215일 결성)은 같은 날 긴급집행위원회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여, 4일에 고무동업조합에게 임금인하의 이유를 질문하는 동시에 임금인하를 취소하도록 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고무동업조합은 6일 고무직공조합의 임금인하 취소요구를 거절하고, 14일까지 자기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신직공을 모집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분개한 10개의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 1,800여 명은 6일 밤부터 7일 정오에 걸쳐서 파업을 단행했다. 파업본부를 평양노동연맹사무소에, 연락본부를 시내 세 곳에 뒀다. 7일 오후 1시에 백선행(白善行, 1848~1933, 여성 사회사업가) 기념관에서 각 고무공장 노동자 대표자대회를 열어 자기들의 파업을 대외적으로 밝혔다. 10일 오전 10시에 고무직공조합은 같은 기념관에서 전체 파업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는 각 산업 부문의 노동조합 단체에 파업의 진상을 알리고 동시에 전국 노동자들의 응원을 호소했다. 임금인하를 반대하는 항의문을 채택하여 조선고무동업조합회에 발송했다. 파업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20개 요구조건을 결의하고 그것을 관철할 때까지 일치단결하여 투쟁할 것을 맹세했다.

 

1. 임금인하 절대 반대.

2. 무리해고 반대, 해고 시에는 해고수당을 지급할 것.

3. 대우개선.

4. 일요일 기타 휴업일에 임금을 지불할 것.

5. 야간작업 폐지(부득이한 경우에는 임금 1할 증가).

6. 공장제도 불충분에 의한 직공의 시간 착취 반대.

7. 제화재료 배급 실시 및 배급의 공평.

8. 작업으로 인한 상해보상금 · 치료비 지급.

9. 기계수선 및 수선비 직공부담 철폐.

10. 부정검사 축출.

11. 징벌, 정업 또는 벌금제도 철폐.

12. 불량품 배상제도 철폐.

13. 보증금제도 철폐.

14. 도구 무상대부.

15. 청소 기타 무상노동 철폐.

16. 연말 상여금 지불.

17. 산전산후 3주일간 휴양 및 생활비 지급.

18. 수유(授乳) 시간의 자유.

19. 파업 중 직공모집 반대.

20. 단체권 · 단체계약권 확립.

 

위의 20가지 요구조건에는 8월 이전까지, 당시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처한 상태와, 나아가 파업투쟁을 통하여 그러한 상태를 없애고 보다 더 좋은 상태를 만들려는 목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평양고무공장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구조 내부에서의 일정한 유사(類似)부르주아민주주의적 개선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1, 삶이 보이는 창, 2008, 144~145.

 

자본가들의 월급인상 감언 등의 회유를 물리치고, 11일 월수 50~70원을 받는 고임금월급노동자이며 신직공즉 파업깨기꾼 모집을 가능케 하는 핵심기술노동자인 기계공 300여 명도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 참가자는 모두 2,100여 명이 됐다.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평양시내 모든 산업 노동자들의 총파업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고무노동자들의 파업을 깨기 위하여 고무공업 자본가들과 경찰은 한층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 ‘파업노동자들 해고와 신직공 모집위협 계속, 자본주의 착취제도 비판연설대회금지, 선진적인 파업노동자들 검속 등이었다. 그럼에도 고무노동자들의 파업 대오는 굳건했고, 자본계급의 파업깨기를 파탄 냈다.

이제 고무공업 자본가들과 경찰은 새로운 파업깨기 작전을 구사했다. 즉 파업단을 분열시켜서 깨기 위한 교섭전술이었다. 16일에 우선, 고무자본가들은 파업단에게 교섭을 제의했으나 파업단은 20개 요구조건을 고수했다. 다음에는, 평양자본계급 단체인 평양상공협회의 대표와, 경찰에 의하여 나서게 된 신간회(1927.2.15~1931.5.15) 평양지회장 조만식이 조정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임금인하 10%(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가 결정한 것)와 앞에서 본 20개 요구조건 중에서 비본질적인 요구들인 ‘3,4,6,7,8,9,14,15’항만을 자본가들이 승인하는 철저히 자본가들의 입장에 선 것이었다. 신간회는 왜? 당시 신간회 본부는 부르주아적인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장악했고, 평양의 신간회지회장 조만식도 민족개량주의자였고 그 간부들 중에는 고무공장 자본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간회의 조정안은 고무노동자 파업단 지도부를 동요시켰다. 파업노동자들은 17일에 대회를 열어 전권위원 12명을 선정하여 신간회의 조정안을 재조정하도록 일임했다. 그런데 19일 자본계급의 국가권력 기구인 경찰은 신간회 같은 사회단체는 조정권이 없다면서 스스로가 조정자로 나와서 신간회의 것보다 더 열악한, 고무자본가들에게 더 흡족한 조정안을 내놓았다.(신간회의 조정안은 경찰 조정안의 도입구적 역할을 했다.) 전권위원 12명은 다수결로 경찰의 조인 요구에 굴복했다.

