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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가 부활하는 진보정치
양규헌 (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저.. 여러분 믿고 가도 되죠?
“여러분 저를 지지해(쥐쥐해!) 주시겠습니까? 저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워딩을 무엇으로 생각 하실지 모르겠다.
더불어 “저.. 여러분 믿고 가도 되죠?”
소란스런 군중의 함성과 열렬한 지지로 '페이드아웃'(Fadeout)되는 이 믿음의 광란 유튜브 영상들이 어렴풋 떠오른다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은 눈치 챘을 수 있다. 총선 기간 중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 시작과 함께 붕대감은 손을 기억할테니까.
선거가 야권이 실패로 끝난 상황을 두고 진보 진영의 젊은이들이 멘탈붕괴에 빠졌던 징후들이 여기저기 드러나고 있다. 열심히 선거패인을 진단하고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그걸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질수 없는 게임'이라고 미리 재단하고 있어서 야권의 총선 패배는 더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반성의 몸짓도 간헐적으로 보이고 있으나 "역사의 진행은 반동을 동반함으로 우리 국민의 선택은 늘 절묘하게 균형추를 맞춘다"는 평가에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총선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실종됨에 대한 허탈함과는 달리 선거에 대한 또 다른 분석 글이 눈길을 끈다. "이번 선거는 상조회 선거인데, 박통상조회와 노통상조회의 한판 싸움으로 박통상조회의 한 판 승". 뭐 이런, 초 간단 인터넷 까페 글 내용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그동안 언론의 분석이나 지문에 발표했던 딱딱하고 공학적 분석 보다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다. 결과적인 생각이지만 언론장악이든 이명 박근혜의 빅딜이든 그들은 승리해서 지지자의식을 상조회 수준으로 돌려놓았다. 굳이 더 말하자면 박통 상조회는 신라공주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다음 상조회 전투는 어느 쪽이 이길까?
정세 분석은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는데 그 중 야권단일화 진영의 유권자들은 "현재는 공주가 피크이고 내려갈 일만 남아 있어 대권엔 우리가 유리하다"고 보는 시각들이 있는 한편, 공주의 추락을 고대하는 심리는 있으나 상조회의 무조건 신뢰와 집권세력이 갖는 정보 활용과 집권세력의 정보독식이라는 장점 때문에 대선에선 박통상조회가 승산이 있다는 분석도 보인다. 최근, 이런 분석의 타당성에 무게가 실리는 근거는 첫째, 박통상조회는 역사의 과정을 거치며 다져진 조직이고 고정지지층이 두텁다는 점, 두 번째는 노동자계급정치 실종의 여파가 노동자들의 정치관심결여와 총선 이후 불거진 통진당의 엄청난 사건이 현 정세에서 박통상조회의 유리한 쪽에 손을 들게 한다.
중세와 같이, 박통상조회 지지자 투표에 대한 심리는 믿음이라는 절대성에서 나온 종교적인 행위와 유사하다. 이 세상에 무조건의 믿음만큼 위력적인 것은 없다. 박통상조회 지지그룹 중 노동자들도 꽤 많아 보이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자가 분명하지만 노동계급이라는 암울하고도 참혹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주에게 권력을 선사하는 자신들도 권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며(자신의 계급적 토대를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열심히 선거에 참여한다. 니체에서 보듯이 권력의지는 사람에게 대단한 것이긴 한가 보다. 권력을 실제로 갖지 못한다면 갖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라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해 노통상조회는 좀 더 과학적이고 분석적이고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그룹인양 자부 하지만 결집과 결속력은 공학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노통상조회의 한 쪽과 결합하여 창당한 통진당의 비례대표 투표행태는 상상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중세봉건제시대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통진당은 3개의 정치조직이 모인 결과물인데, 통합의 과정이 '이념과 정책을 통해 이룬 화학적 결합'이 아닌, 상호 '의석에 대한 욕구와 필요 때문에 물리적으로 결합'한 결과가 통진당이다. 통진당은 민주통합당과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솔로몬 전략까지 선 보였고, '특권 부패 정치구조 척결'을 외치며 '이명박심판'을 외쳤다. 그런데 그 외침은 지금 예리하고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통진당의 심장을 파고들고 있다.
