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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동지, 그리고 민주노총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3-05 조회 999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동지, 그리고 민주노총

김예준(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내가 살아온 길을 쓰라고, 내가 살아갈 날이 아직도 많은데?”

현장에 복귀하여 나름 몇 년째 익숙한 현장 노동자 생활을 하는 나에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 인가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살아온 길을 쓰라...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나와서 형제가 몇이고를 쓰라는 것은 아닐 테고...”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대전충남지역 어딘가를 지나다 보면 생각나는 그 투쟁, 그 사람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끼적이기로 했다.

1.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대전 시내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가 꽃병으로 불타고 경찰과 시내 가두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진 날,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는 전경들에게 “쏘지마, 쏘지마”를 외치게 되고(그때 관중석에서 유행하던 구호다) 덕분에 최루탄은 우리 있던 인도 쪽으로 향했다. 옴팍 최루탄을 제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재래시장 안으로 도망쳐 주저앉아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호스를 건네주면서 한마디 하신다. “손으로 문지르지 말고 흘러내리는 물로 씻어” 큰 고무다라에다 민물고기를 담아 파시는 노점 아줌마다. 퉁명한 아줌마의 말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노태우정권 때인 것 같다. 한창 가두 투쟁을 하다 쪽수가 안돼 경찰 경계선을 뚫지는 못하고 그냥 해산 할 수도 없고 해서 도로에 드러누웠다. 모두들 드러누워서 “나 잡아 가라”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빽빽이 포위한 전경 사이를 뚫고 내 머리 밑에 신문지 한 장을 깔아주시던 어떤 할머니, 그분에게서 어머니의 향기를 느끼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96, 97노개투 투쟁 때 밤늦도록 거리에서 가두투쟁을 하는데 최루탄을 쏘는 전경들을 향해 야유하고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던 인도에 선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김대중정권 시절 효성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가두투쟁을 마치고 울산노동자들과 거리행진을 하는데 행진하는 대오에게 일어서서 정말 열렬하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던 노점상 아줌마, 아저씨들의 그 표정을 어찌 잊을까. 태화강에 가자니까 “어디서 왔나”고 물어보고 “민주노총”이라니까 택시비를 받지 않았던 택시노동자의 한마디. “함께 못해서 미안한데 멀리 온 손님한테 택시비를 우예 받습니꺼?”

짧지 않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나의 길엔 언제나 침묵하는 것 같지만 옳고 그름을 정확히 알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냥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우리보다 삶이 더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잘해라” 박수와 환호로 또는 눈빛으로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지지했고 우리를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삶에 있어 항상 큰 힘이 되었었다.

2. 동지들...

동지 1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여진이 남아있던 우리 연구소에 친한 동료가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노동조합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보다 “사실은 우리 연구소에도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하고 자기보고 가입하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원서 있어? 이리 줘봐!” 내가 먼저 사인하자 그 친구의 얼굴이 펴진다. 당시 나는 기획본부에 근무했는데 알고 보니 노조 추진하던 식구들이 기획본부 사람들은 가입대상에서 아예 제외했었다고 한다. 덕분에 기획본부에서는 나만 혼자 가입하게 되고 결국 이듬해 파업을 거치며 나는 노동조합 상근 활동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친구 노래패 활동도 하고 열심히 하다가 IMF때 결국 연구소를 때려치우고 지금은 그럭저럭 잘 나가는 벤처기업 사장이다.


1988년 파업 당시의 모습


1988년 파업 당시 건물 외벽에 내걸었던 현수막


동지 2

전국에서 최초로 골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합법이네 아니네, 지루한 싸움 끝에 실패하고 10년 만에 다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지역본부의 활동역량을 모두 투입하여 파업투쟁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이후 이 노조는 지역 연대에도 활발하게 결합했다.

묵묵히 별로 말이 없던 노조위원장에게서 어느 날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월드컵을 앞두고 “대전시에서 월드컵 경기장 잔디 관리자로 자기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어떡하면 좋겠냐”는 것이다. 이 친구 전공이 조경이었는데 조경하는 사람에게는 꿈이 국립운동장 잔디 관리라는 것이다. 국립운동장 특히 국제공인규격의 축구경기장 잔디관리는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했다. 이직하고 싶은데 조합원들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는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해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 그 동지에게서 전화가 다시 왔다. “안 가기로 했어요. 갈등 많이 했는데 막상 안 간다고 연락하고 나니 무지 마음이 편해요” 그렇게 밝은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듯 했다. 그리나 한 달 후, 그 동지는 다른 사업장 농성 지원을 마치고 모처럼 집에 들어가 자다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3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전국립묘지 앞 유성CC 앞을 지날 때면 항상 그 동지의 밝았던 그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 그가 이직했으면 아직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동지3

농성장에서 나오면서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위원장 주변의 간부 동지들을 지역본부 사무실로 불렀다. “신나 통을 다 치워라, 너무 위험하다. 그리고 위원장 곁에 바짝 붙어서 한시라도 한눈팔지 말고 잘 지켜라” 간부들이 알았다 하고 돌아간 뒤 모처럼 대전으로 나온 김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임신 중인 아내를 직장으로 태워주는 길에 전화가 왔다. “본부장님 이 새끼들이 지금 들어와요. 어어, 어쩌죠, 야 차 돌려막아!!”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던 전화가 끊겼다.

