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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총련 공동투쟁(1993년 7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3-07-07 조회 306

1993년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공동투쟁

 

현총련 공동투쟁의 배경과 목표

공동투쟁 이전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은 그간 형식적인 조직체계로 간부 중심의 사업을 해오며 연대기구로서 기능을 다 하지 못했다. 특히 1992년 현대중공업노조 이원건 위원장의 직권조인으로 현총련에 대한 조합원의 불신은 극도로 깊어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현총련은 지도부뿐만 아니라 조합원들 속에서 실질적인 연대기구로서의 위상 정립과 신뢰 회복을 1993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단위노조 지도부들은 내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현총련 중심의 연대사업에 관심과 의지가 높았고, 해마다 개별기업노조 임금인상 투쟁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했기 때문에 공동투쟁에 대한 요구가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강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현대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대한 조합원의 분노와 국민당이 현대노동자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분노도 증폭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그룹은 현총련 산하 노조들의 공동투쟁 전선을 깨기 위해 임금교섭 지연 전술을 구사했으나 현총련의 공동대응으로 무산되자 공동전선을 차단하기 위해 현대정공노조의 직권조인 사건을 벌였다. 현총련 공동임금인상 투쟁의 도화선이 된 610일 현대정공노조 조합원 총회를 기점으로 단위노조별로 쟁의행위가 가결되자 현총련 김동섭 위원장에 대해 집중 공략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대정공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극햐 적극적인 투쟁을 불러일으켰고, 현총련의 즉각적인 대응과 지원 연대투쟁을 가져와 실질적으로 현대정공노조의 승리와 현총련 공동 임금인상 투쟁의 촉발제가 되었다.

현총련은 3월 중앙운영위원회와 411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1993년 임금인상 투쟁의 목표로 현총련의 신뢰 회복 및 위상 재정립을 통한 단결력 강화 대중투쟁 동력을 통한 고용문제 및 해고자 복직문제 해결 적극적인 제도개선 투쟁 및 정치정책적 요구 투쟁 전개 간부 중심 상층연대가 아니라 공동 결의의 수준을 높여 조합원들 참여 속에서 주인으로 설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이러한 목표 아래 각 단위노조가 처한 조건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내용 있는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신뢰와 실천을 바탕으로 준비기부터 공동사업을 철저히 시행하고, 쟁의발생 신고 시기를 통일해 교섭 시기를 집중시키며, 조합원의 자주적 참여를 바탕으로 투쟁을 전개하되 전국적인 연대투쟁에 적극 결합한다는 기조로 사업을 준비해 나갔다.

 

현대정공노조 위원장 직권조인과 파업

6414차 임금교섭에서 현대정공 사측은 27,600(4.7%) 인상안을 제시하며 더는 내줄 수 없다는 태도를 밝혀 15분 만에 협상이 결렬됐다. 협상 결렬 직후 김동섭 위원장이 공개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현총련 사무실로 간다며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 65일 오전 위원장이 아닌 사람이 노조로 전화를 해 여직원을 바꾸라 했고 여직원이 받자 김동섭 위원장이 서랍 안에 노트와 서류가 있으니 사무장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노트 안에서 발견된 합의문은 지문 날인이 돼 있으나 식별할 수 없고 어떤 상황에서 작성된 것인지도 불투명한 것이었다. 전날 위원장이 노트를 가지고 나간 이후로 서랍은 잠겨 있었고, 그 후에다시 들어온 적은 없는데 65일 오전 1040분경 서랍에 열쇠가 꽂혀있었고 그 안에 노트가 있었다. 또 위원장은 평소 직권조인은 절대 없다고 강조했고 5월 말 현대건설의 직권타결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었다.

