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라면 노동자의 기억 우리는 실험쥐가 아니다. 밥, 밥, 밥을 달라! (2편)
* 1987년 8월 14일 새벽 5시, 어둠이 걷힌 안양공장 식당 앞 공터에는 십여 명의 아가씨들만 서성였고, 회사 관라자들은 그들을 에워싼 채 해산을 종용했다. 거기에는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몇몇 노조 간부들도 있었는데, 팔짱을 낀 채 냉소의 빛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남성 노동자들은 쭈뼛거리며 라면간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줄지어 왔던 라면 3과의 아가씨들은 공터의 썰렁한 분위기에 실망한 듯 제품창고 모퉁이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주동을 했다는 김준태는 커녕 남성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앉자.” 누군가의 제안으로 서성이던 아가씨들이 줄지어 앉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일순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손뼉을 치며 합창이 이어졌고 인원도 하나 둘 불어났다. 라면을 먹고 식당을 나서던 남자들도 호기심에 하나 둘 몰려들었다. 스낵1과 포장실 대의원인 인자와 라면1과 포장실 대의원인 경화가 앞에 나서 줄을 맞추고 노래를 지휘하고 있었다. 아파트, 소양강 처녀 등 여럿이 부르기 좋은 대중가요들이었다. 새벽 6시가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급격히 불어났다. 이미 전 공장의 분위기가 흉흉해 정상적인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불법농성이라며, 작업장 무단이탈이라며 현장으로 돌아가 작업을 할 것을 종용하던 관리자와 노조 간부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관리자들은 출입문을 걸어 잠근 채 잔업자들을 서둘러 퇴근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와 친인척이거나 반장과 가까운 일부 조합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농성장으로 합류했다. 정문 앞으로 가자는 누군가가 외침에 대열은 물이 흐르듯 정문으로 이동했다. 인원은 정문을 가로막고 횡대로 앉았다. 관리자들의 회유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견제할 겸 주간 출근자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새 좌우 양 옆 공장과 길 건너 대한전선 공장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박수로 환호했고 더러는 주먹을 불끈 쥐어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하나같이 ‘임금단협 완전쟁취!’가 박힌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모습들이었다. 덩달아 여기저기서 함성과 함께 주먹이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고 더러는 목이 메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었다. 대부분이 한 달 가까이 파업 중인 공장들이었다. 이러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듯, 본관 건물 1층의 커튼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지켜보던 관리자들도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 “우리는 실험쥐가 아니다. 밥, 밥, 밥을 달라!” 손뼉을 치며 노래를 하다 힘이 부치면 구호가 이어졌다. 누군가가 선창을 하자 우렁찬 합창이 뒤따랐다. 일주일 중 6일이 라면점심인 것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포장작업 중 파손품이나 반품으로 돌아와 사료로 파는 라면 중 골라 끓여주는 것이다. 하루 12시간 2교대 근무다보니 간식까지 하루 2끼를 먹었다. 그러다보니 라면을 먹고 나오는 대로 의무실에 들러 소화제인 노루모를 타먹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종종 동이나 의무실 근무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더러는 굶고,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마저도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으니 억지로 먹는 것이다. 주간 끝난 주 일요일 아침 출근해 야근인 월요일 아침 퇴근하는 등 기계정비와 점검 등으로 휴일근무가 필수인 공무과의 경우는 하루 4-5끼까지 먹는 것이다.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조합원들과는 달리 나는 쇄도하는 구호들을 정리하고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구호들은 한도 끝도 없었다. 나는 라면박스 뒷면에 매직으로 쓴 구호들을 적어 앞으로 보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일당 5백원이 웬 말이냐, 인간답게 살아보자!” 8% 임금인상이 되었다지만 아가씨들의 경우 인상분이 하루 5백원에 불과함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손뼉은 어느새 주먹으로 바뀌어 있었다. 앞의 진행자 몇몇이 주먹을 쥔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솟구치자 일순에 바뀐 것이다. 미리 미리 연습을 한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일사 분란했다. 