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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뒤집어지는 게 아니다
첨부파일 -- 작성일 2008-10-28 조회 899
 

뉴스레터 [한내] 2008년 11월호 (제3호)

세상은 뒤집어지는 게 아니다

글 : 양규헌 (한내 대표, 발행인)

어젯밤 강한 바람이 아침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끔씩 빗방울도 섞여 한결 가을 기운을 풍긴다. 집 앞 자그만 잔디밭에는 새벽이슬 머금은 노란 국화와 빨간 감이 빛을 발한다.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국화가 그러하듯, 정초한 코스모스의 찬란함이 상징하듯, 가을은 생각의 여유를 갖고 싶은 그런 계절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여유 없는 삶은 사고하는 여유에도 제약을 준다. 새로운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에 앞서 무딘 기억이 짓누르는 압박을 어찌할 수 없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청동기마상’의 의미가 분명히 다른데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만 주절대는 이유를 생각하기조차 쉽지 않다. 

오로지 기억의 한쪽을 부여잡기에도 힘들어하는 게 우리들의 삶일지 모른다. 아픈 기억들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과 잊어야할 것들이 뒤섞이다 보니 때 되면 바뀌는 계절이 오히려 뒤집어지는 것 같다. 

1990년 초여름, 반월공단 금강공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투쟁을 하는데, 공권력이 투입되고 원태조, 박성호 동지는 온몸에 시너를 붓고 경찰이 다가오면 불을 붙인다고 맞설 때, 경찰들이 다가와 라이터를 빼앗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지는 불기둥에 휩싸이며 열사가 되고 말았다. 분신으로 목숨을 바친 동지들의 투쟁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지역동지들은 열사들의 죽음을 경찰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고 대책위를 만들어 연대투쟁을 벌였다.

안산 라성호텔앞 사거리에서 장시간 가두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거리에 앉아 대기하던 경찰들에게 투쟁대오가 일제히 화염병을 던지며 공격하자, 경찰 대오는 허둥지둥 시위대를 향해 직격탄을 쏘기 시작했다. 그때 경찰 진압부대는 동료들이 난사하는 직격탄을 등지고 “공격 앞으로”라는 외침과 함께 시위대를 향해 달려 들었고, 진압부대를 지휘를 하던 경찰간부 하나가 뒤에서 날아오는 직격탄을 맞아 쓰러졌고 경찰차에 실려 어디론가 후송되었다.

가두투쟁을 마치고 귀가하는 시내버스 안에서 거리시위를 막다가 쓰러진 경찰 간부가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방송국을 찾아가 경찰이 쏜 직격탄에 죽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죽인 자가 뒤바뀐 뒤집힌 상황이 진실로 보도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상해치사 혐의’로 수배 딱지를 달게 되었다. 수배 중에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불안정한 주거생활도 문제지만 수배자라 해서 활동범위까지 줄일 순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안’이라는 그늘 속에서 단위노조와 지노협 일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 정신적 혼란과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보다 더 힘든 건 ‘노동해방 쟁취하자’라고 외치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간 열사들의 절규가 계속 내 가슴을 조이는 것이었다. 군사정권의 폭력과 탄압은 노동자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이러한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진실과 허위가 뒤바뀐 모순은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희망을 찾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는 어두운 긴 터널의 답답함과 같았다. 수배생활이 길어지면서 몸 상태는 엉망이 되었다. 주변의 동지들은 휴가(?)를 종용했고,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 갖는 휴가였다.

비오는 가을날에 대한 나의 기억은 18년 전 초봄으로 거슬러 놀라간다. 전라북도 모악산, 금산사 아래 민박집에서 2주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수천 년 기왓장만 반짝이던 겨울의 끝자락은 따스한 봄을 부르고 있었다. 큰 산과 작은 산이 올려보고 내려보는 긴장의 대립 틈새로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한낮엔 봄나들이 인파들로 어수선한 금산사지만, 고즈넉한 절간의 아침나절엔 보리밭 고랑너머로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솔잎 푸른 그늘 아래 붉게 타오르는 진달래의 함성이 계절의 뒤바뀜을 실감나게 한다. 금산사 일주문 왼쪽 대나무밭이 온통 죽어있는 걸 보는 순간, 어린 시절 아버지 말씀이 문덕 떠올랐다.

‘대나무가 죽으면 세상이 뒤집어 진데이~’ 푸르름으로 상징되는 대나무 잎이 누렇게 말라죽는 걸 보며 순간, 희망의 서광이 스쳐 지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뒤집어질까?

지난해 지방을 다녀오다가 예날 그 대나무가 궁금해 금산사를 찾았다. 새롭게 단장된 일주문보다 그 대나무 밭이 관심이었다. 십수 년 만에 찾은 그 대나무밭은 공교롭게도 또 황색으로 변색되고 있었다. 군부독재를 지나 문민, 국민, 참여를 거쳐 온 세월 속에 대나무가 몇 번이나 말랐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계절이 뒤바뀌고 신자유주의가 노동자 고통을 강요하는 모순은 계속되며, 노동자 구속, 수배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열사들의 행렬 또한 계속되어도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계절이 주는 순간적 아름다움에 현혹되거나 순간적 감동에 도취되어 세상이 뒤집어지길 기다릴게 아니라 세상을 뒤집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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