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한국전쟁(5) 옮긴 이: 이영민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속전속결은 어려우니 여유있게 승리를 추구하라.” 세차례 전역에서 연속 승리한 뒤 모택동은 일찍이 예측한 바 있었다. 즉 중국과 북한 대군의 압박에 미군이 반격하지 못할 때였다. 어떤 이는 중조 군대가 미군을 남한에서 물러가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낙관적인 예측이었다. 모택동은 다른 한가지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즉 객관적 형세는 중조군대가 2월 사이에 한차례 싸워야 하였으며 그 뒤 휴식과 정돈을 하게 될 것이었다.(주1) 그 예측은 맞았다. 과연 1월 25일부터 UN군은 서쪽에서 동쪽까지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였다. 지원군과 인민군이 아직 충분한 휴식과 정돈을 하기 전이었다. 중조 군대는 적극방어 성격의 제 4차 전역을 시작하였다. 전역이 시작된 뒤 1월 28일,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4차 전역후 적은 우리와 조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의 담판은 중조 양국 모두에게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적은 지금 인천과 서울을 회복할 양안의 교두보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적이 한강을 봉쇄하고 서울이 적의 위협에 빠진다면 중조 양국은 불리한 처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는 절대 허락하면 안된다.”(주2) 중국 인민지원군은 잇따라 세차례 전역을 진행하였다. 공격하며 너무 피로하였고 병력이 대거 감소하였다. 4차 전역은 적극방어였는데 임무를 완성하기에 난관이 너무 컸으며 병력의 보충이 절실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군사위원회는 모택동의 의견에 따라 2월 7일, 병력교대 작전을 결정하고 실행하였다. 국내부대에서 노병을 뽑아 지원군 병력을 보충하는 방법이었다. 군을 단위로 건제하여 국내에서 한반도 전장으로 이동배치했는데 이것이 병력교대 작전이었다. 병력교대 작전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서 새로 창조한 것이다. 이때 한국전쟁 최전선에 있던 지원군 최고 지휘관 팽덕회는 전장에서 심각한 형세와 곤란을 직접 목격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로 투입될 병단이 아직 압록강변에 있었다. 자연히 병력보충을 하지 못해 다급해 하였다. 그는 모택동에게 상황을 직접 보고하고 전략방침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월 21일, 팽덕회는 북경에 가서 급히 신육소(중공 중앙이 북경에 세운 6동의 건물이다. 모택동, 유소기,주은래등 중공 5대 상임정치국원 5명과 근무인력이 나누어 입주했다. 역자 주)로 갔다.(주3) 56쪽 신육소는 북경성 서북쪽 교외에 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외졌으며 건국초기 모택동이 늘 이곳에서 쉬면서 업무를 보았다.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쟁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고 병력부족 및 보급문제를 부각시켜 제기했다. 모택동은 진지하게 생각한 뒤 팽덕회에게 제안했다. “조선전쟁은 빨리 이기기 어렵다. 속승이 어렵다면 천천히 이겨야 한다. 급해지면 안된다.”(주4) 이것은 팽덕회에게 계기를 잡을 여지를 준 것이었다. 팽덕회는 한국전쟁에 확실하고 유연한 방침이 있다고 느꼈다. 이 방침은 모택동이 3차 전역이 끝난 뒤 얼마되지 않아 했던 낙관적인 예측과 다른 것이었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으며 신속하게 방침을 조정했다. 정확하게 결단했으며 그것이 바로 영명한 점이었다. 팽덕회는 또 모택동에게 모안영(毛岸英)이 희생된 과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자책하는 심정으로 “주석,당신은 안영을 내게 딸려 조선 전선에 보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일했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과 은래 동지가 몇 번이나 총사령부는 방공에 조심하라고 한 지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영과 고급참모가 불행하게 희생되었으니 나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와 총사령부 동지들은 지금 매우 비통합니다.”(주5) 모택동은 듣더니 한동안 침묵했다. 모안영은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지원군 총사령부를 따라 북한에 들어갔다. 그는 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번역과 기밀공작을 맡았다. 모택동은 그에게 무한한 아버지의 정을 보였다. 