현대정공은 직권조인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단체협약에 협약이 체결되면 쌍방의 대표자를 포함한 교섭위원 연명으로 서명한다”, 노동조합 규약에 단체협약의 교섭권은 위원장에게 있고 대의원대회의 의결을 거쳐 교섭위원 전원이 연대서명한다. , 정기 단체협약 및 임금협약 최종결정은 반드시 조합원 투표 결과에 따라 체결하며 위원장 및 교섭위원 전원이 대표로 연대서명한다등의 조항을 마련해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사측이 4일 오후 330분경에 위원장을 납치·감금한 상태에서 강제로 합의서에 지장을 찍게 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동섭 위원장이 직권조인하게 된 경위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행방이 확인되지 않으며, 위원장이 조합원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전화로만 두 차례 통화했고, 서명 필체가 의심스럽고, 날인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점 등에서 몹시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직권조인 사태에 대해 현대정공노조는 조합원 명의로 66현대정공 유기철 사장은 납치와 강제에 의한 직권조인 즉각 철회하라 현대정공 4천 조합원은 김동섭 위원장이 자의에 의해서 직권조인을 했다고 볼수 없으며 납치 감금된 김동섭 위원장의 신변을 즉각 공개하라 현대정공 유기철 사장은 노동조합 파괴 책동 음모를 즉각 중단하고 우리의 정당한 임금인상 요구를 수락하라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아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회사에 있음을 명심하라고 촉구하고 진상규명 촉구 및 직권조인 무효화, 민주노조 사수투쟁에 나섰다.

6511시경 임금합의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은 작업을 전면 중단, 12시에 회사 본관 앞에서 규탄집회를 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전면파업을 결의했다. 이후 상임집행위원회, 대의원, 소위원 등 300여 명이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66일에도 조합원 1,000여 명이 출근 규탄 집회를 했으며, 7일은 휴무일이었음에도 출근해 규탄 집회를 열었다.

68일과 9일에는 조합원 긴급 총회에서 직권조인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측이 새벽 6시에 구사대 500여 명을 정·후문에 집결시키고 총회 장소에 컨테이너를 야적해 출입을 차단하는 한편 조합원 200여 명을 탈의장에 몰아 감금하는 등 총회를 방해했다. 사측의 방해와 폭력으로 총회가 지연되고, 노조 선전부장 등 5명이 전치 2주 이상의 폭행을 당하는 등 조합원 다수가 다쳤다. 이러한 탄압을 뚫고 조합원 3,000여 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이용진 의장을 비롯한 상임집행간부 7명과 부서별 비상대책위원회 의장 9명을 구성하고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사측은 이용진 위원장 직무대행(비상대책위원회 의장), 박준식 기획국장, 김주열 교육부장 등 노조간부 3명을 고소·고발했다. 이날 노조에서는 임금합의서 강제날인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고, <한겨레신문> 광고, 노동부에 진상촉구 방문, 국회에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며 9일에는 노조 간부를 폭행한 혐의로 회사 관리자 3명을 울산지방법원에 고발했다. 610일 총회에서는 조합원 3,772명 중 3,028(80.2%)이 투표해, 2,906(95.97%)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현대정공 직권조인 사태가 발생하자 현총련은 6일 위원장단 긴급회의를 열고 직권조인 불인정(체결권 자체) 강제조인 과정 진상규명 현총련 차원의 총력 대응 및 공권력 투입 시 즉각 대응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를 주축으로 임금인상 투쟁 일정과 결합해 전선을 확대 공권력 개입의 명분 축소를 위한 투쟁 조직 등을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공동대응을 결의했다.

현총련은 67일부터 현총련 사무실에서 매일 저녁 철야농성을 하면서 긴급회의를 통해 대응책을 모색하는 한편 울산지역 운영위원들은 기자회견 및 노동부에 진상규명 촉구 방문 등을 이어갔다.

68일에는 사업장별로 중식시간 보고 및 규탄 집회를 했고, 자체 집회를 마친 현대자동차노조 5,000여 명은 현대정공 정문 앞에서 항의 규탄 집회를 전개했으며, 69일 규탄집회에는 현대중공업 등 거의 모든 현대계열사 노조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현총련 산하 사업장들은 8일에서 10일 사이 직권조인 무효화서명을 받아 조합원 1인당 200원씩 분담해서 신문광고를 실었다.

