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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택동과 한국전쟁 10 "최후의 승리" _이영민 (112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09-17 조회 621
 

<모택동과 한국전쟁 10>

     옮긴이 : 이영민 

최후의 승리를 얻다

 

모택동은 정전회담이 회복되었다 하여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시종 이 문제를 쥐고 교묘하고 민활하게 대화와 전투를 사용하였다. 정치투쟁과 군사투쟁을, 양손으로 두자루 붓을 잡고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서로 보조를 맞추고, 상대를 겨누되 추호도 방심하지 않았다.

 

4월 중순, 모택동은 등화에게 담판 기간에 지원군이 행동할 지도방침을 제기하였다. 정전을 쟁취하고 조치를 준비하라. 군대쪽은 분발시켜 전투에 관여하고 담판에는 관여할 필요없다.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며 원칙에 따라 계획하고 진행해야 한다.”(1)

 

420, 등화는 모택동이 위에 쓴 의견에 따라 한국전쟁에서 진행된 하계전역에서 반격 의견을 제출했다. 그는 또 전역의 준비를 5월말에 완성되도록 계획했다. 전역에서 반격은 6월초에 시작되어 7월 상순에 끝이 났다.

 

423, 모택동은 이 계획을 승인했다. 그리고 지시 가운데 한 가지 수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정전을 조기에 이루되 담판에 유리할 때는 공격하지 말라. 하지만 5월사이 적당한 시기에 다시 결정하도록 하라.”(2)

 

미국인은 압력을 받아 담판석에 앉았지만 중국과 북한측의 제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UN군 대표는 직접 송환되지 않는 전쟁포로를 중립국으로 보내는데 반대를 표명했다. 또 아시아 국가를 중립국으로 하는 것도 거절하였다.

 

미국이 담판을 거절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조중측은 57일 전쟁포로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제출하였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스위스, 인도등 5개 중립국가 대표가 송환위원회를 구성하여 쌍방 직접 인도하지 않는 전쟁포로 문제를 관리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이 제안은 즉시 인도, 미얀마등 원래 포로 송환문제에서 미국을 지지하던 국가의 찬동을 얻었다.

 

미국도 조중측의 방안에 대하여 다시 거절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휴회를 선포하였다.

 

513일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은 하계 반격작전을 앞당겨 시작하였다. 이 작전은 미국을 압박하여 525일 조중측의 제안을 기본적으로 받아 들이게 하였다. 하계 반격작전의 1단계는 끝이 났다.

 

담판에서 진전으로 뚫고 나가려던 때 오히려 한국측의 강렬한 반대에 부딛쳤다. 424,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만약 지원군이 압록강 남쪽에 남는 어떠한 협의라도 허락한다면 그는 한국군을 UN군에서 빼내어 필요시 일방적으로 계속 작전할 것임을 전하였다.(3)

 

다시 전투로 회담을 촉진시켜야 하였다. 지원군은 527일부터 하계 반격작전의 3단계 공세를 시작하였으며 부대 배치를 조정하였다. 원래 미군을 주로 공격하던 것을 한국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아군은 적 4만 천여명을 섬멸시키는 전과를 얻었다. 섬멸한 적은 1단계의 거의 10배에 이르렀다.

 

66,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내 그에게 정전협상을 받아들일 것을 독촉하였다. 그리고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은 이라고 일깨웠다.(4)

 

68, 일년 가까이 끌어왔던 전쟁포로 문제가 마침내 협의를 이루었다. 기본적으로 조중측의 포로송환에 대한 제안이 실현되었다.

 

615, 정전담판 각항 의제가 모두 협의를 달성했다. 쌍방이 실제로 통제하는 선을 따라 군사분계선을 구획하는 작업도 곧 완성될 것이었다. 한국전쟁 정전담판은 역사적 사명을 원만히 완성될 것이었다.

 

정전협정의 순조로운 조인을 보장하기 위해 중조 군대는 명령을 발포했다. “616일부터 각 부대는 주도적으로 적에 대하여 공격하는 것을 일률 정지하라. 단 적이 아군에 대하여 어떤 공격이라도 하면 견결하게 타격을 가하라.”

 

이때 이승만은 616일 아이젠하워에게 회신을 보내 정전협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했다. 18일에는 다시 조선 인민군 포로 27천명을 한국군이 훈련하는 중심지로 보냈다. 공공연하게 협의를 깨뜨려서 세계의 공분을 샀다.

 

모택동은 이런 상황을 알고 과단성 있게 한국군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결정을 하였다. 621, 그는 긴급하게 팽덕회에게 회신을 보냈다. 팽은 막 북경에서 평양에 가 정전협정 서명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5) 그는 정전협정 서명은 반드시 지연시켜야 한다. 언제까지 지연시키는 게 적합한지는 상황 전개를 보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괴뢰군 만여 명을 섬멸하는 게 꼭 필요하다.”(6) 하고 지적하였다.

 

이 방법에 따라 중국과 북한 군대는 전례없는 규모의 금성(金城)전역을 준비하여 개시하였다. 그들은 역량을 집중하여 한국군을 타격했다.

