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한국전쟁(2) 우리말 옮긴이: 이영민 어려운 결정 10월 1일 한국군이 삼팔선을 넘은 날 밤, 김일성은 급하게 중국대사 예지량을 불러 만났다. 그는 중국정부에 출병하여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김일성은 부수상겸 외상인 박헌영과 연명으로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 중국의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인천상륙에 대하여 모택동은 일찍이 예상한 일이 있었다. 그는 1950년 10월 2일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을 기초할 때 이렇게 말하였다. “금년 4월경 김일성 동지가 북경에 왔을 때 나는 그에게 말해 주었다. 외국 반동 군대가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주의해야 한다. 7월 중순, 7월 하순과 9월 상순에 나는 세 번째로 조선 동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적들이 바다로부터 인천으로 향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서울로 나아가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할 위험이 있다. 인민군은 충분히 준비해야 하고 적시에 북쪽으로 철수해야 한다. 주력을 보존하여 장기간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주1) 모택동이 출병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제 막 전쟁으로 세운 신생 인민공화국이었다. 다시 피와 불구덩이의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구나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국인 미국과 자웅을 겨뤄야 했다. 결심하는 데에 얼마나 큰 기백과 담력이 필요 했을까? 중미 양국의 국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1950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8,772만톤이었으며 농공업 총생산량은 2,800억달러에 이르렀다. 그해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얼마였던가? 고작 65만통에 불과했다. 농공업 생산량은 100억 달러를 넘지 않았다. 미국은 원자탄과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무기와 장비를 쓸 수 있었다. 최강의 군수품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탄탄한 실력을 갖춘 소련조차 북한을 지원하여 미국과 직접 충돌하는 위험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의 출병이 미국과 직접 대치를 초래하는 것 아닌가? 미국이 중공업기지인 동북과 국내 대도시를 공습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들이 모두 충분히 숙고해야 할 문제들이었으며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모두 상상할 수 없는 후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충분한 이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중앙의 결정단위 동지들을 설득해야 했다. 출병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가운데 하나였다. 모택동은 북한 정부의 출병요청 소식을 10월 1일 심야에 들었다. 2일 새벽 1시, 모택동은 즉시 고강(高岗),동화(邓华) 에게 전문을 보냈다. “(1) 고강 동지는 전문을 받은 뒤 즉시 움직여 북경회의에 참석하라. (2) 등화 동지는 변방군에게 준비작업을 앞당겨 마치도록 명령하라. 그래서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하되 원래 계획과 적의 작전을 감안하도록 하라.” (주2) 그는 또 주은래에게 북한 주재대사 예지량에게 보내는 전문에 한마디 덧붙이고 김일성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적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부대는 가능한대로 나누어 후퇴하고, 후퇴할 수 없는 부대는 그 자리에서 견결하게 유격투쟁을 해야 한다. 공황상태에 빠져 동요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래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3) 10월 20일 오후, 모택동이 주재하는 중공 중앙 서기처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한반도 정세와 중국출병문제를 토론하였다. 모택동은 북한에 출병하는 문제가 화급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원래 임표(林彪)에게 병력을 인솔시키려 하였으나 임표는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지휘권을 맡겨 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10월 4일 확대된 중앙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 회의에서 지원군이 북한에 들어가 작전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토론할 예정이었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비행기로 서안에 보냈다. 팽덕회를 맞이하여 북경회의에 참가시키기 위해서였다. 