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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노협 창립대회(1990년 1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0-01-22 조회 643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

 

시기 : 1990122

 

 

전노협건설 준비소위원회의 활동

 

19881222~23일 이틀간 열린 1차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에서 전국조직 건설을 결의하고, 1989223~243차 전국회의에서 산하에 전노협건설준비소위원회(전노협준비소위, 위원장 황재철 인노협 의장)를 설치했다. 전노협준비소위는 지역과 업종협의 대표성을 고려해 수도권 2, 중부호남권 1, 업종협의회 2명으로 구성, 517~186차 전국회의에서는 8개 지역과 업종협 대표로 확대·강화했다

 

전노협준비소위는 5271차 회의 후 지역순회 토론회를 시작해 75일 마지막 회의를 가질 때까지 총 4차례 회의를 진행했고, 1989719, 8차 전국회의에서 전국회의 산하 중앙집행위원회를 설치키로 하면서 흡수·해소됐다. 전노협준비소위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 순회를 통해 부천과 거제를 제외한 16개 지역, 5개 업종 대표자들과 간담회를 진행해 전노협 건설에 관한 공감대를 넓혔다. 다만, 업종의 경우 그간 상호교류가 취약했기 때문에 대표자들과의 간담회 정도로는 충분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자체평가가 있었다. 

 

전노협 건설을 위한 사업과 권역별 등반대회

 

9차 전국회의(인천)에서는 선봉대 조직화를 하반기 주요사업으로 설정했다. 선봉대는 노동법개정투쟁과 전노협 건설이라는 중심과제를 실현하는 기간부대 역할을 담당했다.

 

전노협 건설을 위한 교육, 선전, 문화사업도 다채롭게 진행했다. 소책자, 만화대자보, 홍보비디오 등의 제작과 대중강연회, 꽃다지 공연 등이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1989108일에는 전노협 건설을 위한 권역별 등반대회를 진행했다. 등반대회의 의의와 목표는 9.24 투쟁 성과 대중적 확산 노동악법개정 투쟁 대중적 확산 민주노조운동의 조직확대·강화와 대중투쟁 동력의 활성화를 통한 전노협 건설의 대중적 기초 마련 전노협 건설과 노동법개정 투쟁 선봉대 조직 이 모든 성과를 토대로 1022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명실공히 자주적 노조운동의 전국적 대표성 획득 등으로 설정했다. 등반대회 준비에서는 동원, 집회 프로그램의 통일, 사전홍보와 교욱선전사업, 선봉대 조직에 주안점을 두었다.

 

수도권 등반대회는 1코스(930분 정능 청수장_서노협, 업종협, 제 민주단체), 2코스(10419기념탑_경기노련, 성남노련), 3코스(10시 우이동입구_인노협, 부노협)로 각각 집결해 등반했다. 오후 1시에 북한산장에 도착, 1시간가량 점심식사와 휴식,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지역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어서 수도권노동자 결의대회를 한 뒤에 2코스로 하산해서 오후 6시에 419기념탑에 도착, 수유역까지 행진했다.

 

영남권은 부산, 울산, 대구, 마산, 창원, 구미, 거제, 진주, 포항 등 9개 지역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각 단위노조 대의원, 확대간부회의 등에서 참여를 결의, 가족동반은 물론 어용사업장 노민추, 중간노조 등까지 적극적으로 조직해 진행했다. 등반대회는 오후 1시까지 동래산성 북문에 집결, 영남권노동자 결의대회를 마친 뒤 하산해서 범어사에서 부산대까지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진행했다. 중부호남권 등반대회는 광노협, 전북노련, 충북지역, 동광양, 대전노협()등에서 참여해 무등산을 등반했다.

 

권역별 등반대회에는 수도권 5,000여 명, 중부호남권 1,200여 명, 영남권 8,000여 명 등 총 14,200여 명이 참가했다.

 

<전국노동자신문> 창간사업

 

<전국노동자신문> 창간사업은 전노협 신문 창간계획으로 구체화됐다. 전국회의에서 수립한 계획은 전노협준비소위 지역순회 때 노동자들은 투쟁하고 조직하면서 관제언론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매체를 창출해 냈고, 조합소식지와 지노협 신문 및 각종 유인물이 그 역할을 담당해 왔으나 이는 선전력의 양과 질에서 마치 미사일과 조총의 싸움일 정도로 왜소하다는 점 전체 노동자의 대의와 실천적 입장을 정확히 표명하고 전국적 결속을 다질 무기로서 전국신문이 필요하다는 자료를 배포하고 의견을 수렴했다. 1989811일에는 서울(2), 마창(3), 포항(2), 경기(4), 현중(1), 인천(2), 부천(2), 광주(1), 대우조선(1), 대구(1) 10개 지역의 선전책임자 회의에서 각 지역의 선전현황과 <전국노동자신문> 창간준비사업을 논의했다.