69일에는 현총련 경인지역 위원장단과 전국노조대표자회의 대표단이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 노동국장을 만나 현대정공 문제를 논의한 결과 조만간 노동부장관이 울산에 내려가 진상을 조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잠정 약속을 받았다. 아울러 현총련 경인지역 위원장단은 이인제 노동부장관,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 현총련 의장, 현대정공 위원장, 현대정공 유기철 사장으로 구성한 노사정 간담회를 긴급 요구하며 장소는 울산으로 해서 빨리 응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같은 날 영남지역노조대표자회의는 현대정공에 대해 논의하고 성명서와 유인물을 제작·배포했으며 격려 전화, 대자보, 편지 등을 현대정공노조에 보내 격려·지원했다. 공권력이 투입될 시 영남지역 차원의 연대투쟁을 전개하고, 각 지역에서 즉각적으로 가능한 투쟁을 조직하며, 지역집회, 단위노조집회, 중식집회 등을 통하여 공권력 투입에 대한 규탄집회를 동시에 조직할 것도 결의했다.

612일에는 현총련 주최로 현대정공 사태 규탄, 현대 재벌의 비리 폭로, 1993년 공동 임금인상 투쟁 승리 결의대규모 집회를 열어 영남지역 노조들도 적극 결합했다. 현총련은 625일경까지 부분 파업을 전술 기조로 잡았다. 자동차를 비롯한 계열사 노조가 일제히 쟁의행위에 돌입하는 시기까지 정부가 불법으로 매도되고 있던 현대정공의 투쟁을 다각적인 활동으로 지원했다. 이로써 현대정공 직권조인을 계기로 시작된 현총련 사업장들의 공동대응이 서서히 불붙기 시작했다.

 

630일 결의대회에서 성실교섭 촉구

630일 현총련은 1987년 이후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갖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의 투쟁 열기는 매우 높았다.

현대중공업이 쟁의행위가 가능한 시점인 6월 말까지 현총련 전 노조가 부분파업으로 현대정공 투쟁을 사수해왔다. 결의대회에서 현총련은 그다음에 총파업으로 돌입하기에 부담을 안고 있던 현대중공업이 쟁의행위에 돌입할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과 국민적 여론 형성을 위해 76일까지를 성실협상 촉구기간으로 잡고 그때까지 현대그룹이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면 단호한 결단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공표했다.

이날 현총련 지도부가 공표한 입장은 당시 조합원의 투쟁 분위기로 보아 다소 부담스러운 문제였으나 별 무리 없이 정상조업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상조업 기간에 현대그룹측에 대해 공동교섭 요구 이외에 다른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면서 이후 총자본에게 반격을 준비할 시간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총련이 현대그룹에 제기한 성실교섭 전술에 따라 현대그룹은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한 전술로써 735개사 위원장단만 만나겠다고 통보해왔다. 현총련은 그룹측의 이러한 제안이 공동투쟁을 파괴하기 위한 전술이라는 판단과 함께 면담에서 내부 분열을 초래할 안을 내놓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만남이 무산되면 책임을 현총련으로 돌리리라는 것까지 판단했다. 결국 현대그룹이 면담에 5개사 이외의 위원장까지 방문한다는 점을 핑계로 무산시켰다.

 

7711개사 연대 총파업과 현총련 압수수색

정권과 자본, 언론은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77일 총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다각적인 도발을 폈다. 그룹은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고 이에 편승한 노동부장관도 국민경제를 해치는 투쟁에는 강경 대응하겠다는 선전포고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현총련 내부에서는 총파업으로 맞설 것이냐, 합법전술 기조를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 싸움을 할 것이냐는 의견으로 분분하다가 7일 하루 총파업을 결정했다. 현총련은 현대그룹이 교섭을 거부하고 사무실 압수수색을 단행하자 77일 현대중공업의 전면파업을 비롯해 현대자동차, 한국프랜지,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정공, 현대강관, 현총련 수원용인협의회가 부분 파업에 들어갔다. 총파업은 울산지역 8개사, 창원 현대정공 등 6만여 조합원이 참여하면서 조직적으로 진행했다.