그러자 분위기 또한 조금은 맥빠진 듯 하던 좀 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하늘을 찌를 듯 사기충천했다. 대충 어디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만 알뿐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는 옆 사람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친근감이 들었고 이산가족처럼 부둥켜안고 뜨거운 포응을 하고 싶기도 했다. 턱없이 가슴이 벅차고 목이 메어 눈물이 삐져나올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벅찬 감정이었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자고, 8시간 쉬고 싶다!” 하루 12시간 2교대를 하루 8시간 3교대로 바꾸자는 얘기였다. “대의원만 수표 받냐? 조합원도 수표 받자!” 대의원들이 노조위원장을 뽑다보니 남자들에서는 백지수표가. 대다수가 미혼인 여성대의원들에겐 냉장고와 장롱이 오고가는 금권 타락선거를 꼬집은 얘기였다. 몇 차례 그런 즉흥적인 구호가 끝나자 공무과 대의원인 정동철이 빨간 메가폰을 들고 앞에 나섰다. 회사에서 민방위 훈련이나 예비군 훈련 때 사용하는 것인 듯 시도 때도 없이 빽빽거리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거였다. 그러나 메가폰은 이내 찬밥 신세가 되어 한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손나팔이 마이크를 대신했다. “여러분, 피곤하죠?” “아니요.” “졸리지 않아요?” “아니요.” 발악 같은 대답이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퍼붓는 불볕 햇살에 안 그래도 묵지근한 눈두덩이 까부라졌지만 대답만은 하늘을 찌를듯했다. 그야말로 악이고 깡이었다. 그러면서도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 파업이 아니라 무슨 축제가 아닌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렇게 앉아 노래나 하고 구호나 외친다고 우리의 요구조건이 달성되는 게 아닙니다. 파업지도부를 구성해 모든 일들을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추천이 들어왔다. 각 과별로 한명씩 추천을 받아 파업지도부가 구성되었다. 모든 일들은 파업지도부에서 논의 결정한 후 중요 문제는 조합원 전체총회의 인준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0명의 파업지도부 중 성정숙과 정동철 등 5명은 협상대표로 송인자 이경화 등 5명은 파업의 대열을 이끌기로 했다. 어느 쪽이나 시말서 동지들이 절반 가까운 숫자였다. 식사 제공은 논란 끝에 회사 측에 요구하기로 했고, 위원장을 비롯한 어용노조집행부 즉각 퇴진과 노조위원장 직선제 즉각 실시, 추가 임금인상 등 10가지의 요구사항이 결정되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 뿌듯한 내용들이었다. 라면박스를 뒤집어 매직으로 휘갈겨 쓴 요구사항이 공장 담벼락에 걸려 있었고 업무부장이 정신없이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규찰대도 각과별로 구성되어 정문과 외곽초소의 보초가 세워졌고 공무부서에서는 천막과 대형 선풍기, 마이크 등을 설치했다. 어디서 난 건지 그럴듯한 앰프도 등장했고 프로그램도 시간별로 기획되어 발표되기도 했다. 밤잠을 못 잔 조합원들을 감안해 또 조합원들의 적당한 흥미 유발을 위해 주로 노래와 구호 제창, 과별 장기자랑, 노래 배우기 등 가볍고 다양한 내용이었다. 특히 자동정비반(자동포장기 정비반)원들의 열성적이었다. 평소 아가씨들과 함께 포장실에서 작업을 해온 동병상련 탓일까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이크를 설치하고 천막을 치는가하면 아가씨들 속에 섞여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사람들의 콧등을 시큰하게 했다. 공무과 소속이지만 생산과에 파견돼 라면과 스낵자동포장기를 정비해 실과 바늘과도 같은 사이인 탓이었다. 그런 모습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스낵1과 대의원인 송인자가 마이크를 잡고 앞에 나섰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말 불순단체에서 의식화 교육을 받은 불순분자들의 선동과 협박에 못 이겨 파업에 참석했나요? 참석할 생각이 없는데 선동과 협박이 무서워 참석했나요?” 역시 발악 같은‘아니요’였다. 그러자 잠시 숨을 고른 인자가 제법 진지한 빛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조용히 뒤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참석하기 싫은데 집에 가서 자고 싶은데 누군가가 선동해서 아니면 협박해서 어쩔수 없이 참석하신 분이 있다면 조용히 뒤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마음 편하게 나갈 수 있도록 우리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을까요?” 역시 발악 같은‘아니요’가 울려 퍼졌다. “놀라지 마세요. 22년 전 서울공장 하나뿐인 공장이 지금은 안양, 부산, 안성 등 6군데로 늘어났습니다. 안양공장만 해도 5년 전 3개이던 공장이 7개로 늘어났습니다. 스프, 스낵 재료의 가공은 물론 포장지 박스공장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직접 만들어 쓰고 있는 겁니다. 알짜배기 장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새삼스러운 듯 조합원들은 술렁였다. 그저 멍하니 연단을 응시할 뿐이었다. “같이 땀 흘려 일했으니 혼자만 먹지 말고 우리도 좀 달라는 얘깁니다. 우리만 달라는 게 아니라 사장님, 부장, 과장님들과 함께 나눠먹자 이 말입니다. 