10월 2일 이날은 모택동이 친필로 전문 한통을 써서 스탈린에게 보냈다. 스탈린은 그날로 회신 전문을 보내왔다. 스탈린은 전문에서 중국이 즉시 5,6개 사단을 파견하여 삼팔선에 보내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북한이 삼팔선 이북지구를 지키는 전투를 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다음은 모택동이 기초한 전문의 주요 내용이다. (1)우리는 지원군 명의로 군대를 조선 경내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지원군은 미국과 그 주구인 이승만 군대에 맞서 작전할 것이며 조선 동지들을 원조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국인이 조선을 완전히 점거한다면 조선 혁명역량은 근본적 실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미국 침략자는 더욱 창궐할 것이며 동쪽이 모두 불리하게 될 것이다. (2)우리가 중국 군대를 조선에 출동시켜 미국인과 작전하기로 한 이상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첫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조선에서 미국과 다른 나라 침략군들을 섬멸하거나 쫓아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둘째, 중국군대가 조선에서 미국 군대와 전투를 시작하면 -우리가 비록 지원군 명의를 쓴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선포하는데 대하여 준비해야 한다. 최소한 미국이 공군으로 중국의 수많은 대도시 및 공업기지들을 공습하는 것을 대비해야 한다. 해군으로 연해지역을 공격하는데 대하여도 준비해야 한다. (3)두 문제 가운데 우선은 중국 군대가 조선에서 미국군대를 섬멸하여 조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군이 조선에서 미국군대를 섬멸한다는 것은 주요하게는 미 8군을 섬멸하는가 여부이다. -8군은 미국의 전투력이 강한 노련한 부대이다.- 그러면 두 번째 문제인 미국이 중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이 남는다. 그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때는 형세가 일변하여 혁명진영과 중국이 모두 유리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 미군에 승리한다면 조선 문제가 사실상 끝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끝나지 않을 수 있고 미국이 장기간 조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미국이 중국과 공개적으로 전투를 하더라도 이 전쟁은 그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그렇게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불리한 상황은 중국 군대가 조선에서 미국군대를 대거 섬멸하지 못하여 양군이 서로 대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중국과 공개적으로 전쟁상태에 들어가기 되는데 중국이 이미 시작한 경제건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민족 자산계급과 일부 인민들이 우리에게 불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다. (4)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결정했다. 남만주에 이미 배치되어 있던 12개 사단은 10월 15일부터 출동을 시작하여 조선의 적당한 지역에 위치한다. -12개 사단이면 5,6개가 부족한 규모이다.- 이부대가 삼팔선까지 반드시 내려가지는 않는데 삼팔선 이북에서 작전하는 적을 과감하게 공격한다. 하지만 첫 번째 시기에는 오직 방어적 공격이며 소규모의 적을 섬멸한다. 각 방면의 상황이 분명해지고 소련의 무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아군도 장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후 조선 동지들과 협력하여 반격을 가해 미국 침략군을 섬멸한다. (5) 우리가 알게 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1개 군은 두 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탱크포와 고사포도 포함되어 있으며 모두 70밀리에서 240밀리 구경의 각종 포 1천 5백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1개 군은 3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런 포 36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적은 제공권이 있는데 우리 공군은 이제 훈련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1951년 2월에 겨우 300여대의 항공기를 작전에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군은 아직 미국군대 1개 군을 섬멸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기왕 미국과 작전을 하기로 한 이상 미국의 최고 사령부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전역에서, 또 전장에서 집중 투입된 미국 1개 군과 아군이 작전할 때 아군은 적 병력의 4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아군 4개 군과 적 1개 군의 대비이다. 그리고 적보다 한배 반에서 두 배의 화력, 즉 2천 2백문에서 3천문에 이르는 70밀리 이상의 각종 포를 가져야 한다. 