 

20일 열린 파업노동자들의 대회는 이제까지의 자본계급에 종속적인 개량주의 지도부를 축출하고 자본계급으로부터 독립적인 혁명주의적 지도부를 내세우는 대회가 됐다. 즉 전권위원 12명을 자본가들의 앞잡이, 투항주의자 · 개량주의자로 규정하여 만장일치의 불신임안을 채택하여 파업단에서 축출했고, 경찰의 조정안도 일축했다. 고무공업 자본가들과 경찰의 교섭전술을 통한 파업깨기 작전을 파업단은 보기 좋게 막아냈다. 그리고 새로이 선출된 노동자 출신의 고무직공조합의 집행위원에게 파업투쟁의 지도를 맡겼다. 새로운 투쟁지도부는 파업본부를 개량주의적인 평양노동연맹 본부에서 비공개적인 곳으로 옮겨서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자본가들과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기로 했다. 그것은 파업노동자들이 일종의 노동자 자치권력 기구가 될 수 있는 씨앗의 하나로서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자본계급의 요새인, ‘공장을 습격 점거투쟁을 벌이거나 국가권력기구와 직접적으로 대립 충돌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같은 날 파업노동자들의 대회에서 국가노동자로서 파업깨기꾼의 하나인 경찰들은 강덕삼 파업노동자를 체포해 갔다. 그는 개량주의 지도부를 축출하고 혁명주의적 지도부를 내세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선진적 노동자였다. 강덕삼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파업노동자와 시민 수천 명이 시위했다. 여자노동자 150여 명이 경찰서 안으로 쇄도하여 강덕삼 등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파업노동자들은 자본계급의 눈을 피하여 모란봉이나 양각도에서 비밀리에 투쟁대책을 강구해서, ‘비합법적인 투쟁형태를 펼쳤다. 그러나 고무공장 파업노동자들 내외부의 파업깨기꾼들 때문에 파업투쟁이 위기에 빠지게 됐다. , 23일부터 고무공업 자본가들은 경찰의 비호 하에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외부의 파업깨기꾼인 신직공과 내부의 파업깨기꾼인 몇몇 기계공들과 후진적 노동자들을 꾀어서 조업을 개시했다.

 

이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파업노동자들은 23일부터 본격적으로 공장습격 점거투쟁과 경찰들과 대립 충돌투쟁을 벌였다. 오후에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재개 반대시위를 벌인 뒤, 200여 명의 파업노동자들은 작업을 재개한 고무공장들을 습격 점거하여 파업깨기꾼들을 몰아내 조업을 불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40여 명의 또 다른 파업깨기꾼인 무장경찰들과 충돌했다. 이와 같은 공장습격 점거투쟁과 경찰들과의 대립 충돌투쟁이 23일부터 29일까지 16회나 계속됐고 여기에 연인원 5,000여 명이 참가했다. 26일까지 경찰들에 검거된 노동자들만도 63명이나 됐다. 이때 평양노동연맹 집행위원 7명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붉은 별의 표식을 한 완장을 달고 자본가들의 고무공장을 지켰다. 이와 같이 파업노동자들의 공장습격 점거투쟁 등은 경찰들의 무장진압, 개량주의적 노사협조주의적 지도자들의 방해, 선진적 노동자들의 계속된 검거에 의해 점차 약화됐다. 그리고 파업노동자들 내외부에서 파업깨기꾼이 늘어나 파업단의 조직적 투쟁은 어려워졌다. 마침내 94일 파업단은 경제적 강제로서의 자유취업을 선언했다.

 

193086일부터 94일까지 30일 간의 평양 고무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20개의 요구조건, 즉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훈은 그 실패 이유를 따져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첫째로, 고무직공조합이 파업기금, 식량, 계급의식 강화 등을 온전히 준비하지 않는 상태 속에서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나서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파업이 장기화되자 생계에 압박을 받은, 후진적 노동자들이 파업깨기꾼이 되게 했다.

둘째로, 취업노동자들 중에서 고무공장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기계공에 대한 조직 활동,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조직 활동, 나아가 국가노동자의 하나인 하위직 말단 경찰들에 대한 포섭 활동 등을 경시했다. 이것은 기계공과 신직공과 경찰들이 파업깨기꾼이 되게 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위의 두 가지 실패 이유도 항시적인 혁명적 지도력의 결여 때문이었다. 나아가 이것은 노사협조주의적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파업단이 분열하도록 했다. 또 평양노동연맹 산하에 34개의 다른 산업 부문의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단결투쟁을 의식하지 않는 종파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게 하여 평양시 총파업투쟁으로의 발전을 불가능하게 했다. 다시 말해서 혁명적 지도력을 사전에 미리 갖추고 있어야만 계급적인 단결투쟁으로써 파업투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8월 평양 고무노동자들의 파업이 패배한 뒤, 해고된 파업노동자 출신’ 200여 명은 자본계급이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체로서 협동조합적 생산양식을 창출했다. , 그들은 914공제고무공업조합공장 설치를 발기하고, 1128일 조업을 개시하여 1934년 무렵까지 지탱했다. 여기에 참여한 한 생산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조선의 모든 기업이 자본주의 독점사업으로서 그들의 이익을 본위로 한 것이요 직접 생산자인 무산노동자는 오직 아사를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점에서 자본주의를 본위로 한 오늘날의 제도 앞에서 우선 몇 백 명이라도 구해내어 노동자 자신을 본위로 한 공장을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우리는 전조선 소비조합과 모든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생산기관으로서 진력코자 한다.”(동아일보, 1930.10.8.)

 

그러나 이러한 협동조합적 생산양식이 지속되게 하려면 기존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등을 파괴하여 협동조합적 생산양식으로 대체하는 동시에 그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본계급의 국가권력을 분쇄하여 생산자들의 공동체 권력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송지영, 1930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김경일 편,북한 학계의 1920,30년대 노농운동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9; 김인걸·강현욱, 일제하 조선노동운동사, 일송정, 1989;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운동사,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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