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초 노동자 저항을 볼 수 있는 조사자료 - 논문을 쓰기 위해 조사한 기록 노트 1970~1980년대 초 노동자들의 쟁의 현황을 꼼꼼히 조사한 기록 하나가 한내에 기증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때를 기록한 것인데, 이 조사자료에는 1970년 봄부터 노동자들의 저항이 산발적이나마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었다. 당시 노동자 전국조직으로 한국노총이 있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투쟁은 조직적이지 못했고 잘 알려지지도 못했다. 
기록 내용을 들여다보니, 1970년 3월 3일부터 10일 간호원협회 회원들이 동정파업을 벌인 사실이 있다. 동정파업(동조파업)은 다른 사업장 일에 연대하여 하는 파업을 이른다. “부산진보건소 간호원 김영자가 69년 말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되고 3월에 금고 1년 6월의 구형을 받은 데 자극, 전국 간호원협회 회원 6천여 명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간호원 처우개선을 위한 쟁의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 시발점으로 서울에서는 서울대학부속병원 간호사 190여 명, 우석대부속병원 130명, 메디칼센터에서 230여 명의 간호사들과 전국 주요 병원의 간호원들은 3일 오전 10시부터 4일만인 6일 오후까지 주사행위를 거부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해 9월에 다시 파업이 진행되고 이를 계기로 노동조건 개선을 이룬 것은 알 수 있었다. “한편 9월에 들어서 서울대부속병원 및 메디컬센터 간호원 360여 명은 다시 처우개선을 내걸고 집단사표를 제출,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5급을의 대우에서 4급으로 본봉을 인상해 줄 것과 수당 식사보조비의 인상, 휴일근무수당을 다로 지급할 것을 요구. 이들은 25일부터 26일 오후까지 하룻동안 파업에 들어갔다가 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10월 3일 보복인사 반대 재파업에 들어갔다. 결국 이 간호원의 파업사태는 보사부가 간호원들의 처우개선을 약속함으로써 87시간만에 정상화되었다. 보사부는 간호원 수당을 500% 인상하고 인턴에게도 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개선안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3월에 전국금융노조 임금인상 요구 쟁의, 5월 26일 철도노조원 3만3,000여 명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쟁의 등 기록이 있다. 이러한 투쟁이 이어지던 때 전태일은 죽음으로 투쟁을 호소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9월 초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3만원의 급료를 털어 종업원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95%가 13~16시간의 과중한 근무를 하고 있으며, 96명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결려 있고, 102명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열악한 조건에 시달리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는 이 조사결과에 따라 10월 7일 노동청에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냈다. 노동청은 이 진정에 접한 후 700여 상가 업주에게 근로조건 개선을 지시했다고 하나 그 조치가 유명무실한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노동청은 10월 17일 근로조건이 개선되었다고 공식 발표해버렸다.”(1970년 10월23일 경향신문을 기초로 정리) 작업조건 개선은 노동청 진정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전태일은 깨달았을 것이다. “11월 13일 전태일을 비롯한 재단사 10여 명은 1) 현재 16시간의 근로시간을 평균 9시간으로 단축해줄 것 2) 한달에 4일은 쉬게 해줄 것 3) 야간 근무수당을 지급할 것 4) ‘시다’ 임금을 인상할 것 5) 작업환경을 즉시 개선하고 매년 건강진단을 실시할 것 등을 업주 대표들에게 재차 호소한 뒤 시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제지당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쓴 프랑카드도 압수당했다. 이에 격분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내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호소했다.” 이 조사노트는 법학을 전공한 한 연구자가 한내에 기증한 것이다. 80년대 중반 논문을 쓰기 위해 기초 조사를 했던 필사 자료다. 출처는 그동안 발간된 책, 신문 등이다. 당시는 신문 기록 디지털화 전이라 도서관에 가서 일일이 베껴 썼던 자료들일 것이다. 이런 기록물을 보면서 “현장을 꼼꼼히 살피며 논문을 쓰는 정성”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전환을 이루는 투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진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