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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2)
박창수 열사 부모님 이야기
김정자 황지익 말하고 정경원 받아 적다
해방이 되었다. 일본에 징용 가 살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짐을 쌌다. 그리고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 항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배에는 정원의 두 배의 인원이 탔다. 이들은 부산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박창수 열사 어머니도 9살까지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부산으로 왔다. 그래서 지금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당시 부산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대부분 적산가옥에 비비고 들어가 짐을 풀었다. 이후 미군정 시기 이곳은 ‘정비’되어 국제시장이 들어섰고 원조경제로 밀가루에 삶을 의지하게 되면서 밀가루 골목이 형성되었다. 20년 전부터 제과점 납품을 주로 하던 제빵기구상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제빵거리’가 바로 그곳이다.
키타큐우슈 시모노세키. 어릴 때 생각인데도 눈에 훤해. 나룻배 같은 배가 있었어. 시모노세키에서 모지 타고 오는 배가 있었어. 9살 때 해방돼 왔는데도 혓바닥이 잘 안 돌아가. 그래서 우리 아들이 가끔 흉을 본다. [외환은행 이래야 하는데] ‘외하은행’ 광화문을 ‘과문’ 그러거든. 그러니까 어머니 광화문, 살살 하나씩 하면 된다 근데 확 하면 안 된다. 내가 9살에 해방돼서 나왔어. 부산이 제2 고향이지. 부산항에 내리니까 쉽게 말해서 고향 찾아갈 사람 다 붙여놨어. 서울 갈 사람, 인천, 성남 갈 사람 붙여 놓은 거야. 그리고 방송을 해. 어디 갈 사람 어디 줄 서라고. 그러고 있으니까 구루마가 왔어. 지금은 리어카가 구루마지만 그때는 나무로 해서. 지금은 타이어지만. 옛날 구루마는 길었어. 그게 달구지가 아니고 사람이 끌었어. 그래 간 게 이제 부산 국제시장이 된 곳. 35번지 밀가루 골목!
어른들은 해방되었다고 너무나 기뻐했다. 아이들은 한국에 가면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배고프면 밖에 나가 뭐든 따 먹을 수 있는 곳.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어린 아이 눈에는 파란 눈, 노란 머리 미군이 귀신으로 보였고 일본 순사보다 더 무서웠다. 국제시장 밀가루 골목에 자리 잡은 가족은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장사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어머니도 2학년 여름을 끝으로 그렇게 좋아하던 공부도 못하고 엿장사, 담배 장사를 해야 했다.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근데 해방이 됐는지 뭐가 됐는지 어려서 뭘 알아? 밖에 나가니까 눈이 노랗고 머리도 색깔이 노랗고 이래가지고. ‘엔삐’ 헌병 모자 그걸 뒤집어쓰고 지프차를 타고 왔더라고. 우리는 일본말로 귀신이 유래 유래 그러잖아. 아이고 세상에 사람이 아니더라구. 어릴 적에. 눈이 노랗고 새파랗고 머리도. ‘아이고, 유래 나왔다고 귀신 나왔다고’ 사람 아닌 줄 알았어. 귀신인 줄 알았어. 유래 나왔다고 막~ 뛰어들어갔어. 우리 엄마가 같은 사람이다 하면서 진정시키고. 그래도 무서워서 바깥에 못 나가는 거 있지. 방망이 찼지. 여기에는 총 찼지. 일본놈들 순사 무서운 거는 저리가라더라고. 일본놈들 순사 참 무서웠거든. 반짝반짝 긴 칼 차고 칭, 칭. 신발에 징 박고. 근데 우리 아버지는 왜 그리 좋아했는지. 해방됐다고 좋아하더라구. 부산에 온 이듬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우리 엄마가 스물아홉에 오남매를 혼자 기른 거야. 우리 아버지는 무조건 왜놈을 싫어했대. 왜놈이 우리나라 핍박했다고.
