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고 그대는 죽었지만
(1920년대 제주지역 사회운동)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운영위원)
1919년 3·1 운동 이후 우리나라의 변혁운동은 민족주의적 실력양성운동과 사회주의적 사회운동으로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실력양성운동은 민족주의 좌파적 성향을 띠었고, 민족주의 우파들은 친일의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국외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은 그야말로 독립전쟁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중국 상해나 일본 동경을 중심으로 국내에 전파되었고, 노동, 농민을 중심으로 계급해방이 곧 사회주의 실현임과 동시에 일제를 타도하는 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특히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과 이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을 피해 활동들이 지하화하거나 야체이카 형태로 혹은 독서회나 친목회의 외피를 쓰고 활동을 이어 나갔다.
제주지역의 경우도 위와 같은 흐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제주는 지역적 특수성과 산업구조로 몇 가지 특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1918년 제주에서 대판간 함경환의 운항으로 식민지 시대 제주의 절대적 빈곤과 일본사회의 공업화로 인한 노동력 요구로 청년들과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노동 현장에서 몸을 담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선진적인 사상의 유입자들이다. 이들이 다시 제주에 돌아와 청년들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교육운동 및 청년운동, 좀녀투쟁, 적색농민운동, 야체이카 활동 등으로 나타났고, 특히 해방 이후 제주지역 역사를 뒤바꾸는 근원이 되었다.
선진적인 사상으로 무장한 청년과 지식인들은 민족교육가들이 설립하는 학교에 교사로 혹은 강연회 연사로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고순흠, 강평국, 양창보’ 등을 꼽을 수 있다. 민립학교 설립 운동이 일제의 교묘한 탄압 등으로 좌절을 겪게 되었다. 이들의 동력이 청년운동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문화운동 위주의 계몽주의 성향의 청년운동이 차츰 청년들의 계급적 자각 속에서 1925년 ‘제주청년연합회’의 결성과 1928년 ‘제주청년동맹’의 결성과 같이 민족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전국적인 청년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게 된다.
1918년에 결성된 ‘제주청년수양회’는 고전적인 청년운동이라 할 수 있다. 구성원부터가 지역에서 사회 경제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활동 내용도 일제가 산업 수탈을 할 수 있는데 일조하는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다가 3·1 운동 이후 교육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하다가 이에 대한 반동으로 1924년 ‘제주청년회’가 창립되면서 조선민중해방운동으로 전화하게 된다. 특히 ‘무산자를 본위로 한 신사회의 건설’ 강령을 가진 1925년 ‘신인회’의 등장은 식민지 시대 청년운동의 한 획을 긋기 시작한다. 핵심 인물로는 ‘송종현, 강창보’이며, 이들은 1927년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건설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또한 제주읍 중심뿐만 아니라 각 마을 단위의 청년회가 활성화 되어 선진적인 사상 전파를 하게 된다. 조천리에서는 1925년 메이데이를 기념하여 ‘오일회’를 조직하여 무산소년을 위한 노동학원을 설립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청년들에 의하여 제주도 각 지역의 청년회를 하나로 연대시키고 전국적인 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과 연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제주청년회’에서 일어나, 1925년 7월 가맹을 토의하고 9월에 ‘제주청년연합회’를 창립하게 된다. ‘제주청년연합회’는 단순한 청년운동의 결집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제반 운동을 지도하는 조직으로 건설되었으며, 고립적인 계몽운동에서 벗어나 중앙의 조직과도 연결되고 사상적으로 체계화된 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간부들이 ‘신인회’ 소속인 것을 보면 1925년 이후의 제주지역 청년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특히, 제주도 출신 사회주의 사상가의 선구자격인 김명식이 초창기 ‘서울청년회’의 핵심이었기에 ‘조선청년총동맹’을 장악한 ‘서울청년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행정구역으로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던 ‘전남도당’이 6?10만세 이후 화요회 계열이 와해되어 복구과정에서 일제 탄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던 ‘서울청년회’가 주도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제주청년연합회’는 서울청년회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전남청년연맹’과 연결된 가운데 조직되어 활동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후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신간회’ 합류 결정이 이루어진 1927년 후반기에는 ‘신간회 제주지부’를 건설하고 자매단체인 ‘근우회’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함덕비 앞면과 뒷면>
1927년 후반부터 ‘제주청년연합회’의 중심인물들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제주도 야체이카’를 구성하여 갔으며, 그 핵심인물이 제주청년연합회의 실질적인 주도자였던 ‘송종현’이다. 그는 전남도당의 책임자인 ‘강석봉’의 권유로 입당하여1927년 7월 광주에서 개최되었던 전남도당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그는 제주청년연합회의 핵심인물들을 가입시켜, ‘조선공산당(3차)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하게 된다. 이들은 제주읍내를 중심으로 제주도 서북, 서남, 동북 지역의 책임자를 선정하여 조직 확산을 꾀했다. 조선청년총동맹이 신간회 구성이후 정치운동으로 나갈 것을 선언하자 제주청년연합회도 1928년 8월 모슬포에서 ‘제주청년동맹’으로 변경한다. 도내 각 지역의 청년회도 ‘제주청년동맹 지역지부’로 개편하게 되는데, 가입자 수가 4,300여 명에 달했다. 일제가 1928년 8월부터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에 나서자 200여 명이 체포당했으며, 원천적으로 집회를 금지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되어 간다. 그러던 중 1931년 1월에 ‘제주청년동맹 함덕지부’에서 ‘한영섭 기념비 사건’이 발생한다. 함덕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운동가인 한영섭이 1931년 1월 15일 일본 동경에서 사망하자 함덕 청맹원들이 고향에서 동지장(同志葬)을 치르는데, 1월 19일 시신이 도착하고 1월 21일 ‘추도 적혁(赤革) 한영섭의 영’,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고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하라’라고 적은 만장을 세우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른다. 또한 ‘동지적광한영섭기념비(同志赤光韓永燮記念碑), 차디찬 흰 빛 밑에 눌린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뿌린 동지였다’라는 비석을 세워 항일과 계급의식을 전파하고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동우물가에 설치했는데, 일제가 이를 빌미로 20여 명을 검속하고, 관속에 불온품을 넣었다고 증거를 확보한다며 무덤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다. 물론 비석을 압수해 가버렸고, 현재의 비석은 해방 이후 함덕리민들이 기념비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추가하여 ‘애도동지 김재동 한영섭 송건호 부생종 군’이라고 비문을 새기고 다시 세운 것이다.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져서 청년동맹의 활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으나, 탄압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회운동이 각 지역 청년동맹원들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며, 비밀리에 청년들 중심으로 지하조직이 건설된다. ‘혁우동맹’ 사건, ‘8인동지회’ 사건, ‘신창독서회’ 사건 등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제주청년동맹을 중심으로 한 제주지역 청년운동은 1931년 이후 전국적인 청년동맹의 해소 방침에 따라 서서히 성격이 변화하게 되었으며, ‘코민테른 12월테제(1928.12.10 조선농민 및 노동자에의 임무에 관한 결의)’로 청년운동 보다 계급운동이 중요시됨에 따라, 제주청년동맹을 마지막으로 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은 그 이후 전개되는 사회주의운동과 대중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재건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1차 1927년, 2차 1931년)에서, 1932년 구좌면 중심의 좀녀투쟁에서, 적색농민운동 등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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