모택동은 아들을 사랑해서 커다란 기대를 가졌지만 그가 자신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라 당에 소속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인민에게 소속되었으며 당연히 조국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0년 11월 25일, 2차 전역이 시작되던 그날 세대의 미군 B-29형 폭격기가 지원군 사령부가 주둔한 곳 상공에 나타났다. 비행기는 하늘을 스쳐 지나가며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 방공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 적기는 갑자기 기수를 돌려 지원군 사령부가 있는 곳에 몇십개의 네이팜탄을 떨어뜨렸다. 작전실은 불바다가 되었으며 마침 실내에서 당직을 서던 모안영은 젊은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팽덕회는 그날 특별히 중앙 군사위원회에 보낼 보고서를 썼다. 짧은 전문이었지만 한시간 넘게 썼다. 전문이 주은래의 손에 들어왔다. 주은래는 그것이 모택동에 커다란 타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택동이 전역을 지휘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보를 잠시 넣어두었다. 1951년 초하루가 지난 뒤 1월 2일, 그는 비로소 전문을 모택동과 강청에게 보내 보게 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안영 동지의 희생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때 나는 당신들이 모두 감기에 걸려 있어 전보를 잠시 넣어 두었다.”(주6) 주은래의 편지와 팽덕회의 전문은 기밀비서 엽자룡(叶子龙)이 모택동에게 전해 주었다. 그때 모택동은 마침 사무실에 있었다. 편지와 전문은 모두 길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오래도록 그것을 보고 또 보았다. 엽자룡은 줄곧 조용히 옆에 서있을 뿐이었다. 모택동은 비통한 심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한마디했다. “휴! 전쟁을 하면 언제나 죽고 다치기 마련이다. 괜찮다!”(주7) 양상곤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안영의 부고를 오늘 이득승(李得胜)(주8)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정송운(程颂云)등을 회견한 뒤 이 소식을 말해 주었다. 길게 탄식하더니 그가 말했다. “희생된 사람이 수천 수만이다. 그 한 사람만 배려할 수는 없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야기할 필요없다.” 위대한 정신이다. 하지만 실제로 받은 타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골에 가서 쉴 뜻이 있다.”(주9)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모안영 열사와 많은 지원군 열사는 같이 북한 국토위에 잠들어 있다.(주10) 중조 인민 우호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때 팽덕회가 보고하는 것을 들은 뒤 그를 바라보았다. 팽덕회는 내심 불안했을 것이다. 모택동은 그를 달래며 말했다. “전쟁을 하면 늘 죽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이미 수많은 지휘관과 전사들의 생명을 내놓았다. 안영은 보통의 전사이다. 내 아들이라고 해서 큰 일로 여길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듭 당부했다. “지금 미국이 조선 전장에서 각종 비행기 약 천여대를 사용하고 있다. 당신들은 절대로 소홀히 여기면 안된다. 사령부의 안전을 보장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주11) 2월 25일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와 팽덕회는 공동으로 군사위원회 총사령부 책임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각 대군구 부대를 순서대로 북한에 입국시켜 참전시키는 문제와 지원군 물자 보급문제를 토론하였다. 이날, 양득지(扬得志)를 19병단 사령원으로 임명하여 2번으로 북한에 입국하여 참전토록 하였다. 3월 18일, 진갱(陈赓)을 3병단 사령원으로 북한에 들어가 참전하게 하였다. 3월 1일, 주은래는 모택동 대신 전문 한통을 기초하여 스탈린에게 보냈다. 한국 전쟁 전황 및 지원군이 순번제로 병력교대작전을 채택한 내용이었다. 이 전문을 모택동이 고친 뒤 보냈다. 전문에서 “현재 조선 전장에서 최근 진행된 전역-4차 전역을 가리킨다. 인용자 주-에서 살펴보면 적을 대거 섬멸하기는 어렵다. 조선에서 몰아내기도 어렵다. 대부대가 적을 섬멸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조선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우리는 2년 정도 전쟁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적의 의도를 분쇄하고 장기간 작전으로 차츰 적을 섬멸해야 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 중국 인민지원군은 순차적으로 병력을 교대하는 작전방침을 채택하였다.” “총괄하면 미국은 계속 작전하는 것을 견지하고 있다. 미군은 계속 대량보충을 할 수 있고 준비해서 아군을 장기적으로 소모시키는 형세이다. 아군은 반드시 장기적 작전을 준비해야 한다. 그 몇년 동안 미국은 몇십만명을 소모시켜야 한다. 