한국에 나간다 하니까 한국은 시골인 줄 알았어, 일본에서. 아주 시골에 강 같은 거 있고 청정에서 그냥 따먹을 수 있고 그런 줄만 알았어. 뭣이든지 먹는 줄 알았어. 근데 나와 보니까 아줌마들 아저씨들이 밤 삶아서 실을 끼어서 주렁주렁 달고, 감 홍시 이고, 비빔밥 양쪽에 짊어지고...... 한국에 가면 그냥 먹을 게 널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 내 안 해 본 장사가 없다. 엿장사 했지. 지금은 부산에 가면 시청이 없어졌어, 옛날에는 광복동 그쪽에가 시청이 있었는데, 시청 뒤에 미나까이(三中井)라고, 시민극장이 있었어. 담배 이렇게 해서 히노마루요, 히노마루요, 마이보루요, 마이보루요. 미국놈들 담배. 엿장사를 하는데, 먹고 싶으면 뿐질러 먹으면 괜찮은데 어린 마음에 하나 뿐질러 먹으면 갯수가 적잖아. 갯수 맞추느라 가위로 잘라 먹고 늘리고. 그래 또 잘라 먹고 다 짧아지잖아, 그래 안 팔리잖아. 내가 안 해본 게 없어, 내가 꼭 연애를 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이야기 하다 보니까 다 나온 거야. 아버지가 그게 정이 갔는지 어쨌는지.
어머니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노래도 잘 하셨단다. 그러면서 한 곡 들어보라고 부르시는데 ‘단결투쟁가’다. “내, 이런 노래도 이젠 가사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면서.

<가족 나들이>
이렇게 자라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아버님이 보일러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였지만 살림이 넉넉지는 못했다. 끼니를 콩나물죽으로 해결할 때도 많았단다. 그런 살림이었지만 “창수는 못사는 친구들이 있으면 데려와서 콩나물죽이라도 먹여 보내고 그랬다”고 한다. 박창수 열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고 다른 가족은 아버지 직장을 따라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다가 90년 말에 방이 여럿 있는 집에 세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아들을 마지막으로 봤다.
창수 자랄 때만 해도 우리 참 못 살았거든. 처음 성남 올 적에 300 갖고 왔어. 300 갖고 집을 얻으려니 얻을 데가 없드라고. 350 달라는 것을 주인한테 사정을 하고 나중에 해주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작은방 하나 얻어가지고 다섯 식구가 저기 살았어. 위에 다락이 있어서 도배를 하고 해서.... 창수가 여름휴가 때 용찬이 데리고 올라오면 잘 때가 마땅치 않은 기야. 창수 죽을 적에는 이거보다[현재 집] 조금 작겠다, 독채를 하나 얻어서 이사를 했어. [1990년] 11월 30일날 내가 이사를 하고 12월에 지가 올라왔데. 올라와가지고는 좋아서 그냥~ 이보다 거실도 조금 작고 그래도 방 세 개고. 요만한 방에 살다가 운동장 같지 뭐. 용찬이가 와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우리 창수도 와 가지고는, 싱크대 옆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어머니 이제는 여기서 자도 되겠습니다. 방이 불만 넣으면 뜨시니까. 그러면서 좋아가지고 딱 이틀밤 자고 내려가서 그 길로 구치소 달려갔잖아. 연대회의 거 가지고. 그래 창수가 나아서 이걸 사왔더라구, 식기건조기를. 이걸 사다주고 가면서, 어머니 우리도 이래 살 때가 있네요. 이리 넓은 집에 살 적이 있네요. 그랬는데 그 길로 바로 죽었잖아.
박창수 열사는 가정형편 때문에 공고에 진학했다. 구치소에서 다쳐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들을 보러 갔을 때 부모님이 마음 아팠던 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것을 말렸던 점이다.
창수가 그리 누워있으니까 속이 상하고, 있는 부모 만났으면 공부 대학 좋은 데 가가지고 그리할낀데 인문계 간다할 때 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을텐데 공업학교 보내니 이리 됐구나. 옛날에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어, 먹을 게 없어가지고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도 도시락을 모르고 다닌 애여 창수가. 그래 배를 많이 곯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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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12일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한 박창수 열사>
박창수 열사는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고, 몇 년 후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열사는 90년 7월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고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12월 9일 발족한 대기업 연대회의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다음 해 2월 11일 대우조선노조 투쟁에 대한 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제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구속 수감 중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5월 6일 새벽 4시 45분에 안양병원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다음호에)
* 미나까이(三中井)는 대구에 지어진 백화점으로 경영진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이후 부산, 서울에도 건물을 지었으며 만주까지 진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