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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기념대회 목표와 요구
‘임금인상과 물가폭등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노조 공동투쟁본부’(아래 ‘전국투본’)는 1991년 4월 18일 열린 2차 회의에서 4월 24일부터 5월 1일까지를 노동절 기념주간으로 선포하는 등 1991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의 투쟁계획을 확정했다.
이어 전국투본은 노동절 기념대회를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위원회’ 주최로 중앙과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하기로 하고 대회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첫째, 세계노동절 102주년을 맞이하여 노동자들의 단결과 해방투쟁의 의의를 기리고 노동절 쟁취투쟁의 결의를 다진다.
둘째, 4월 말까지 쟁의발생 신고, 5월 9일 쟁의 돌입으로 예정되어 있는 공동 임금인상 투쟁 일정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 온 임금인상 투쟁경과를 보고하고, 공동 임금인상 투쟁의 무력화를 위해 강화되고 있는 노동운동 탄압을 단호히 분쇄하여 1991년 임금인상 투쟁 완전승리·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셋째, 5월 9일 총력투쟁 돌입을 앞두고 전국 노동자들의 공동 요구를 천명하고 총력투쟁의 결의를 다진다(서명운동 결과 보고 및 법적 처리).
넷째, 노동절 투쟁의 전민중적인 성격을 공유하고 각 부문의 요구투쟁을 결집하여 5월 민중연대 투쟁으로 이어가는 장이 되게 한다.
세계노동절 102주년 기념대회의 주요 투쟁 슬로건은 “민주노조 총단결, 노동운동 탄압 분쇄, 1991 임금인상 투쟁 승리”, “구속노동자 석방과 노동악법 철폐”, “노동부 지침 철회와 노동부 장관 퇴진”, “민생파탄, 민중탄압, 노태우 정권 퇴진” 등이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조직
기념대회는 전국투본(전노협, 연대회의, 업종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준비위가 주관하고, 국민연합, 평민당, 민주당, 민중당이 후원했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본대회를 치른 뒤 도심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기념대회위원회는 전국투본 및 업종회의 소속 노조 위원장, 노동단체 및 각계각층의 지도급 간부들 1,000여 명으로 구성했다. 대회위원회의 상임의장은 전국투본장과 업종회의 의장이 맡고 공동의장단은 각 부분 대표자가 맡았으며 고문단으로는 전노협 고문단을 비롯한 각계의 원로들로 구성했다. 대회위원회는 집행위원회 산하에는 정책기획, 선전홍보, 행사 준비, 전술기획, 총무, 연대사업반을 두어 노동절 대회와 관련한 실무집행을 담당하게 했다.
전국투본은 세계노동절 기념 문화사업으로 노래판 굿 ‘해방맞이’ 전국 순회공연을 추진했으며, 지역별로 노동자문화제, 문화대동제, 대국민 홍보전, 전야제, 기념대회 등을 조건에 따라 다채롭게 진행했다.
선전반에서는 사전 선전작업의 일환으로 1991년 4월 29일 전노협, 연대회의, 업종회의 3주체 명의로 ‘1991년 세계노동절 공동선언문’을 대자보 형식으로 제작 배포했다. 이밖에도 기념대회와 관련한 대국민 선전물과 대회 안내 전단 등을 제작해 각 지역과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활용토록 했다. 또 대회 당일에 쓰일 유인물로는 ‘세계 노동자에게 드리는 글’, ‘대국민 메시지’, ‘대회 결의문’ 등을 제작 배포했다.
행사 준비반은 행사 준비팀장을 중심으로 물품, 시설, 진행보조, 문화, 행사장 운영 등 역할별로 체계를 구성했고 노동절 기념대회 행사 전반에 대한 준비를 담당했다.
선봉대는 1991년 노동절 투쟁의 의미를 임금인상 투쟁, 총력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노동운동탄압 분쇄 투쟁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로 설정했다. 선봉대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전국 동시다발 집회투쟁과 선전투쟁을 전개하고 이와 함께 노동부장관 퇴진 서명운동의 결과에 따른 법적·정치적 대응을 전개했다.
1991년 노동절 기념대회에서 선봉대가 수립한 활동원칙은 △5․1절의 역사적 의미와 선배들의 투쟁을 부각하고, 현재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해 적극 선전 △지역과 단위사업장에서 선전선동을 수행하고 좋은 선동문을 선정, 한겨레신문 등의 독자 투고란을 통해 대외적 선전 수행 △집회 대오를 유지하고 즉석 선동을 통해 대중 분위기 고양 △투쟁시 투쟁전술을 구사하고 지도부 사수 등이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진행
1991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정권의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사건을 계기로 전국 14개 지역에서 노동자, 학생, 시민 등 10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격렬한 투쟁 속에서 진행됐다. 서울, 인천, 부천투본 소속 노동자 3만여 명이 참여한 수도권 대회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전국투본,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전국노동단체연합 준비위원회를 선두로 지역투본, 단위사업장, 민주단체 등의 깃발이 입장하면서 시작됐다. 이날 대회에는 노동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지도자 100여 명이 참여하여 투쟁의 열기를 드높였다.
최동식 대회 집행위원장은 대회사를 통해 ‘임금억제 정책 및 노동부 지침 철회와 노동부장관 퇴진’을 위한 전국 노동자의 서명운동 결과를 바탕으로 최병렬 장관을 제3자개입금지 조항 위반으로 구속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대회를 마친 노동자와 학생 등 1만여 명은 가두로 진출, 신촌 로터리를 점거하고 2시간 동안 투석전을 벌였으며,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지역별로는 성남(공단본부 앞) 2천 명, 경기(아주대) 4천 명, 광주(전남대) 1만 명, 전북(원광대) 1천 명, 대전(기독교연합봉사관) 6백 명, 부산(동아대) 4천 명, 마창(경남대) 3천 명, 대구(경북대), 8백 명, 구미(금오공대) 6백 명, 진주(경상대) 8백 명, 거제(대우조선) 1천 명이 모여 기념식을 한 뒤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울산은 현대계열사 노조들이 중식시간에 기념식을 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평가
1991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대회를 투쟁으로 쟁취하고 5월 9일 이후 상반기 총력투쟁으로 가는 중간 결집점으로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노동절 쟁취투쟁과 관련한 5월 1일 휴무 방침 결의는 이미 단체협약 상에 휴무를 쟁취한 사업장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후 5․1절을 완전 쟁취하기 위해서도 유효한 방침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1만 7,000여 명의 노동자를 포함한 6만여 대중이 결집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면서도, 대회가 행사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상반기 투쟁의 중간결집으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5월 9일 총력투쟁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국 노동자들의 공동요구를 천명하고 투쟁 결의로 다져진 대회의 열기를 총력투쟁으로 발전시켜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날 발표된 한 자릿수 임금억제정책 분쇄와 노동부 지침 철회 및 노동부 장관 퇴진을 위한 전국 노동자 서명운동의 경우 서명운동의 목표와 처리방안이 분명치 않아 조합원들의 참여가 적었고, 5․1절 대회의 주요 내용에 결합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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