1993년 임금인상 투쟁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던 현총련 투쟁에 대해 전노협과 전노대, 민주노조 진영의 다각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76일 전노대 주최로 각계각층 노동 현안 설명회를 개최했으며, 77일부터 10일까지는 현총련 투쟁 지원 및 제3자개입금지 철폐를 위한 지역 확대간부 회의, 철야농성을 벌였고, 서울, 경기, 인천, 성남, 전북, 경주, 포항 등에서 적극적으로 선전전을 펼쳤다. 712일에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전국노동단체연합, 수도권연석회의,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민중정치연합 등 노동단체들이 대시민 홍보전을 벌였다.

이러한 전국적인 지원 투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하루 총파업 이후 현총련은 사업장별 투쟁으로 전환했다. 이후 715, 720일까지 이번 쟁의를 대화와 자율로써 해결한다는 시한을 정하고 평화적 성실교섭 촉구를 위한 정상조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권은 이 틈을 타 탄압의 고삐를 조여왔다. 이미 사문화되다시피 한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적용해 전국적 연대투쟁을 주도했던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을 비롯한 몇몇을 구속·수배했고, 조합의 자주성을 봉쇄하는 긴급조정권을 발동함으로써 자본 위주의 임금인상 투쟁 종결을 획책했다. 623일 이인제 장관은 현총련과이 면담했을 때 해고자 복직 노력, 3자개입설 부정, 4.7% 가이드라인 부정 등 자율교섭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현총련 투쟁이 장기화되자 정부 입장은 대통령의 강경 발언과 현총련 파업 이후 연대파업 위험 경고 등 공권력 개입에 대한 명분을 확보하는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이에 편승해 현대그룹은 공동투쟁을 불법으로 매도하고 4.7% 가이드라인, 해고자 복직문제 등에 대한 양보 없이 무성의한 교섭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총공세에 현총련과 민주노조 진영의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대응이 필요했으나 실무자와 간부에 대한 검거령이 떨어진 데 대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공동투쟁전선을 단위사업장별 교섭과 투쟁으로 해결한다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정권과 자본에 현대자동차에 대한 긴급조정권 발동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결과를 초래했다.

 

3자개입금지 위반 적용과 대응 투쟁

623일 현총련과 이인제 노동부 장관은 면담에서 3자개입은 문민시대에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합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현총련의 공동 임금인상 투쟁을 재야세력과 연계된 불순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72일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발부를 시작으로 급속하게 강경 자세로 변했다. 75일에는 이인제 장관의 3자개입 엄단성명 발표 후 문성현 전노협 부위원장 등 추가로 6인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1993년 현총련 공동투쟁 관련 구속·수배자 총 17명 중 15명은 1993년에 구속됐으며,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은 19957월에 구속되어 1년 만에 만기출소했고, 이상현 전노협 쟁의국장은 19953월 구속됐다가 곧 풀려났다.)

이에 대해 73일 전노대는 대책회의를 열고 사전 구속영장 철회, 성실교섭 여건 마련등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8일에는 현대자동차와 현총련이 성명을 통해 현총련에 대한 불법 운운과 제3자개입, 압수수색 실시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며 강경 대응입장을 밝혔다. 전노대는 714150여 개 사업장 300여 명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성실교섭 촉구와 제3자개입 적용규탄 전국단위노조 비상결의대회를 열었다.

문민정부를 자임하는 정권의 전근대적인 탄압에 대해 국제노조단체와 다른 나라 노조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75일과 6일 국제금속노련, 국제항공노련 등은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 등의 수배조치에 대해 한국 정부에 공식 항의 서한을 발송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 노조로부터 제3자개입 항의 및 투쟁 지지 서한이 도착했다.