4년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명박과 박근혜의 예비경선. 여론조사에서 이명박에 대한 최시중의 역할이 오버랩 된다. 그런데 통진당 '진상조사위'의 발표는 그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대리투표', '무효표 기준 변경', '투표 진행 중 소스 코드 열람' 등 부정선거의 전형을 모아 백화점을 차렸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부실인지는 확인이 어렵지만, '진상조사위' 발표에 근거한다면, 초등학교 반장선거 경험이 있는 초딩도 이해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통진당 내부는 '진상조사위' 발표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며 '진상조사위'에 대한 '무고'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며 조직적 비난의 당당함에서 진보정치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기록될 복잡미묘한 사건을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안일함에서 진보의 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고 봉건의 잔재만이 흐트러져 있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진보의 가치가 단순하게 '이명박정권 반대'로 국한되는 거 같아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부정은 부정이고 부실은 부실이다. 부정과 부실의 교묘한 혼합으로 선거부정은 '조사위'의 과도한 주장일 뿐, 근거 없다고 우기는 억지에서 자신들이 외쳤던 윤리와 도덕적 잣대마저도 완전히 분질러버리고 말았으며 참과 거짓, 진실과 허위의 구분조차도 특정 정파의 '내부권력쟁취'라는 속성에 갇히고 말았다. 논쟁을 관통하는 부실과 부정의 차이가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로 통진당이 풍전등화인데, 당권파는 '진상위' 발표에 오히려 '중세의 마녀사냥'을 들먹거리는 강심장을 보이는데 대해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정희대표는 '책임지겠다'고 한다.
이명박 정권 4년을 경과하며 이명박정권을 비판했던 몇 가지 핵심적 이유는 "첫째, 국민을 속인다는 것이고. 둘째, 도덕적으로 완벽한 척한다는 것. 셋째,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치유하기보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악착같이 버틴다는 것과. 넷째, 아무리 지적하고 비판해도 뭘 잘 못했는지 모른다."가 핵심이었다. 결국 이런 '이명박정권'의 실정이 정권의 정치적 몰락에 핵심 요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통진당의 모습은 이와 무엇이 다른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은 나의 우둔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 시골에 사시는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생네는 평소에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뉴스를 보며 농부들도 분노하고 있는데 이번 부정에 동생은 개입하지 않았지? 동생도 진보인지 운동인지 그거 빨리 그만 두고 가족들 생각이나 해!" 70이 훌쩍 넘은 노인의 걱정에 대답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라고 전화를 끊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운동, 진보진영에 몸담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건 당연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통진당 대표는 그렇게 당당하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정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책임지겠다는 표현에 진정성은 보이지 않고 정치적 수사로 들리는 이유는 당 내부의 상황논리로 어처구니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비례대표 사퇴권고에 대해 '초헌법적 쿠데타'(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라며 항의하는 모습에서 경악과 함께 정치적, 도의적 책임은 고사하고 반성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에 대한 개념을 말하기 전에 진보가 무엇이고 자기성찰이 무엇인지 아랑곳없다. 통진당 당권파의 상황논리로 밀어나가고, 지도부 사퇴하고, 비례대표 사퇴한다고 해도 모든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데 갈수록 당당해지는 이들의 모습에서 '이들이 정말 진보였는가.'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무엇을 책임지며, 무엇을 해결한다는 것인가