 

71321, 검은 구름이 가득하여 큰비가 내릴 듯하였다. 중조 군대는 갑자기 공격을 개시했다. 천여문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으며 적 진지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뒤덮였다. 한시간이 못되어 중국과 북한 군대가 한국군의 모든 전방진지를 돌파하였다.

 

이번 전역은 중조군대 포병의 강력한 지원 속에서 맹호가 산을 내려온 것 같았다. 정전협정 서명으로 그칠 때까지 계속 공격하여 한국군 78천여 명을 섬멸하였으며 167평방 킬로미터를 수복하였다.

 

중조군대는 삼팔선에서 신속하게 밀고 나아갔다. 719, 미국측은 정전 실시를 보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에 압력을 가해 얼마 후 한국 정부도 성명을 발표하여 정전협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9537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이 끝난 것이다. 전 세계 인민들이 갈망하던 한국전쟁 정전이 끝내 실현되었다. 당시 UN군 총사령관이던 클라크는 그 후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정부의 훈령을 집행하는데 나는 부러워할 가치 없는 영예를 얻었다. 그것은 역사상 승리 없는 정전조약에 서명한 미국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일종의 실망과 괴로움을 느꼈다. 나는 나의 전임인 맥아더와 리지웨이가 나와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7)

 

연일 중조 양국 인민은 승리의 기쁨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여전히 방심하지 않은 채 경계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의에 서명하기 이틀 전에 모택동은 인민지원군 전체 지휘원들에게 지시하며 말했다. “전군 지휘원들은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정전협정 서명의 효력이 발생한 뒤에도 여전히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 한편으로 협정을 엄격히 준수하면서 한편으로는 적이 파괴하려는 도발을 방지해야 한다.”(8)

 

모택동, 국가의 최고 지도자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어, 중대한 승리를 얻은 시기임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1953912, 모택동은 중앙 인민정부위원회 제 24차 회의에서 연설하며 항미원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총괄하였다.

 

항미원조가 3년을 경과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지금 그 대목을 말하려 합니다.

 

항미원조의 승리는 무엇에 의지하여 얻은 것입니까? 지금 여러 선생이 말하기를 지도가 정확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도는 하나의 조건입니다. 정확한 지도가 없이 일을 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전쟁이 인민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전국 인민의 지원 아래 양국 인민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웠습니다.

 

우리는 미제국주의라는 그러한 적과 작전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우리에 비해 강하기가 몇 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고 그들이 평화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평화가 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째, 군사방면입니다. 미국 침략자는 불리한 상태에 처해 있으며 타격을 입은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평화가 아니라면 그들이 배치된 전선은 공격을 받아 무너질 것입니다. 서울은 조선 인민의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런 형세는 작년 여름부터 이미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싸운 쌍방은 자기의 전선을 가리켜 금성철벽이라고 합니다. 우리쪽은 확실히 금성철벽입니다. 우리 전사와 간부들은 기지가 있으며 용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 침략군은 오히려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장교들도 비교적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민활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전선은 튼튼하지 못하며 결코 금성철벽이 아닙니다.

 

우리쪽에 발생한 문제를 보면 처음에는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급양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세균전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 네 가지 문제는 하나에 하나가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군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금년 여름, 우리는 이미 한시간 안에 적의 정면 21킬로내 진지를 파괴하였습니다. 한꺼번에 몇십만 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고 18킬로미터를 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공격한다면 다시 공격하고, 2, 3,4차 공격으로 적의 전선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치방면입니다. 적의 내부는 해결하지 못할 수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전세계 인민들은 평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경제방면입니다. 적은 침략전쟁 중 수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들의 예산수지는 균형이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몇몇 원인이 더해져 적은 어쩔 수 없이 평화를 선택하였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주요한 원인입니다. 이것 없이는 들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자는 매우 오만합니다. 무릇 억지를 부리는 곳에는 억지를 써야 합니다. 도리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중에 적은 109만 명이 사상하였습니다. 당연히 우리도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상자는 원래 예측했던 것보다 상당히 적어야 합니다. 갱도를 만든 후에는 사상자수가 더 적어졌습니다. 우리는 싸울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우리 진지를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늘 우리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지도라는 조건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지도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군중들이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간부와 전사들이 생각해내는 각종 싸움방법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전쟁의 첫 1개월 동안 우리의 자동차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지도자가 생각해낸 방법 말고 중요한 것은 군중들이 생각한 방법입니다. 자동차길 양쪽에 1만 명이 넘는 보초를 세워 비행기가 오면 신호로 총을 쏘았습니다. 운전사가 그 소리를 들으면 바로 숨으러 갔습니다. 어떤 이는 자동차를 숨길 곳을 찾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자동차길을 넓히고 많은 새 차로를 닦았습니다. 자동차가 가기도 하고 오기도 막힘없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동차 손실은 시작할 때 40퍼센트였다가 0.9퍼센트로 감소하였습니다. 다음에 지하창고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지하 강당도 만들어 적이 지표면에 폭탄을 떨어뜨려도 우리는 지하에서 대회를 열었습니다. 우리중 북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의 전장을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방법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은 인민에 의지하고,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더하면 우리의 열세한 장비로도 우세한 장비를 가진 적에게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의 송리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조선 인민과 함께 삼팔선으로 돌아가 지켜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반격하여 삼팔선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있을 것입니다. 심양(沈阳), 안산(鞍山), 무순(扶顺)등 이지방 인민들은 안심하고 생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군사적 경험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의 육군, 공군, 해군, 보병, 포병, 공병, 탱크병, 철도병, 방공병, 통신병 그리고 위생부대, 군수부대등은 미국 침략군대와 실제로 작전한 경험을 얻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미국 군대의 바탕을 탐색해 보았습니다. 미국 군대를 접촉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두려워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33개월을 싸웠습니다. 그들의 바탕을 알고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미제국주의는 결코 무섭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번의 일입니다. 우리는 한번의 경험을 얻었으며 그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셋째, 전국 인민의 정치적 각성을 높였습니다. 이 세 가지로 인해 4번째가 탄생하였습니다.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려는 새로운 전쟁을 늦추었으며 제3차 세계대전을 늦추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자는 마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중국인민들은 이미 조직되었으며 건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건드려서 화를 내게 하면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9)

