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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남선물산 노동자들의 결사항전(1990년 4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0-04-27 조회 565

대구 남선물산 노동자들의 결사항전

 

시기 : 1990427~ 99

 

 

대구 남선물산노조는 198966일간의 파업으로 임금인상 투쟁을 승리로 일궈낸 대구노련의 중심사업장으로, 본조와 아현지부, 대구지부 등에 736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돼 있었다.

 

1990년에도 업무조사 거부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대구지역 섬유·염색업종의 공동임금인상투쟁을 위한 제반 사업을 주도했다. 섬유·염색업종 16개 사업장을 중심으로 섬유·염색노동조합 임금인상투쟁위원회를 구성해 319일 기자회견을 열고, 420일에는 남선, 태화, 대하 3사 공동집행부 구성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1990년 임금인상 투쟁 승리를 위해 2월부터 본조와 2개 지부 집행부가 공동운영위원회를 열어 5개 소위로 된 임금인상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426일까지 5차례 교섭을 했지만 회사측은 시종일관 임금 7% 인상을 고집했다. 이에 노조는 대의원대회를 열어 74% 찬성으로 쟁의발생 신고를 내고 427일부터 3사 공동집행부 철야농성을 시작해 51일부터 준법투쟁에 돌입했다.

 

1989년 장기파업을 경험했던 위원장은 삭발로 결연한 의지를 밝혔고, 태화노조와 현대중공업노조 투쟁에 자극받은 조합원들은 92.3%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이에 자본과 권력은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하려고 51112일 이틀에 걸쳐 백골단을 투입했지만 조합원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백골단을 격퇴했다. 또한 침탈에 대비한 사수대를 모집하자 109명이 지원했다.

 

한편 대구지역 학생들도 규찰에 참여하고, 519일에는 본조에서 노학연대를 위한 한마당을 열기도 했다. 다음날 광주항쟁 계승 및 노동운동 탄압 민자당 해체를 위한 노동자·학생 진군대회로 이어져 노동운동 탄압분쇄 전선을 지역으로 확대했다.

 

521일 총파업에 돌입하자 회사는 즉각 직장폐쇄, 단전 단수, 기숙사 폐쇄를 단행하고 노조 간부 21명을 고소·고발했다. 이에 노조는 속전속결 투쟁 전술로 서울 본사 상경투쟁, 외환은행 예금투쟁, 서부경찰서 항의투쟁으로 맞섰다. 상경투쟁 지도부의 구속과 함께 3차 공권력 침탈이 자행됐지만 400여 명의 조합원은 공권력 침탈 규탄과 구속 동지 석방 결의대회를 갖고 서부경찰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19명이 연행되어 6명이 구류를 받고 핵심간부 4명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졌지만, 조합원들은 출퇴근 시 염색공단 입구까지 진출해 경찰차를 막고 지도부를 보위하면서 강고한 투쟁 의지를 보여주었다.

 

616일에는 출근길에 연행된 위원장을 구출하기 위해 400여 명의 조합원이 공단 가두행진을 하고 서부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위원장을 돌려달라며 전경과 대치하다가 분노한 쟁의부장이 분신을 기도했다. 또 일부 조합원에 대한 연행에 맞서 150명 전원이 경찰차에 올라타 항의했고, 경찰서에 연행돼서도 투쟁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620일 태화염공에 5차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임금인상 투쟁이 마무리되고, 23일 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연대행사장(비산동 본소)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계속되는 공권력 침탈과 파업의 장기화로 조합원의 파업 참가율이 점차 떨어지는 가운데 회사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강성이라서 협상에 응할 수 없다며 지도부 불신을 유도했으며, 협상에서 전노협 탈퇴를 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야비한 공작 때문에 본조 일부에서 선 조업’, ‘교섭단 재구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비대위는 조합원 동력을 재정비하고 지도 구심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 임시총회를 소집했다. 임시총회에서는 회사의 선 조업주장을 대중적 결의로 부결시키고 규약 개정을 통해 구속자 기금을 1.5%로 확정함으로써 총회 투쟁을 승리로 끝내고 비대위는 대중적인 지도부로 확고히 서게 되었다.

한편 자본가와 경찰은 비대위 지도부를 검거하기 위해 전담반까지 구성했다. 조합원들은 이에 맞서 지도부를 보위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퇴근 시 지도부를 연행하려고 경찰차와 오토바이가 튀어나오자 여성조합원 5명이 지나가려면 내 배 위로 지나가라며 차 앞에 드러누워 막아내기도 했다.

 

74일 회사로부터 신변보장을 약속받은 상태에서 교섭을 마치고 나오던 비대위 지도부를 경찰차 5대와 20명의 사복형사가 포위, 연행을 시도했다. 대구노련 선봉대장 박표주, 이영근이 오토바이를 타고 교섭위원의 신변을 보장하라”, “민주노조 사수하자라고 외치며 쇠파이프를 들고 지도부를 사수했다. 경찰이 권총까지 빼 들고 위협했지만 비대위 지도부는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탈출과 함께 곧바로 80m 높이의 대구공장 굴뚝에 올라가 결사항전! 민주노조 말살 책동 즉각 중단하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굴뚝에서의 비타협적인 지도부 농성이 계속되자, 지도부 사수를 위해 파업 장소를 본조에서 대구공장으로 옮겼다. 굴뚝 침탈 시 지도부 공백에 대비해 굴뚝지도부와 함께 바깥의 지도 구심을 형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2명의 동지가 내려와 경북대로 옮김으로써 지도체계의 이원화를 꾀했다. 150명 정도의 조합원들은 비상대책위원회 산하 편집부, 선전대, 정당방위대에 자원해 더욱 강고한 전투 대오를 형성했다.