이명박정권의 부도덕과 삽질정책과 밀어붙이기에 혐오를 느낀 대중들이 총선과정을 거치며 진보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SNS를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런데 역으로 진보정치에 대한 실망을 대중에게 안겨준 결정적 행위를 무엇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 진보 가치의 핵심을 파산시킨 행위가 사과한다고 책임을 다하는가. 보수정치에 반대했던 대중들에게 사과한다고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진보정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대중들의 가슴에 밀려드는 정치적 좌절과 배신감이 사과한다고 봄바람에 눈 녹듯 녹아 없어지며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식의 행태는, 사안의 중대성을 외면하고 '내부권력'에 대한 자아도취일 뿐이다.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다. 수 십 년을 사회적 비리와 부패에 맞서 싸웠던,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위해 투쟁했던, 야만과 탐욕의 자본에 맞서 투쟁해 왔던, 신자유주의 공격에 대항하여 정리해고 비정규철폐의 요구를 내 걸고 지금도 묵묵히 투쟁을 하며, 진정한 진보의 가치로 미래의 전망을 밝히려는 동지들에게 진정 책임을 다 할 수 있는가. 현실 보수정치판에서 극복해야할 정치적 과제는 비리와 부패와 모순이라고 판단하고 대중을 조직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에게 사과라는 개념'으로 사과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의회정치는 그렇다 치고 운동진영의 모든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씌워진 부정, 부패, 부도덕, 몰상식이라는 멍에를 어떤 책임으로 벗겨낼 것인지 통진당은 분명히 답해야한다.
저.. 여러분 믿고 가도 되죠?
공주는 총선 내내 전국 지방을 돌며 붕대 감은 손을 번쩍 들고 이 말을 유세의 말미로 장식했다. 믿음에 동화된 사람들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붕대공주의 손에 열광했다. 정치 공학의 분석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그리고 인민의 자기결정력과 자기 권력이 정상적인 상식선에서 작동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현실정치에서 진보정치의 딜레마이며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그런데, 닭이라고 비하되었던 정치, 미래사회에 희망이 될 수 없다던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에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차이가 없어졌다고 평등은 아니다. 추구하는 가치와 계급적 헤게모니가 순전히 자본에게 주어진 자본주의에서 평등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평등을 향해 가는 길이 더 멀어졌지만. 자본주의 사회모순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당기간 동안 정치투쟁의 당위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졌다는 게 이번 통진당 사건이다. 책임을 지겠다며 '운영위' 회의진행을 거부하며 퇴장한 이정희대표의 모습과 운영위회의장 출입 봉쇄, 투표한 당원들에 대한 무고라는 말, 그리고 '진상조사위'와 언론에게 편파보도라며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이들의 면면이 붕대감은 공주의 모습과 동일 선상에서 어우러진다. 당은 정치조직 최고의 위상이다. 정치조직의 대표는 지도자로서 당의 리드로서 역할과 임무가 규정된다. 그렇다고 당이 대표가 될 수 없듯이 대표가 당이 될 수는 없다.
대표에 의해 대표가 소속된 정파에 의해 당 운영이 좌지우지하는 것은 민주성을 폐기시키는 전형이기에 진보정치가 가장 경계해야할 조직운영방식이다.
그간 우리는 붕대공주를 비판하며 그의 독선이 이명박의 연장이라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지금 상황에서 통진당의 운영원리가 보수정당의 패거리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해명이 가능할지 머릿속이 마구 엉킨다. 혹, 당대표를 그만두기 때문에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폭넓은 운동진영의 활동가들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는 짓거리나 다름없다. 이미 모든 운동진영은 본의든 아니든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는데, 자신의 행보 하나로 책임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가 운동진영의 상부권력에 군림한다는 전재에서 비롯된 발상이며, 개인의 행보가 정치조직과 운동진영 전체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은 '유아독존격' 착각이라는 측면에서 붕대공주와 괘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진보적 이념과 뼈저린 반성에서 환골탈퇴하지 않으면 진보당의 미래는 없다.
총선 결과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이유는 박통상조회든, 노통상조회든, 그리고 진보세력이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