 

모택동은 미리 기초해둔 연설 요점에서 한마디를 더하였다. “하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하려면 끝까지 해야 한다. 마지막에 승리할 때까지 해야 한다.”(10)

 

한국전쟁은 모택동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가운데 첫 번째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군사예술과 국제전략, 치국방략에서 절묘한 솜씨를 보였다.

 

한국전쟁의 처음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국을 두목으로 한 UN군을 이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게 되었다. 한국전쟁에서의 승리는 미국군대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신화를 깨뜨렸다. 전세계 사람들은 중국의 적과 친구를 포함하여 신중국을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막 전쟁의 폐허에서 걸어나온 신중국, 경제가 그렇게 곤란하고 군대의 장비가 매우 낙후되었음에도 뜻밖에 세계 일류 강국을, 현대화된 장비를 가진 미국 군대를 패퇴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국 인민지원군은 중화민족의 가장 우수한 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어깨에는 조국 인민의 기대가 지워져 있었다. 조선인민과 세계의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중국을 보위하고 조선을 지원하는역사적 사명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이 세우고 지도한 인민의 영웅적 군대이며 모택동이 가장 사랑하는 인민의 영웅적 군대였다.

 

장기간 쇠약했던 중국이 과연 현대화 전쟁의 대량소모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으로 걱정하던 문제였다. 항미원조 전쟁을 통해 전국 인민을 최대한 동원하여 전방까지 지원해 내었다. 경제를 회복시켰으며 위대한 투쟁 중에 새로운 건설을 시작하였다. 중국 인민들은 현대화된 전쟁의 소모를 지탱하는 능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전쟁중 경제건설에 대한 영향을 최소한도로 감소시키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싸우고, 안정시키며, 건설하는전략방침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전중국 인민들은 이제껏 그렇게 만민이 일심단결한 예가 없었다. 투지는 앙양되어 과거 접시 위 모래알 같던 국면을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승리로 우리나라는 경제건설에서 국제적 평화국면의 유리한 환경을 얻었다. 장기간 전란에 있던 중국인민에게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1953년 시작한 제 15개년 계획을 표지로 하여 중국은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공업화 건설을 시작했다. 이것은 신중국이 훗날의 경제도약에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이것을 하나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택동과 공산당이 중국인민을 지도하여 창조해낸 인간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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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화가 지원군 부사령원 양득지등에게 주어 중앙군사위원회에 보고한 전문에서 인용, 1953420

2) 모택동이 동화의 하계전역의 반격에 대한 몇가지 의견에 대한 지시, 1953423

3) 미국 월터 험즈(Walter G hermes,) ‘한국전쟁중의 미국육군1, 국방대학출판사, 19888월판, 493

4) 중균(中筠)이 편집 전후 미국외교사상권, 세계지식출판사 19945월판, 223-224

5) 팽덕회는 1953619일 북경을 떠나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반격작전 2단계가 끝나면 3단계 반격작전을 다시 조직하자고 건의했다. “이승만 괴뢰군에게 다시 타격을 가하여 15천명을 섬멸시키자.”는 것이었다.

6)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3621

7) '당대 중국총서: 항미원조전쟁사에서 인용하였다.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09월판, 329

8) 이것은 모택동이 중공 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에 보낸 전문에 가필한 담화이다. 중앙군위는 1953년 지원군이 하계 반격작전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9) 모택동이 중앙 인민정부위원회 제 24차 회의에서 한 연설이다. 1953912. ‘모택동 군사문집6, 군사과학출판사, 중앙문헌출판사 199312월판, 353-355.

10) 모택동이 중앙 인민정부위원회 제 24차 회의 연설요지이다. 19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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