 

현대자동차 긴급조정권 발동

720일 정부는 이인제 노동부장관의 발표를 통해 현대자동차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고, 타 계열사도 긴급 상황 때는 특단 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긴급조정권은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제정된 세계적인 악법으로 정부에서도 그동안 이미 사문화됐다며 폐지를 검토해 왔고 ILO에서도 한국 정부에 철폐를 권고해온 바 있다. 그러나 정부는 현대자동차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해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전면 부정했다.

현대자동차에 대한 긴급조정권 발동 이후 현대자동차노조가 21일 새벽까지 막바지 협상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현총련 산하 현대중공업노조 등 산하 노조들은 긴급조정권 발동 등 정부의 강경책에 대해 연대파업도 불사할 것임을 밝혔다.

한편 720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각계 인사 81명은 기자회견을 열어 교섭 지연은 사측의 무성의한 태도 때문임에도 정부가 군사정권 시대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긴급조정권을 동원해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개혁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규정한다고 밝혔다. 전노대도 현대자동차노조를 탄압할 경우 현총련과 연대해 강력 투쟁할 것임을 밝혔고 전국연합 등의 재야단체들도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노조는 긴급조정권이 발동된 상황에서 20일부터 이어진 마라톤협상 끝에 21일 회사측 최종안에 지도부가 잠정 합의하고 23일 조합원 총회에서 50.07% 찬성으로 타결했다. 타결 내용은 기본급 4.7%(31,500) 인상, 제 수당 19,000(199341일부터 기본급 적용), 성과급은 통상급 100% 지급(12월 중), 고열수당 인상, 해고자 9명 복직 등이다.

78일 이후 현총련 투쟁 전술이 사업장별 투쟁으로 바뀌었고 15일부터 20일까지 정상조업을 선언했다. 한편 현총련의 공동투쟁이 전국 전선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과 달리 대우조선, 한라중공업 등의 대기업 사업장이 타결되면서 전국적인 연대 고리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현대자동차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할지라도 현총련 차원의 공동대응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성과를 거둔 셈이다.

 

7232차 총파업과 투쟁의 마무리

현대자동차 투쟁이 끝난 뒤에도 현총련의 일정에 따라 한국프랜지,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중전기, 현대강관, 현대종합목재, 현대미포조선, 경인지역의 케피코, 금강개발이 총파업을 강행했지만 사실상 사업장별로 타결을 끌어내는 파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현총련 산하 노조들은 전국의 임금인상 투쟁이 마무리돼 가는 시점에서 끝까지 투쟁을 전개하면서 협상을 이끌어 갔다. 각 노조의 마무리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강관은 722일 회사 최종안이 70% 남짓의 반대로 부결됐다가 24일 조합원 335(59.1%) 찬성으로 가결됐다. 한국프랜지는 720일부터 현총련의 일정에 맞춰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26일 교섭에서 나온 사측 최종안이 71.2%의 반대로 부결되었다가 28일 밤 조합원 54.1% 찬성으로 가결됐다.

케피코는 712일부터 14일까지 전면 총파업을 단행했고 협상에 진전이 없자 26일 다시 총파업을 벌여 27일에 조합원의 87.7%의 찬성으로 타결했다.

현대정공은 직권조인 반대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현총련의 즉각적인 공동 대응으로 사실상 무노동무임금 철폐, 현안문제 해결, 4.7% 임금인상을 회사가 수정 제시하겠다는 합의안 도출 등 요구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쟁취하였고, 직권조인을 사실상 무효화시켜 냈다. 이는 대법원 판례의 내용을 무색케 한 결과였고 자본과 문민정부의 모순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정공의 협상은 728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3,496명이 참석(93.12%), 찬성 2,700(77.69%), 반대 769(22.01%), 무효 2명으로 가결되었다.

