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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 학교 경성고학당(1923년~1931년)_김미화
첨부파일 -- 작성일 2022-04-18 조회 260
 

프롤레타리아 학교 경성고학당(1923~1931)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으로 조선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19193.1운동 이후 각성한 청년지식인들은 사회주의야말로 민족해방을 이루고 봉건적 잔재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은 전국에서 독서회를 만들어 사회주의를 보급하고 활동가를 조직하였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사상단체라는 합법적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울청년회(1921), 무산자동지회(1922), 신사상연구회(1923), 화요회(1924), 북풍회(1924) 등이 당시 두드러진 사상단체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학교는 혁명투사 양성과 노동자 농민의 세포 양성을 목표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초한 사회과학 학습을 조직적으로 실천한 경성고학당이었다. 고학당 출신의 사회주의 활동가 이종(1911~2011)당시 유일한 조선의 계급적인 사회주의 사상의 학교였다고 구술하였다.

경성고학당을 설립한 이준열(1889~?)은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공업 지식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려는 교육사업을 착수하던 중 계획을 바꿔 무산자 청년을 위한 고학당을 세우게 되었다. 19235월 종로구 훈정동 2번지(현 종묘광장공원 부근)에 허름한 가옥을 임대하여 경성고학당을 열었다. 고학당은 5년제 중등 교육과정으로 첫해 학생모집에 500여 명이 지원했으며 그중 88명이 선발됐고 교육비는 무료였다. 고학생들은 노동과 학습을 병행하며 생계비를 조달했는데 생활이 매우 열악하여 극빈하게 생활했다.

학교 측은 재정적 기초를 세우고 고학당 같은 무산자학교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고학당의 활동을 담은 활동사진을 직접 상영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때 모금한 돈으로 동대문 밖 숭인동에 학교 부지 300평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교실 4, 기숙사 3, 이발소, 사무실, 인쇄소, 취사장 등의 시설이 갖추어졌으며 모두 학생들이 직접 관장하였다.

경성고학당의 교육지도 방법은 어떠했을까. 우선 모든 일은 학생 집단의 힘으로라는 기치 아래 행해졌다. 즉 학우회의 자치였다. 교양, 운동, 서무, 재무 각 부서를 나누어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처리했다. 사회과학 학습은 기숙사 방별로 7~8명이 한 팀으로 조직되어 주 1회 토론회를 진행했다.

역시 고학당 출신의 사회주의자 김삼룡(1910~1950)은 재학 중 마르크스주의 진상, 사회주의 대의, 사회주의 학설대요, 탱크의 물, 무산청년에게 수여함, 유물사관 대요등의 서적을 읽고 사회주의에 공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대립하여 무산계급이 항상 불행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니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 평등하게 분배하는 공산제도 사회에 공감한다.”라고 법정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김삼룡은 독서회 사건과 관계하여 1931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였다.

1929~1930년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하여 전국의 중등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이때 경성에서 학생운동 격문이 배포되었는데 격문의 주체인 <학생전위동맹> 결사체가 발각되어 많은 학생이 검거되었다. 이어 독서회와 공산당 관련 조직도 실체가 드러나면서 검거 선풍이 휘몰아쳤다.

 


경성고학당 1회 졸업식에 이학종, 정관진이 우등생으로 졸업했다는 기사

_<중외일보> 1928.2.25.

  

그때마다 고학당 학생들이 연루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학생전위동맹> 관계로 고학당 출신 이학종, 정관진, 한경석, 허미순, 이능종 등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김종원, 정윤필, 김원봉, 조성택은 검거망을 피해 탈출에 성공했으나 후에 구속되었다.

일제 당국의 폐교 명령으로 경성고학당은 위기를 맞았다. 학생들은 무산자 학생교양소로 존재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들의 손으로 학교 문을 닫는 게 낫다는 의견이었다. 193178일 학생대회를 열고 다시 헤쳐나갈 방법이 없으니 해체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체를 결의하였다.

경성고학당이 해체되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운동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충북 영동 출신 이종은 고향 영동으로 돌아가 노동야학을 개설하고 청년회와 농민조직 사업에 매진했으며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충북 충주 출신 김삼룡도 1932년 만기 출옥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 집에서 농민들을 조직하고 학습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남신동, <최초의 사회주의학교, 경성 고학당>,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 서해문집, 2005

역사학연구소 지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5

<조선일보> 1931714~719일자 기사

<중외일보> 1928225일자 기사

김삼룡 판결문(1931319),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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