그때 적의 화력이 같은 구경으로 1천 5백문이라면 적 1개 군을 철저하고 깨끗하게 섬멸할 가능성이 있다. (6) 위에 쓴 12개 사단을 제외하고 우리는 장강 이남 및 섬감지구(섬서,감숙지구)에서 24개 사단을 용해,진포,북녕(北宁)선으로 이동시켰다. 조선의 제2병력, 제 3병력을 지원하려는 것이다. 내년 봄과 여름이면 그때 상황에 따라 점차 투입할 수 있게 되리라 예측한다. (주4) 모택동은 이 전문에서 중국이 출병하여 북한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과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분석했다. 그리고 중국이 출병할 때 전략부서와 작전방법, 국내에서 호응할 부대 이동상황에 대하여 설명했다. 또 소련에게 승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모택동이 제기한 것은 모두 커다란 문제들이었다. 그는 전면적이고 용의주도했으며 신중하게 생각하였다. 이 전문은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모택동이 가졌던 북한 출병에 대한 태도 및 각종 생각들을 매우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매우 소장가치가 높은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판단하면 모택동의 이 전문은 10월 2일 오후 소집한 서기처 회의 전에 기초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서기처 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한 뒤 스탈린에게 보낼 준비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 다수가 출병에 찬성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그 전문을 버려두고 다수 의견을 소련 주재 중국대사 라신(罗申)을 거쳐 스탈린에게 전하였다. 스탈린에게 전한 의견가운데 주의할 만한 게 있다. 모택동이 “이 문제에 대하여 최종 결정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1차 중앙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중앙 각 부문 주요 동지들이 모두 출석하게 된다.”(주5)고 한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이 결코 자기 의견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정확하게 해결하기 위해 선회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10월 4일 오후 모택동이 주재하여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가 중남해中南海 이년당(颐年堂)에서 소집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택동, 주덕(朱德), 유소기(刘少奇), 주은래, 임필시(林弼时), 진운(陈云), 고강, 팽진(彭真), 동필무(董必武), 임백거(林佰渠), 장문천(张闻天), 팽덕회 등이었다. 팽덕회는 회의 중간에 도착했다. 참관으로는 이부춘, 라영환, 임표, 등소평, 요수석, 박일파, 섭영진, 등자회, 양상곤, 호교목 등이었다. 지원군을 파견하여 미군과 작전하는 것은 중국에게 전체 국면을 뒤흔들만한 일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출병이나 아니냐 하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모택동이 먼저 모두에게 출병이 불리한 상황을 이야기하게 하였다. 회의 참가자들은 각자 의견을 말하였다. 다수가 출병에 찬성하지 않거나 출병에 대한 우려를 피력하였다. 주요한 이유로는 중국이 이제 막 전쟁을 끝내서 경제가 아주 어렵다, 경제회복이 절실하며 새로 해방된 지구의 토지개혁도 아직 진행하지 못하였다. 토비나 특무도 숙청하지 못하였다. 아군 무기나 장비가 미군에 비해 너무 낙후되어 있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일부 간부와 전사들이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싫어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우리 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등등. 모두의 의견을 들은 뒤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들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웃 국가가 위급한 것을 우리가 옆에서 본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이 심히 괴로울 것이다.”(주6)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인물인 팽덕회가 회의장에 도착하였다. 팽덕회는 이 회의에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하였다. 회의내용도 몰라서 오로지 듣기만 하고 발언하지 않았다. 산회후 그는 양상곤이 묵는 곳으로 와서 회의상황을 자세하게 들었다. (주7) 10월 5일 오전, 모택동의 의뢰를 받아 등소평이 팽덕회를 북경반점에서 모택동이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둘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팽덕회는 모택동의 출병결정을 지지했다. 모택동이 출병시 자신에게 최고 사령관을 맡기려 했을 때 팽덕회가 말했다. “나는 중앙의 결정에 따르겠다.” 모택동은 감개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이걸로 나는 안심했다. 지금 미군은 여러 길로 삼판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출병해야 한다. 