“에이 씨, 집에 들어오는 게 아닌데...” 집 사람을 내려주고 어떻게 차를 몰았는지 모르게 옥천으로 달려갔다. “경찰이 아침에 치고 들어왔어요!”, “위원장이 분신했어요!”, “지금 병원에 있어요!”
당시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차량을 동원하여 기계반출을 저지하기 위해 공장 정문에서부터 진입로까지 막고 있었는데 경찰이 견인차를 앞세워 조합원들의 차량을 견인하자 저지선이 뚫렸고 위원장이 타고 있던 봉고차를 견인하려 하자 차 안에 있던 신나 통을 들이부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봉고차 운전대에 신나통이 걸려서 쏟아지는 바람에 몸에 신나를 들이 붇지 못하였고 함께 붙어 다니던 간부가 위원장이 라이터를 붙이려는 순간 밀어내서 끄집어 내렸다고 한다. 차는 전소되었으나 위원장은 신나에 젖은 발목 아래만 화상을 입었다. 병실에 가득한 경찰들에게 욕설을 해가며 입원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뭐야, 이제 뭐 하는 짓이야, 죽으려고 싸워? 살라고 싸우지, 뭐 하는 거야?” 소리치는 나에게 “여기저길 누구에게 물어봐도 공장이전 투쟁을 막아냈다는 사례는 없다고 하고, 공장이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데 함께 고생하는 조합원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저 기계가 나가면 우린 무너진다는 생각이 드니 자신도 모르게 신나 통을 들이붓게 되었다”고 하며 눈물을 짓는다. 손을 꼭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옥천창 폐쇄, 강제 이전, 불법파업, 공권력투입, 모든 것이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파업유도공작이었음이 폭탄주 처먹은 검찰 스스로의 오만에 의해 밝혀지고 몇 년 후 경산으로 내려갔던 동지들도 다시 부여, 대전으로 올라왔다. 이 동지 전과는 방화범이다.


동지 4

투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투쟁에 최선을 다하자” 조합원에게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저 노조가 싫어 단행한 직장폐쇄 180여 일을 마무리 하고 나자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아예 폐업이다. 그리고 훌쩍 1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나마 연명하던 실업급여 기간은 지난 지 이미 오래, 조합원들은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서울 본조는 이미 조합원이 전원 탈퇴, 복귀하고 사실상 노조 깃발을 내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소주 한잔을 털어 놓고 위원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회장이 저만 관두면 폐업도 안하고 호텔을 정상화할 뿐 더러 노조도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이미 청산 절차 다 들어갔는데 다시 손해 보면서 정상영업하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 조합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요. 조합원 다 뿔뿔이 흩어지고 깃발만 남아서 결국 깨지고 마느니 제가 회사를 관두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단단히 결심을 하고 나온 모양이다. “그렇게 마무리하면 사측은 이후 조합원을 개별적으로 탄압할 것이고 조합원은 패배감에 젖어 결국 노조가 깨지고 만다.”고 설득해도 요지부동이다.

결국 긴급 조합원 간담회를 소집하여 전 조합원이 이 안건을 놓고 토론하여 결정 나는 대로 따르기로 정리했다. 4시간여의 조별 분임토론이 있었다. 위원장이 책임문제를 넘어 어떻게 장기적인 투쟁을 이어갈 것인가에까지 자연스럽게 논의가 되었다. 위원장 책임 문제는 “이 투쟁이 끝날 때까지 함께 가야한다”로 당연하게 정리되었고 조별로 자체적 규율이 보다 유연하지만 강력하게 결의되었다. 그리고 1년 더 싸웠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그 동지, 지금 임기를 마치고 현장에 복귀하여 교대근무하며 폐업기간 동안 낳은 세 번째 아들, 늦둥이 보느라 정신없다.


3. 그리고 민주노총

94년 11월 13일이었나? 민주노총 창립대회를 하던 연세대학교가 생각난다. 잘 짜여진 기념식 행사와 같았던 어떻게 보면 특별한 이견과 마찰 없이 매끄럽고 순탄하게 치러진 대의원대회 내내 그리고 대의원대회를 마치고도 마음이 그렇게 즐겁거나 기쁘지 않았다.

아쉬움 속에 전노협 동지들과 전해투 주점에서 술을 한잔 때리고 전노협 진군가를 부르고 서로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노래를 또 부르고 향한 노천극장에서 만난 빛나는 수만의 눈동자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직 희망과 웃음과 기쁨만이 충만했던 그 노천강당. 정파도 입장도 전노협도 업종도 현총련도 없었던 그 노천강당의 빛나던 눈동자들. 오직 단결만이 있었던 그 자리. 실내에서 매끄럽게 치러진 대의원대회에 민주노총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로 거기에 그 자리에 민주노총의 모습이 있음을 확인하고 벅차올랐던 그 감동.

당시 함께 올라갔던 어느 지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참 역사적인 자리에 우리는 지금 와 있는 것 같아요. 십년 후, 나는 민주노총이 그 전에 합법화 되리라고 보는데, 그때 민주노총을 건설했던 그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씩 웃으며 ‘그때 아빠도 그 자리에 있었단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흘렀다. 엊그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만나 결혼을 하게 된 어느 노동자의 결혼식에 갔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함께 간 아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아내 옆에 있던 어떤 하객이 옆 사람한테 “민주노총 이래” 하더란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표정이 뭐랄까 송충이 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표정이어서 얼굴이 후끈했다고 한다. 지금 나야 노조활동의 전면에서 물러나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니 덜 하지만 요즘 노조 간부, 특히 민주노총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은 참 곤욕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들 지지하고 응원하고 우리에게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탄압 속에서 건설한 민주노총을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조합원들이 있었음을. 수없이 많은 투쟁 속에서 민주노총을 건설했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투쟁이 진행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이 지지와 기대를 철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기대와 바람을 저버린 것임을 반성했음 한다. 또한 우리가 제대로 싸운다면 그들은 항상 우리 편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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