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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중앙위원회 회의장 침탈과 중앙위원 연행에 따른 항의투쟁
시기 : 1990년 12월 20일 ~ 21일
전노협은 1990년 12월 20~21일 양일간 전노협은 11차 중앙위원회를 서울 우이동에서 개최했다. 단병호 위원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직무대행을 맡은 김영대 수석부위원장과 최동식 사무총장 역시 현상수배됐기 때문에 전노협은 출범 이후 한 번도 사무실에서 중앙위원회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21일 아침을 마친 회의 참석자들이 회의 속개를 준비하는 순간, 160여 명의 백골단이 회의장 일대를 포위하고 난입하기 시작했다. 신분증과 영장 제시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에 구두를 신은 채 들어와 권총을 내보이며 위협하고, 갖은 욕설과 폭언을 퍼부으면서 김영대 직무대행을 영장 없이 강제연행했다. 이어 수배된 최동식(인노협 의장) 사무총장과 박창수(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부산노련 부위원장, 천영세, 남상헌 지도위원, 전노협 상근자 등 31명 전원을 연행했다. 중부경찰서에 연행된 중앙위원들 중 김영대 직무대행은 따로 분리되어 조사를 받았고, 나머지 연행자들은 일체의 조사에 불응한 채 김영대 직무대행 즉각 면회와 석방을 요구하며 중부경찰서 내에서 항의농성을 벌였다.
전노협은 중앙위원회 회의장 침탈이 그동안 정부와 자본이 전노협 건설 저지와 와해에 총력을 다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1991년 임금인상 투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벌인 선제 강공이라고 규정하고, 중부경찰서 항의투쟁과 불법연행규탄 철야농성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중앙위원회 회의장 침탈 만행은 물가폭등과 정권의 임금 한 자릿수 억제방침 등이 초래할 전면적인 노동자 생존권 악화가 폭발적인 대중투쟁으로 분출되리라는 점과 1991년 3월 지자체 선거 등 선거국면을 맞이하여 자본과 권력이 기존의 방식대로 노동운동탄압을 지속하기는 어렵다는 점 등을 고려한, 1991년 임금인상 투쟁을 분산시키고 무력화시키기 위한 사전탄압이었다. 그 최초의 화살이 전노협 지도부에 대한 침탈과 무력화에 맞춰진 것이다. 정권과 자본이 노동자를 향해 전쟁을 시작한 셈이다.
또한 전노협의 공식적인 지도부이자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에 대한 침탈은 민주노조의 전국적 구심인 전노협을 비롯하여 모든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정면도발 행위이며 노태우 정권이 임금인상 투쟁을 앞두고 노동운동 말살에 사활을 걸었다는 점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침탈은 1990년 하반기 들어 자행된 정권과 자본의 단체협약 개악을 통한 도발, 노동법 개악 기도, 투쟁사업장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권력 투입 등 일련의 노조탄압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전국적 대응 여부에 따라 단위사업장과 지역이 고립분산적으로 각개격파 당할지 아니면 이를 계기로 임금인상 투쟁으로 집중되는 공동전선을 형성해 적들의 공세를 저지하고 임금인상 투쟁 승리와 함께 민주노조운동의 일보전진을 기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연행된 중앙위원들은 중부경찰서 형사과를 점거하고 벽보를 써 붙이는가 하면, 형사과를 점거하고 긴급중앙위원회를 열어 규탄투쟁 계획을 수립했다. 중앙위원들은 △영장없이 불법연행을 자행하고 폭력적으로 중앙위원회 회의를 방해한 중부경찰서장의 사과 요구 △김영대 직무대행이 석방될 때까지 중앙위원과 상집 일동은 일체의 조사에 불응하며 유치장 내에서 무기한 단식농성 돌입 △직무대행의 소재를 밝힐 것과 즉각적인 면회 요구 △각 지역과 단사에서는 노조대표자를 비롯한 간부들이 즉각 대자보를 통하여 상황을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항의 철야농성 돌입 △수도권에서는 즉각 항의방문을 조직하고 각 노조별로 중부경찰서에 항의전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투쟁으로 오후 2시 20분경에는 김영대 직무대행과 연행자 전원의 면담과 중부경찰서장의 불법연행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졌다. 줄기찬 투쟁으로 오후 6시에 김영대 직무대행을 제외한 전원이 석방됐고, 수배중이었던 최동식 사무총장도 다른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고 먼저 빠져나옴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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