그래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오늘 오후 정치국 회의를 속개하면 당신 생각을 이야기해 달라.” (주8) 오후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여전히 두가지 의견으로 갈렸다. 다른 이들의 발언을 들은 뒤 팽덕회가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그는 “출병하여 조선을 지원해야 한다. 깨지더라도 해방전쟁 승리를 몇 년 늦추면 된다. 미군이 압록강변과 대만에 주둔하면 그들은 침략전쟁을 벌일 것이다. 구실은 필요할 때 만들면 된다.” 회의는 최종적으로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지원군을 조선에 보내어 작전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일부터 5일까지 중앙은 3일간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충분하게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다. 모택동은 자기 견해가 있었지만 의연하게 다른 여러 의견을 청취했다. 모두에게 출병의 불리함과 곤란한 점을 충분히 말하게 한 뒤 다시 그들을 설복시켰다. 사실 모택동은 개입하느냐 하지 않느냐 문제로 좌고우면하였으며 오랫동안 궁리하였다. 모택동이 호전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이 이미 중국 국경선까지 치고 올라왔으니 어찌 개입하지 않을 수 있으랴? 후일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그 때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압록강변에 5개 군을 배치했지만 우리 정치국은 계속 결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번 정하면 저렇게 뒤집히고 이렇게 번복하면 다시 뒤집혔다. 아아, 마지막에 가서야 결정하였다.” (주9) 이처럼 모택동은 그해 중앙 정치국의 출병 및 북한 지원 결정에 대하여 묘사하였다. 그토록 힘겨운 결정이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아주 드문 일이었다. 10월 6일, 주은래는 중남해(中南海)) 거인당(居人堂)에서 중앙군사위원회를 소집하여 주재하였다. 이 회의에는 각지구 책임자를 비롯하여 당정군 고급간부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5일 정치국 확대회의 결정에 따라 북한에서의 작전방안및 관련된 임무배치를 토론하였다. 10월 8일, 미군이 이미 삼팔선을 넘어 대거 북진한 뒤였다. 모택동은 중국인민혁명 군사위원회 주석 명의로 중국 인민지원군을 결성하라고 명령했다. “조선 인민해방전쟁을 지원하고 미 제국주의 및 그 주구들의 공격에 반대하기 위해, 조선 인민들을 지키고 중국 인민과 동방 각국 인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북 변방군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한다. 신속하게 조선으로 출동, 조선 동지들과 협동하고 침략자들에 맞서 영광된 승리를 쟁취하라.” “팽덕회 동지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및 정치위원으로 임명한다.” “우리 중국 인민지원군은 조선으로 가서 조선 인민, 조선 인민군, 조선 민주정부, 조선 노동당, 그리고 각 민주당파 및 조선 인민의 영수인 김일성 동지에게 우의와 존중의 뜻을 전하라. 그리고 군사기율 및 정치기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라. 그런 것들이 군사적 임무를 다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기본이다.”(주10) 같은 날, 모택동은 이 역사적 결정을 김일성에게 전문을 통해 전하였다. 그리고 북한 정부 내무상이던 박일우(朴一禹)를 심양(沈阳)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팽덕회와 고강을 만나 지원군이 북한에서 작전하는 문제를 상의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8일 오전, 팽덕회는 모택동의 명령에 따라 고강과 함께 임시 지휘부 인력을 인솔하여 비행기로 심양에 갔다. 다음날 오전 팽과 고는 지원군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중앙의 출병 및 북한지원 결정을 전달하고 각 부대가 10일 안으로 출국하여 작전준비를 하도록 요구했다. 주1)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수고, 미발신. 1950년 10월 2일 주2) 모택동이 고강, 등화에게 보낸 전문. 1950년 10월 2일. ‘모택동 군사문집’ 제 6권, 군사과학출판사, 중앙문헌출판사, 1993년 12월판, 제 105쪽 주3) 주은래가 예지량에게 보낸 전문중 모택동이 고친 원고, 1950년 10월 2일 주4)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수고, 미발표) 1950년 10월 2일 주5) 소련 주재대사 나신에게 전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중국이 잠시 출병하지 않는 것에 관한 모택동의 초보의견, 1950년 10월 3일 주6) ‘팽덕회 자서전’ 인민출판사 1981년 12월판, 제 257쪽 주7) 양상곤을 방문하여 이야기한 기록, 1995년 10월 16일 주8) 팽덕회 전기조가 양상곤을 방문했을 때 대화기록. 1995년 7월 20일 주9) 모택동과 김일성과 회견시 대화,1970년 10월 10일 주10) 모택동의 중국인민지원군 결성에 대한 명령, 1950년 10월 8일. ‘모택동 문집’ 제 6권. 인민출판사 1999년 6월판, 제 100-10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