그래서 어려움을 깨닫고 물러나게 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조선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기록했다. 마지막 단락은 모택동이 가필한 것이었다. 전문은 다시 덧붙였다. 팽덕회는 소련이 가능한 빨리 공군을 파견하여 중국과 북한 군대의 후방선을 엄호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주12) 3일 스탈린이 회신 전문을 보냈다. 소련 공군 2개 전투비행 사단을 파견, 북한 경내에서 작전하는데 동의하며 중조군대 후방을 엄호하겠다는 것이었다. 3월 7일, UN군은 20만명이 넘는 병력을 집중하여 모든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항공기 수백대의 지원을 받아 중국과 북한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중조 양국군은 잇따라 저항하며 반격했다. 13일, 양국군은 스스로 서울에서 철수했다. 3월말이 되자 전선은 점점 삼팔선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중조 양국군이 완강히 저항하여 적들도 더 이상 전진하기는 어려웠다. 4월 21일, 4차 전역이 끝났다. 이번 전역은 87일간 진행되었으며 적 7만 8천명을 섬멸했다. UN군 공격을 삼팔선 부근에서 저지하였다. UN군은 한반도 전장에서 잇따라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통치집단내 논쟁을 유발시켰다. 특히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사이에 갈등으로 트루먼은 부득이 지휘관을 경질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4월 11일, 4차 전역이 진행되는 가운데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미군 제 8집단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UN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세차례 전역은 전략적 공격이었고 4차 전역은 적극방어전이었다. 중조 양국군대와 미군을 위주로 한 UN군 사이에 잇따라 힘겨루기가 이루어졌다. 모택동은 한국전쟁의 법칙에 대한 생각이 점점 깊어졌다. 장기작전 준비를 할 필요가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총괄적 지도방침을 개괄했는데 “전쟁을 길게 보고 준비하지만 가능한 단기간에 마친다.”는 것이었다. “하나씩 캐러멜을 빼앗아라.” 4차 전역 기간에 미국은 한반도의 잘룩한 허리 부분에 새로운 방어선을 설치하려 했다. 중조 양국 군대의 측후방에 상륙하여 정면공격과 호응하려는 것이었다. 남북협격으로 양국군을 허리의 북쪽으로 내몰려는 기도였다. 적의 이런 계획을 분쇄하기 위해 중조 양국군은 4월 22일 제 5차 전역을 시작했다. 이때 중국 인민지원군중 두 번째 순서로 북한에 들어온 19병단과 제 3병단등 모두 6개 군이 전장에 도달하였다. 원래 북한에서 작전하던 9개군등 모두 15개군 약 백만명 병력이었다. 제 5차 전역의 규모는 매우 컸다. 적과 아군 쌍방 병력이 모두 백만에 이르렀다. 하지만 UN군은 무기와 장비면에서 우세를 보였다. 그들은 기술이 우수한 장갑병,포병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제공권과 기동성에서 강력했다. 지원군은 미군 1개 연대정도 규모의 병력에 대하여 여러차례 포위공격을 진행했으나 시종 섬멸하기 어려웠다. 많아야 1개 대대를 섬멸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국내전쟁 특히 해방전쟁 후기 상황과는 크게 달랐다. 그때 인민해방군은 흔히 적 정편 사단 또는 정편 여단에서 몇 개 사단, 몇 개 여단까지 섬멸하곤 하였다. 지원군 총사령부와 모택동은 이런 상황에 주목했다. 1951년 5월 26일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전문을 보내 지시했다. “지난 몇차례 전역이 증명하고 있다. 아군이 실행했던 적을 크게 우회하는 전략, 혹은 전역에서 첫 번째는 미군 몇 개 사단을 포위하였고 또 1개 정편 사단, 심지어 정편 연대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모두 섬멸하기는 어려웠다. 이것은 미군이 현재 완강한 전투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의 이런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마지막에 적을 크게 포위 섬멸하기 위해서는 작전때마다 크게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아군이 한번 작전때마다 미군이나 영국군, 터키군 1개 대대, 많아야 2개 대대를 섬멸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주13) 모택동은 전문에서 이렇게 요구했다. “현재 미영군을 공격할 때 전술적 소포위와 적은 규모의 적을 섬멸하면 된다. 소섬멸전을 거쳐 대섬멸전으로 나아가면 된다.” 이튿날, 5월 27일이었다. 모택동은 지원군 참모장 해방(解方 1908-1984. 개국시 소장)과 3병단 사령원 진갱 -6월 1일 지원군 제 2부사령원으로 임명되었다.-을 불러 회견하였다. 그는 거듭 이 작전방침을 밝혔는데 이 방침을 ‘캐러멜 뻬앗기’라고 불렀다. 그는 “군은 한번 작전할 때마다 적 1개 대대를 깨끗히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모택동은 덧붙여 당부했다. “조선 전황이 길어지고 힘겨워질 것이다. 