 

전노협 신문의 위상은 전국의 노동자(미조직 노동자 포함)를 대상으로 하는 전노협 기관지로서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각각의 투쟁을 통해 제기되는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서의 노동자의 입장을 수립하며, 당면투쟁을 대중적으로 지도해 낸다는 점에서 지노협 신문과 구별지웠다. 따라서 전노협 신문의 임무는 자본가와 정부의 허위적이고 기만적인 거짓선전을 폭로하고 노동자의 관점에서 올바른 현실인식을 갖도록 하는 의식화 전국의 투쟁을 공유하여 통일된 대오를 형성할 수 있도록 투쟁방향과 지침을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신문배포를 통한 전노협 조직 강화로 설정했다.

 

이상의 의의와 필요성으로, 19891218일 신문판 8면을 창간호로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2차에 걸친 전국순회, 통신원체계 구성, 전문위원 체계 구성, <전국노동자신문> 창간기금 마련을 위한 수첩과 달력 기금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전국회의 산하 전국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에서 11호까지 발행해온 투본소식을 이어받아 1989919일부터 전국소식 12(<전국노동자신문> 창간준비 1)를 내기 시작해 총 5차례의 전국소식과 1차례의 속보를 발행했다.

 

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 결성

 

전국회의는 19891211일부터 부산대학교에서 이틀간 열린 13차 전국회의를 끝으로 해산하고, 19891217일 오후 2, 경희대 크라운관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준비위원회(전노협창준위)’를 발족했다. 이날 발대식에서는 단병호 전국회의 의장을 전노협창준위 위원장에 선임하는 한편 각 지역과 업종에서 2명씩의 운영위원을 추천하기로 하는 등 전노협 결성을 향해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했다. 또 그간 전노협 건설 활동과 1989년 주요사업·투쟁에 대해 보고하고 전노협 건설계획을 확정했다.

 

전노협창준위는 결성 당일 전노협 건설에 심각한 타격이 될 지도부 구속 등의 사태 발생 시 전국적 총파업으로 즉각 대응 1222~23일을 전노협 선전의 날로 정해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선전 극심한 탄압 자행 시 전국 단위사업장 지도부가 조합사무실에서 작업현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제히 단식농성 돌입 전노협 사수 범국민 서명운동전개 단위사업장과 지역차원 탄압에도 즉각 공동대응 각 단위사업장에 1220일까지 분쇄! 노동운동탄압, 사수! 전노협이라고 쓴 현수막 게시 등의 내용을 담은 투쟁결의문을 채택하고 전노협 말살 책동을 단호히 분쇄하자고 결의했다.

 

한편 전노협창준위는 전노협 결성 10일을 앞둔 1990113일 성명을 내, 전노협이 추구하는 목표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 활동하는 전노협 국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제도적 정책적 개혁을 추구하는 전노협 조국의 밝은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전노협 민주노동운동의 역량 강화, 자주적 산별노조의 건설을 향해 전진하는 전노협임을 천명했다. 전노협창준위는 소위원회(강령규약·대외협력·조직강화·재정)를 두고 구체적인 준비활동을 벌였다.

 

전노협 창립준비위에는 14개 지노협, 3개 업종협의회 총 602개 노조 193,258명이 참가했다. 1989년 당시 조직노동자 수가 1932,000명이었다는 점에서 약 10%가 참여한 것이며, 조합 수로는 전체 7,861개 중 602개 노조가 참여해 대략 7.7%가 참여한 셈이다. 수치상으로는 매우 취약하지만 이러한 숫자는 1987년 이후 창립된 대부분의 민주노조가 가입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한국방송공사가 서울대 사회학과 부설 인구 및 발전문제 연구소에 의뢰해 전국적으로 표본 추출한 1,537명을 대상으로 벌인 국민의식조사에서 전 국민의 62.3%(전면동의 15.3%, 동의 47%)가 전노협 결성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노협 창립대회

 

서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노협 창립대회는 대회장 주변을 중심으로 서울 지역에 25,000여 명의 경찰이 원천봉쇄한 상황이었으며 시내 곳곳은 수시로 검문검색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전노협창준위는 사전에 비밀연락체계를 구축, 3의 창립대회 장소를 선정하고 동시에 준비했다. 또 하루 전날부터 상경한 대의원들은 1015명 단위의 조로 편재돼 엄격한 행동통일을 이루어냈다. 조별로 편재된 대의원들은 두세 차례 수도권 일대를 돌면서 경찰의 미행을 따돌렸다. 그리하여 경찰의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는 판단이 선 전노협창준위는 122일 당일 아침 서울대에서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 학생회관으로 장소를 변경했고, 대기하고 있던 대회 참가자들도 오전 1150분경부터 일사불란하게 수원 성균관대학교로 속속 도착하기 시작해 1시간 만에 1,500여 명이 결집했다.