창원 현대정공은 710일 전면파업 돌입 이후 투쟁 수위를 낮추다 719일 다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이와 동시에 노조 간부 5명에게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721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300여 명의 노동자를 연행, 문진우 쟁의부장과 한재관 홍보부장을 구속하자 조합원들은 정상 출근을 거부하고 회사 내 경찰 철수, 구속자 석방, 수배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26일부터 경찰병력이 철수하자 회사 내로 들어가 사측과 협상, 최종안을 가지고 26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했으나 부결됐다가 29일 타결돼 투쟁을 마무리했다.

현대미포조선은 727일 대의원 간담회 의결을 거쳐 조합원 총회에서 조합원 62.7% 반대로 타결안이 부결됐다. 노조는 회사와 두 차례 더 협상을 벌인 뒤 재협상안을 마련해 29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했지만 찬반 모두 과반이 되지 않아 집행부가 30일 직권조인했다.

현대중장비는 77일 총파업 결정 이후 전면파업을 계속하다 15일 이후 준법투쟁을 전개하던 중 교섭에 진전이 없자 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7301차 총회에서 부결(54%)되면서 하기휴가를 전후해 더욱 가열찬 투쟁을 전개했고 87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75.7%의 찬성으로 마무리했.

현대중전기는 파업투쟁을 전개하면서 공장별 집회, 전체 집회 등을 진행해 현총련 내에서도 완강한 투쟁을 벌여 왔다. 731일 사측 최종안이 64.5%의 반대로 부결됐으나 81251.3%의 찬성으로 타결됐다.

현대종합목재는 임금협상이 전혀 풀리지 않고 있던 가운데 27일 직장폐쇄 조치가 취해졌다. 지도부는 더 밀릴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직장폐쇄 조치 철회를 위한 규탄 집회와 출근투쟁을 계속 전개했다. 731일 사측 안이 50.1%로 가결됐지만 이의가 제기돼 재투표 끝에 다시 50.4%의 반대로 부결됐다. 사측이 재교섭에 불응하다가 813일 다시 교섭이 시작돼 818일 조합원 75%의 찬성으로 타결됐다.

현대중공업도 또다시 긴급조정권와 직장폐쇄 협박으로 계속 투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노조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붙어보자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투쟁 물품을 준비하는 등 조직점검을 해놓고 마라톤협상을 진행했다. 810일 노사가 합의서를 작성했고 19일 조합원 52.1%의 찬성으로 타결됐다.

 

현총련 공동투쟁의 성과와 한계

1993년 현총련 공동투쟁의 최대 성과는 첫째, 현총련의 존재와 연대투쟁의 위력을 조합원에게 확인시킨 것을 들 수 있다. 조합원들은 현총련의 실천과 현대정공 투쟁에 즉각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부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적인 연대사업의 실천으로 조합원을 현총련으로 규합해낼 수 있었으며 현총련 조직과 위상이 강화됐다. 둘째, 연대투쟁을 통해 현대그룹의 직권조인 공작을 무력화했으며 대법원 판례를 투쟁으로 무력화시켰다. 셋째, 무노동무임금 정책을 일정 부분 무력화하고 파업 기간 임금의 일정 부분을 쟁취했다. 그밖에 다양한 파업 전술로 새로운 투쟁의 모범사례를 남겼으며, 김영삼 정권의 본질과 개혁정책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현대그룹 노무관리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정부가 발표할 정도로 폭로했고, 전체 노동운동의 패배적인 분위기를 극복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반면 현총련 공동투쟁은 많은 성과에도 구속·수배문제와 창원 현대정공, 현대자동차써비스 공권력 투입에 긴급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현총련 집행체계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해 안정적 조건에서 사업을 배치하거나 추진하지 못했다. 마무리 시기 행동 통일과 일관성 부재 전국적 투쟁으로 확산 노력 부족 해고자복직·고용불안 해결 못함 경인-울산 조직간 조직력과 투쟁력 차이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함 투쟁 확대발전 실패로 조합원 불신 등이 공동투쟁의 한계로 지적됐고, 투쟁 이후 후유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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