말로만 장사 잘 됐다고, 돈 많이 벌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또 허구한 날 공장만 짓지 말고 우리도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식구끼리 돼지고기라도 사 먹게 해 달라 이 얘깁니다. 술김이 아니라 맨 정신에 퇴근하며 태권브이 로봇이라도 하나 사 들고 들어가 모처럼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위신 좀 세우게 해달란 얘깁니다. 이제 1등 라면회사가 됐으니 소처럼 기계처럼 일만 시키지 말고 웃으며 즐겁게 일할 수 있게 해 달라 이 얘깁니다. 그래야 N라면에 다니는 재미도 있고, 회사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 더욱더 열심히 일을 할 것 같다 이 말입니다. 이게 불순분자들의 선동과 협박을 받고 하는 겁니까? 내 말이 틀렸습니까?” “옳소!” 벽력같은 화답이었다. 더러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는 소리까지 들리기도 했다. “여러분? 고개를 잠시 오른쪽으로 돌려 제품장고 위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쓰여 있죠.”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 일을 내일처럼.” 착한 유치원생들처럼 합창이 이어졌다. “더도 덜도 말고 저렇게만 해 달라는 얘깁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정말로 관리자들이 근로자를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해주고, 우리들 역시 공장 일을 내일처럼 즐겁게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 아마 현장에 지금처럼 허구한 날 유행가를 틀어대지 않아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할 것입니다. 작업분위기도 좋아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힘든 줄을 모르고 오히려 즐겁게 또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럼 일하는 사람도 좋고 일을 시키는 사람들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공장 일을 내일처럼’만 강조하지 말고‘근로자를 가족처럼’도 강조를 해 달라 이 얘깁니다. 우리도 공장 일을 내일처럼 할 테니 관리자들도, 회사에서도 근로자를 가족처럼 대해달라는 얘깁니다.” 서러움에 목이 메이는 듯 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바로 이래서 우리는 파업을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파업을 해도 제대로 해야 하고 싸워도 하나로 똘똘 뭉쳐 제대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관리자들 눈치나 보며 뒤로 꽁무니만 빼면 커튼속의 관리자들이 볼 땐 정말로 불순분자들의 선동과 협박에 못 이겨 참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마지못해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면 조금만 시간을 끌면 지칠 걸로 알고 분열작전이나 시간 끌기 작전으로 버틸지도 모릅니다. 회사대표들이 깜짝깜짝 놀라도록 본관 2층 협상장까지 우리들의 분노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지 않으면 회사대표들은 우리 대표들을 무시할 것이고, 주더라도 쉽게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우리들을 계속 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로 똘똘 뭉친 무서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회사에서는 하루 빨리 협상을 끝내려고 서두를 것이고, 이후에도 우리들을 호락호락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일하는 기계나 소가 아니라 밟으면 꿈틀대고, 화나면 무서운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관리자들과 쌍안경이 커튼속에 숨어 계속 감시를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거의 동시에 조합원들의 고개가 대열 뒤로 향했고, 돼지새끼처럼 꽁무니만 빼며 물의 기름처럼 겉돌던 남자들이 비실비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 왔다기보다는 몇 발짝 들어와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며 악을 쓰는 여자들과는 달리 자동정비반 남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처음부터 정말로 불순분자들의 선동이나 협박에 못 이겨 참석한 듯 대열 끝이나 옆으로 꽁무니를 뺀 채 구경만 하던 터였다. 아가씨들 속에 섞여 열심히 외치자니 자신도 없거니와 반장이나 관리자들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반장들처럼 아예 코빼기도 안 비치자니 그것 역시 눈치가 보였을 터였다. 그러니 남자들에게 가위를 하나씩 사 주자는 몇몇 아줌마의 모욕적인 야유를 받으면서도 히죽거리며 좀체 대열 안으로 들어오질 않았던 것이다. 꼭 앞에서 잡아끌면 끌수록 뒤꽁무니를 빼는 돼지였다. * 마이크를 인자에게 건넸다. 인자는 그간 노래박스를 만든 듯 매직으로 노래가사가 빽빽이 적힌 긴 라면박스를 들고 있었다. 라면박스를 터 길게 한 후 인쇄가 안 된 뒷면에 적은 것으로 낯선 가사로 보아 노동가인 모양이었다. 한쪽에 그런 노래박스가 3-4개는 더 있었다. “노래 한곡 배워볼까요? 