 

1245분 인노협 조직국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창립대회는 전국 20만 조합원과 14개 지역노조협의회, 2개 업종노조협의회를 대표하는 800여 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창립선언문에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되었음을 밝히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 자주적 산별노조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대의원들은 단병호 전노협창준위 위원장을 전노협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전노협 강령과 규약을 제정했다. 

전노협은 대회에서 원년 사업계획으로 1990년 임금인상 투쟁과 주택·의료보장 등 제도개선투쟁을 통한 노동자의 실질적 생활개선 단위노조와 지노협, 업종협의 조직력 강화 농민·도시빈민·학생 등 기층민중운동과의 연대활동 등을 확정·공표했다. 또한 1990년 임금인상요구액을 확정해 전국공동투쟁으로 관철하기로 결의하고 경제단체총협의회 해체 무노동무임금 철폐 업종연맹의 합법성 보장 반민주 악법철폐를 강력히 촉구했다.

 

그간 전노협 건설사업을 지원해 온 전노협 지원 공동대책위공동의장 김진균은 연대사에서 저는 전노협 지원 공동대책위원회를 대표하여 먼저 여러분의 높은 뜻과 열정을 치하하고 성원하는 바입니다. 저는 오늘, 이미 천명된 전노협의 당위성과 역사적 필연성을 구차스럽게 다시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목표하는 바는 여러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전노협은 창립대회에서는 ‘4천만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생활 향상, 조국의 밝은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약속했다. 전세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약속하는 메시지도 발표했으며 전 세계 곳곳에서도 전노협 출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하는 축하편지를 보내왔다.

 

창립대회에서는 초대 위원장에 단병호(전노협 창립준비위 위원장)를 선출하고 각 지노협 의장 외에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전국적 지도자들을 선출직 중앙위원으로 선임하였다.(초대 임원·중앙위원 : 부위원장 한경석 부노협 의장, 유영용 대구노련 의장, 이흥석 마창노련 의장, 차정훈 시설노련 의장, 김영대 서노협 의장, 현주억 전북노련 의장, 이성도 부산노련 의장, 임석순 경기노련 의장, 사무총장은 최동식 인노협 의장, 선출직 중앙위원은 권용목 현대엔진노조 전 위원장, 배일도 서울지하철노조 전 위원장, 김진국 현대중공업노조 전 부위원장, 허연도 기아기공노조 전 위원장, 문성현 통일중공업노조 전 위원장, 정윤광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오길성 성남노련 부의장, 회계감사는 김학두 울노협준비위 사무처장, 이상학 서노협 부의장)

 

또한 출발과 함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등 4명을 고문으로, 천영세·남상헌 등 1970~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위해 헌신해 온 8명을 지도위원으로, 교수·변호사·의사 등 사회 각계의 주요 활동가 27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선임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을 도모했다. 전노협 창립을 축하하며 백기완(전노협 고문)북을 때려라는 제목의 축시를 발표했다. 

 

대회는 전노협진군가제창으로 마무리됐다. 대회가 마무리되는 상황에서야 대회 개최장소를 알아차린 경기도경은 5개 중대 750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을 동원해 학내 진입을 기도했고, 이에 맞서 300여 명의 선봉대원들이 결사투쟁으로 이를 저지해 수배중이었던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후 증원된 병력이 대회장을 침입해 총 141명의 대의원과 학생들을 연행했다.

 

한편 이날 전노협 결성 지지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부노협 소속 노동자와 학생 400여 명은 도로를 점거하고 노태우정권 퇴진전노협 결성 지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서울에서는 전대협 소속 대학생들이 전노협 사수를 위한 청년학생 결의대회를 치른 뒤 서울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등 전노협 결성을 지지·지원하는 투쟁을 통해 전노협 창립의 의의를 대중적으로 선전했다. 

 

그밖에도 지역 곳곳에서 전노협 창립 보고대회가 열렸다. 대전에서는 모범운수, 신광택시 등 2개 사업장에서 축하행사를 열어 전노협 창립의 감격을 나누고 충남민주노조협의회 준비위 소속 노동자와 학생들이 가두홍보전을 벌였다. 대구에서는 23일 경북대 소강당에서 노동자·학생 400여 명이 모여 전노협창립 보고대회를 열고 공단 일대와 시내 전역에서 시민홍보를 벌였다. 이리에서는 23일 창인동성당에서 500여 명이 모여 전노협 결성보고 및 아세아스와니 폐업철회 촉구대회를 개최했고, 마창에서는 23일 한국남산업, 동경전자 등 7개 노조가 보고대회를 가진 데 이어 25일에도 한국중천과 삼미금속에서 창립보고대회를 개최했다. 그 외 마창노련 소속 27개 노조에서는 22일부터 일제히 전노협 결성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사업장별로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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