전체 간부와 전사들은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사상적 준비를 해야 한다.”(주14) 6월 3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이 작전방침 및 전황에 대한 예측을 더 분명하게 설명했다. “아군의 기술조건이 적에 비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조선을 빨리 해방시킬 방법은 없다. 그래서 장기적 전쟁방침을 결정하였다. 즉 적을 점차 약화시키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후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 적은 현재 화력이 강할뿐 아니라 전투의지도 약화되지 않았다. 아군은 과거 크게 포위하는 방법을 구항하였다. 그래서 처째 적 1개내지 몇 개 정편 사단의 섬멸을 목표로 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적 몇 개 중대 혹은 한 두개 대대를 포위 섬멸할 기회는 비교적 많았다. 그래서 아군은 현재 할 수 없는 일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대규모 섬멸전을 기도해서도 안된다. 조심하며 계획하고 기회를 찾아야 하며 소규모 섬멸전을 많이 해야 한다. 아군은 매번 공격할 때마다 전투원이 자신의 7일치 식량과 탄약을 휴대할 수 있었다. 그것을 다쓰면 멈추고 보급을 기다려야 했다. 만약 적을 섬멸하지 못하면 부득이 철수해 돌아와야 했다. 그것은 적이 대규모 공군으로 아군전선의 가깝고 먼 후방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우리 차량은 대부분 피격당해 부서져 식량과 탄약을 보내오기 어렵다. 적은 이미 아군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아군이 전진할 때 그들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한다. 아군의 식량과 탄약이 다되기를 기다려 반격하는 것이다.”(주15) 위 설명에서 보면 모택동이 한국전쟁을 총괄하면서 전쟁 정황에 대한 생각이 제고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는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낼 때 이미 5차 전역의 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 5차 전역은 6월 10일 끝이났다. 5차 전역에서 적 8만 2천여명을 섬멸했으며 5개 전역가운데 적을 섬멸한 숫자가 가장 많았다. 또 전선을 삼팔선 부근에서 안정시킨 전역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은 서로 대치단계에 들어갔다. 후미를 단단히 하다. 중국 인민지원군이 집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에 들어가 참전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군중들이 항미원조 운동을 맹렬하고 길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지원군의 작전을 힘있게 지원하고 국민경제 회복과 다른 일을 촉진시켰다.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 들어가 참전한다는 결정은 중공 중앙이 1950년 1월 26일 발표하였다. 모택동이 심사하고 수정한 ‘시사선전에 관한 지시’가 그것이다. 곧바로 전국에서 항미원조의 선전열기가 솟구쳤다. 인민들은 행진하거나 집회를 여는등 여러 형식으로 미국의 침략행위에 대한 의분과 지원군에 대한 굳센 지지를 표현했다. 선전운동은 도시의 길거리나 시골마을, 가정에서 벌어져 집집마다, 심지어 부녀자와 어린이까지도 다 알게 되었다. 당과 국가의 의지가 인민군중의 자각적인 행동으로 빠르게 변하였다. 11월 4일,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중국 민주동맹등 11개 민주당 및 단체들은 연합선언을 발표하였다. 항미원조 운동을 고조시키려는 것이었다. 연합선언은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조선의 존망과 중국의 안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문이 부서지면 안채가 위험한 것이다. 중국 인민이 조선 인민의 항미전쟁을 계속 지원하는 것은 도의적 책임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체 인민의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또 스스로를 지킬 필요에 의해 결정한 것이다. 이웃을 구하는 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것이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선 인민을 지원해야 한다.”(주16) 11월부터 천진,상해,북경,심양,중경,광주,무한,남경,항주,계림,청도 등 여러 곳의 상공업 인사들이 잇따라 항미원조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는 애국공약을 제정 발표했다. 