이 노래는 소처럼 기계처럼 일만 시키는 사장님들의 부당한 처우에 항거해 1970년 11월 13일 20세의 나이에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당시 전태일 열사가 일하던 청계천 평화시장 주변의 하루 하숙비는 120원이었고, 전태일 열사는 일당 50원을 받으며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5시간 일을 했다고 합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몸을 이끌고 수십 미터를 달려가면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다 쓰러져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노래를 배우시겠습니다.” * 그때 고3이던 우리도 교실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으로 머리 위를 선회하며 전단지를 뿌려대고, 마이크로 해산을 종용하는 헬리콥터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독재타도를 외쳤었다. 선배들이 따라오라고 해서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나갔을 뿐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도 하니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또 솔직히 공부보다 재미도 있었다. 그 무렵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이 하숙비의 반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 15시간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20세의 생때같은 젊은이가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 상태로 내달리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쓰러져 갔을 줄은 더더욱 몰랐었다. 그가 하나뿐인 몸을 헌신짝 버리듯 한 20세 때 나 역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작은 공장을 전전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실습기간이 끝나면서 어린 두 조카와 함께 4식구가 사는 작은형의 단칸방에서 탈출했으나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봉천동의 작은 형님네로 들어가야 했다. 4명이 한방을 쓰는 하숙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몇몇 공장을 전전했지만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으며 사는 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곳에서도 정을 붙이지 못한 채 시골을 오르내리며 홍길동처럼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해 식구들을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첫 숟갈에 배부를 순 없는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다. 꿈과 희망은커녕 더듬이 잘린 곤충처럼 방향을 잃은 채 허우적거릴 때였다. * 노래강사들의 몇 차례에 걸친 시범에 이어 한 소절씩 따라 불렀지만 나는 자막처리가 잘못된 영화를 보는 듯 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노래 가사와는 상관없이 1970년 나의 모습이 비치는가 하면 복잡한 평화시장에서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지친 모습의 젊은이들이 얼씬거렸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불이 붙은 몸으로 청계천 거리를 내달리며 절규하는 앳된 노동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왔고, 또다시 20세 때 하숙방에서 하숙비를 내고 난 뒤 텅 빈 월급봉투를 쳐다보며 절망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월급을 받은 그날부터 다음 월급날을 기다려야 하는 마음은 소태를 씹는 기분이었다. 같이 하숙을 하는 형들 역시 몇 년씩 근무했지만 도토리 키 재기니 월급날이면 장가갈 걱정과 함께 다른 직장으로 옮길 궁리에 들리느니 한숨소리뿐이었다. 한 달 두 달 월급날이 지날 때마다 같이 입사했던 학교 친구들이 하나 둘 그만 둬 거의 다달이 송별식을 하는 기분 역시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노래는 추모곡답게 절절한 가사만큼이나 처연해 분위기는 말 그대로 추모식을 연상시켰다. 인자를 비롯한 노래 강사들의 붉게 물든 눈자위와 짓씹은 어금니에 전염된 듯 조합원들도 대부분 눈시울을 붉힌 채 어금니를 짓씹으며 웅얼거렸다. 새삼스레 노래의 가사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잡고 있던 노래박스는 어느새 끈으로 엮여 삼각형으로 묶인 각목에 그럴듯하게 걸려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노래괘도였다. 지금도 가슴속에 파고드는 소리, 전태일 동지의 외치던 소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 외치던 그 자리에 젊은 피가 흐른다, 내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 어디에, 다시는 없어야 할 쓰라린 비극. 들을수록 절절한 노래였다. 남의 노래가 아닌 바로 우리들의 노래임을 실감할 수 있는 노래였다. 또 하나 늙은 노동자의 노래가 끝나자 공무과의 대의원인 정동철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앞으로 나왔다. 파업지도부와 노조 집행부의 회의 결과였다. 회사측에서 빨리 협상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과 현 노조위원장은 법적인 대표인 점을 감안해 교섭대표로서 참석은 하되 발언권은 없으며 빠른 시일 내에 조합원들의 적접선거로 위원장 보궐선거를 치른 후 현 노조집행부는 즉각 퇴진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