 

711일 본조에서는 타결됐다는 거짓말로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선 조업하면 임금을 두 자릿수로 인상해주겠다며 장기파업에 지친 노동자들을 회유했지만, 조합원 대다수는 단호히 거부했다. 오히려 굴뚝지도부를 지지방문해 지도부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확인했다.

 

719일에는 이현지부에서 정상조업 공고가 나붙었지만, 조합원들은 원직 복직 없는 타결은 있을 수 없다며 선 조업 무효를 선언했다. 730일에는 경북대에 있었던 지도부들이 다시 굴뚝 농성에 합류함으로써 파업 대오를 재정비하였다. 한편 회사와 막후교섭에서는 임금 한 자릿수 인상, 원직 복직, 무노동 무임금 등이 계속 쟁점이 됐다. 

 

8월로 접어들면서 선 조업책동과 지도부를 연행하려는 5차 공권력 침탈로 투쟁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지만, 전국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87일 대구노련은 전노협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남선물산 파업대책에 관한 건을 안건으로 올렸다. 그간 분산된 지원투쟁을 전노협 차원에서 집결해 노태우 정권의 민중탄압에 맞서는 투쟁으로 발전시켜낼 것을 요청하고, 전노협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이를 승인함으로써 전노협의 대응이 본격화됐다.

 

그리하여 818일 전노협의 배일도 중앙위원과 마창, 부산, 안강, 대구지역 노조 등에서 40여 명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영남권 노조 대표자 기자회견’(60여 개 노조 서명)이 열렸다. 기자회견 뒤 남선물산을 방문해 약식 집회를 하고 영남권에서 남선물산 투쟁에 공동 대응키로 의견을 모았다. 외환은행에 타결을 촉구하고 노조탄압을 중지하라는 스티커 5만 부를 만들어 전국으로 배포했으며, 조합원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파업기금 마련과 투쟁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또한 전노협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는 공동 명의의 포스터 5,000부를 제작, 전국으로 배포해 전노협 사수의 전면에 나선 남선물산 투쟁의 성격을 널리 홍보했다. 829일에는 노동조합·노동운동단체 연석회의가 대구에서 열려 영남권 차원의 남선물산노조 사수 및 노동운동 탄압 분쇄를 위한 영남권 대회개최를 결의했다.

 

한편 남선물산노조 내부에서는 830일 임시총회를 앞두고 회사측의 막바지 공세가 기승을 부리면서 선 조업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자는 분위기까지 조성됐다. 파업이 100여 일 이상 계속되고 타결의 전망은 보이지 않자 농성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조합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미 조업을 저지하기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는 투쟁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민주노조 사수와 무노동 무임금 철폐를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총회에서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결국 총회에서 선 조업주장이 무산되자, 다음 날 곧바로 공권력을 투입돼 굴뚝지도부를 모두 연행했다. 연행과정에서 조합원 배성자가 연행을 막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려 두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 등 많은 사람이 다쳤다. 대구노련은 공권력 침탈에 대한 항의투쟁을 즉각 전개했고, 30여 명의 조합원은 곧바로 경북대에 모여 선 조업을 하더라도 투쟁의 정당성만은 끝까지 사수하자고 결의했다.

 

92일에는 남선물산노조 주최로 지역노동자 2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남선물산 공권력 투입 규탄 및 민주노조사수 결의대회를 열었다. 공권력 투입 이후에도 조합원들의 반발은 계속돼 작업은 다소 늦어졌다. 그러다 상경투쟁으로 구속됐던 최병원 부위원장이 93일 석방돼 직무대행을 맡고 난 후 3사 전체 상임집행위원회 회의를 열어, 97일 총회에서 파업을 철회하고 정상가동과 함께 교섭을 계속 진행키로 했다. 그러나 끝까지 투쟁 의지를 밝힌 조합원 중심으로 새 지도부가 파업투쟁의 정당성을 담은 요구 6개 항을 관철해야 한다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남선물산 내부의 투쟁 동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계획했던 영남권 집회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대구노련이 주최한 99남선물산 파업투쟁 보고대회를 끝으로 1990년 남선물산 임금인상 투쟁은 일단락됐다.

 

한편 대구지역은 상반기 임금인상투쟁을 통해 전노협 사수투쟁의 대리전을 치렀다고 할 만큼 정권과 자본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임금인상투쟁본부를 중심으로 가열찬 투쟁을 벌였지만 40여 명의 지도부가 구속되고 노조가 해산당하거나 대구노련을 탈퇴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선물산 투쟁은 개별 단위사업장의 투쟁을 넘어 대구노련과 전노협 사수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전노협 차원에서 중앙위원회의 결의로 남선물산투쟁 지원을 결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노협은 남선물산 등 장기파업 사업장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서울, 인천, 부천에 각각 지역 차원의 공동투쟁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노협 산하에 장기파업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힘있는 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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