그 내용은 “세금을 미납하지 않고, 탈세하지 않으며, 투기하지 않고, 폭리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생산증가에 노력하고, 물자를 소통시키며, 공급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항미원조에 힘을 보태어 공헌한다는 것이었다. 11월 30일, 천진시 공상업계의 ‘항미원조및 가정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시위행진대회’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전국 각계층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함께 항미원조 및 가정과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끝까지 분투합시다.” 모택동은 12월 2일 천진시 상공업연합회 주임위원 이촉진(李烛尘)등에게 회신 전문을 보냈다. 그들의 애국에 대한 입장을 환영하고 전국의 항미원조 운동을 십분 긍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국의 노동자, 농민, 지식인 및 상공업계등 모든 애국자들은 일치단결하여 미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것은 완전히 올바른 것이다. 나는 전 중국의 모든 애국적 상공업계가 인민대중과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과거보다 더 튼튼하게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중국인민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신성한 투쟁가운데 반드시 마지막 승리를 할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주17) 전국 각계 군중들은 항미원조 운동을 하며 높은 애국적 열정을 드러내었다. 당시 나라가 막 장기전쟁에서 회복되어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매우 낮았다. 하지만 1951년 6월 1일부터 시작된 전국규모의 ‘비행기와 대포 헌납운동’이 고조된 이후 수많은 군중들이 의식비용을 절약하여 헌금을 냈다. 1952년 5월말, 전국 인민들이 1년동안 헌금한 총액이 전투기 3,710여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 되었다. 동원체제에 들어간 중국 인민들의 충분한 역량을 보여준 것이다. 1951년 4월, 중국 인민지원군 전투영웅이 돌아와 항미원조 보고를 시작했다. 이 보고는 국내 수많은 중국인민들을 북한 입국 위문단으로 조직하였다. 지원군 영웅들의 행적은 전국 인민들을 교육했으며, 전국 인민들의 위문은 지원군 장병들의 투지를 고무시켰다. 장기간에 걸친 혁명투쟁의 굴곡가운데 모택동은 하나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조건에서도 나쁜 일을 충분히 좋은 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커다란 적이 국경에 쳐들어오면 국난극복을 최우선으로 둔다. 왕왕 민중을 각성시킬 수 있으며 민중을 조직하여 각 혁명사업을 추동하고 발전시켜 강력한 힘이 되게 한다. 전국 규모의 항미원조 운동은 이것을 재차 증명하여 주었다. 국민경제 회복은 시기를 놓치거나 지연되지 않았다. 오히려 항미원조 운동과 동시에 진행된 토지개혁 운동, 그리고 반혁명 운동을 진압하며 추진하여 새로운 생기를 얻게 되었다. 1951년 10월 23일, 항미원조 1주년을 즈음하여 모택동은 전국정치협상회의 1회 3차 회의에서 개회사를 하며 선언하였다. “우리의 금융과 물가는 계속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경제건설 사업과 문화교육 사업을 회복하는 일도 큰 걸음을 내딛으며 전진하고 있다.”(주18) 주1) 모택동이 팽덕회를 통해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 1951년 1월 14일 주2)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1월 28일 주3)‘양상곤 일기, 1951년 2월 21일 주4) ‘팽덕회 자서전’인민출판사 1981년 12월판, 제 261쪽 주5) ‘팽덕회 전기’ 당대 중국출판사 1993년 4월판, 제453쪽 주6) 주은래가 모택동과 강청에게 보낸 편지, 1951년 1월 2일 주7) 엽자룡을 방문할 때의 기록, 1996년 5월 27일 주8) 이득승은 모택동이 1947년 섬북을 전전하며 싸울 때 쓰던 다른 이름이다. 주9) 양상곤 일기, 1951년 1월 2일 주10) 1958년 7월 22일, 모택동은 중국주재 소련 대사 유진(Ambassador Eugene)을 회견할 때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원은 죽는 곳에 묻는 것이다. .... 내아들 모안영도 조선에서 죽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시신을 운구해 오자고 하였다. 나는 필요없다. 죽은 곳에 몯어라! 하고 말했다.” 주11) ‘팽덕회 전기’ 당대중국출판사 1993년 4월판, 제 453-454쪽 주12) 주은래가 기초하여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1951년 3월 1일. ‘주은래 군사문선’ 제 4권, 인민출판사 1997년 11월판, 제 162,164쪽 주13)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5월 26일 주14) 해방이 지원군 당위원회에게 보낸 전문에서 인용, 1951년 5월 27일 주15)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1951년 6월 3일 주16) 1950년 11월 5일 ‘인민일보’ 주17) 모택동이 이촉진등에게 보낸 전문, 1950년 12월 2일, 1950년 12월 3일 ‘인민일보’ 주18) 1951년 10월 24일 ‘인민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