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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결성(1987년 8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8-08 조회 495

울산 현대그룹 계열사 노조 및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

 

⦁ 시기 : 198788

 

 

 

현대미포조선소노조 결성투쟁

 

1987715, 태풍 셀마가 남부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바로 그날, 현대미포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비록 현대엔진보다 10일 가량 늦었지만 현대미포조선소의 노동조합 결성은 오랜 준비와 현장투쟁의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현대그룹 전체로 노동조합 결성투쟁이 확산될 수 있었다.

 

현대미포조선소의 노조결성 투쟁은 의외의 사건에서 시작됐다. 19873, 당시 손명원 사장이 임금인상과 상여금을 지급할 때 회사에 흑자가 났다는 이유로 그룹측에 타사보다 높은 상여금과 임금인상을 제시했다가 짤렸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손명원 사장은 경기침체 속에서도 1986년도에 32억 원의 흑자를 냈으므로 다소나마 노동자들에게 상여금과 임금을 보장하겠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노동자들은 상당히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손명원 사장이 임금과 상여금 100%를 더 주자고 주장하다가 짤렸다는 사실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을 가져왔다. 이들은 새 사장 취임식에 맞춰 파업을 전개하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에 초대위원장이 되는 김영환과 만나게 됐다. 이들은 근본적이고 장기적·지속적인 운동을 위해 노조를 결성하기로 방향을 전환하고, 71일 노조결성 준비에 돌입했다. 75, 김영환 등은 한국노총 금속노련 이진우 조직부장과 만나 715일 오후 7시 울산노동회관에서 노동조합 결성식을 하기로 결정하고 연락 등 세부적인 조직에 착수했다. 한편 노사협의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손명원 사장 구명을 위한 파업과 노조결성이 준비되고 있었으나, 714일 양자 간 회의에 노사협의회측에서 1명만이 참석함으로써 김영환을 중심으로 노조결성을 강행하기로 결정하게 됐다.

 

715, 노조를 결성키로 한 오후 7시 울산노동회관은 회사 관리자들에 봉쇄돼, 조합원 장국원 집에서 39명이 참여한 가운데 위원장 김영환, 부위원장 정낙철 등 임원을 선출하고 결성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어 716, 출근버스에서 노조결성 사실과 결성 보고대회를 개최한다는 유인물 배포와 선전선동을 병행하자, 회사는 당일을 명휴로 정해 노동자들을 귀가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1030분부터 대회를 시작하자 귀가하지 않고 기다리던 노동자 1,000여 명이 곧장 보고대회에 참여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한편 노조결성 보고대회가 열린 716, 노조설립신고서를 접수하러 간 이진우, 장국원, 허수(동제련노조 위원장) 45명이 접수창구에 서류를 내미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사측에서 이를 탈취해 승용차를 타고 달아나 버렸다. 이 사실이 낮 12시 뉴스, 다음날 TV, 라디오, 신문 등에 보도되자 회사측은 자기들 손으로 직접 노조설립 신고서류를 접수하게 되었고, 여론에 떠밀려 노조설립증도 발급되었다.

 

 

현대중공업노조 결성투쟁

 

현대중공업은 현대그룹의 주력기업인만큼, 또한 1974년도의 대규모 시위사건과 1980년도의 노조결성 시도 등 전례에 비추어 그룹 쪽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철저한 감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사협의회도 직장과 기원을 중심으로 회사의 지명으로 구성했고, 규율도 매우 엄격해 머리카락은 항상 귀가 완전히 보여야 한다든가, 뒷머리가 옷깃에 닿으면 정문에서 출입을 통제할 정도로 군대식 노무관리를 강요하고 있었다.

 

한편 198628,000여 명 중 연말 상여금을 150%(연말 상여금은 50%에서 350%까지 상대평가에 의해 차등지급) 미만으로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5,000명을 감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감원도 1주 간격으로 몇 명씩 해고시킨다거나, 연수교육을 보낸 후 타부서로 배치하여 사표를 쓰게 하는 교묘한 방법을 통해 진행됐다. 이에 이재식 등을 중심으로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서명용지는 해고자들을 통해 각계각층에 탄원서로 제출됐다. 이렇게 문제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회사측은 서명자를 색출하고, 주동자였던 이재식을 2개월간 징계했다. 이러한 처리에 불만을 품은 이재식은 19874월부터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6월부터는 노동법 공부를 시작했으며 720일경을 노동조합 설립일로 예정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현대엔진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회사측은 79일 어용노조 결성 기도를 현실화했다. 내부 주도권 다툼으로 직장과 기원들이 반대해 설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어용노조의 출현은 조만간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721일 회사측은 금속노련 이진우 조직부장을 데려다 권오성 기원을 중심으로 51명이 태화호텔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22일 전격적으로 노조설립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해오던 민주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724, 울산사회선교협의회의 주최로 노동법과 노동조합이라는 주제로 장명국의 강연회가 개최됐다. 이 강연회에는 5006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해, 강연이 끝난 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만 1층 교리실에 모여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논의하게 되었다. 현대중공업 내부에 노조결성의 뜻을 품었던 여러 팀이 이 강연회를 통해 비로소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40여 명은 현대중공업 김호충 과장의 사회로 토론을 전개하여 설계과의 김필수를 대책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다음날 대중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이날 서명한 서명용지가 다음날 회사로 통보되고 말았다.

 

725, 권오성 집행부 불신임에 대한 공개 서명작업 결과 하루만에 3,400여 명이 동참했다. 자신감을 얻은 대책위원들은 민주노조 결성에만 최선을 다하기로 원칙을 정하고 민주노조 위원장은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한 사람으로 뽑자고 결의했다. 726, 일요일인 이날 대책위원들을 중심으로 참석한 50여 명이 정식으로 현대중공업노조 개편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책위원장에 김필수, 사무장에 이재식, 대책위원에 김진국, 정병모, 장세근, 김형권, 이채석, 조성훈, 박우신 등 11명을 선출했으며 728일을 어용노조 퇴진일로 결정하고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727일에는 대책위원 중 5명이 회사간부들에 의해 납치되어 밤 12시까지 끌려 다니기까지 했다. 728일 아침 7, 정문안에서 어용노조 물리치고 민주노조 쟁취하자는 현수막을 들고 투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응이 없던 노동자들이 회사 안으로 행진해가자 순식간에 1만 명이 넘는 대군중으로 불어났다. 여세를 몰아 사내행진을 하며 전 노동자는 동참하여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자고 외쳤고, 마침내 오전 9시 종합운동장에 집결하여 국민의례와 산업현장에서 숨져간 노동자들을 위한 묵념, 보고대회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이날 대회와 관련하여 회사와 당일 시위에 대해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 28일을 유급으로 인정 회사는 권오성 집행부를 퇴진시키도록 노력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729일에도 투쟁은 계속됐고, 730일에는 대책위원 임원들이 상여금 차등제 폐지와 임금인상을 놓고 단식투쟁에 돌입했으며, 파업과정에서 현장노동자 외에도 사무실 직원과 여사원까지 합세하게 되자 회사측은 이춘림 회장 등 중역과 대책위 임원간의 협상에 돌입해 17개 안건에 합의하게 되었다. 이날 노사간의 주요 합의사항은 임금인상은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되면 그 노조와 교섭 연말 상여금 차등제 철폐하고 모두 300%출근시간을 730분에서 8시로 시말서, 감봉 등으로 징계했던 두발 문제 자유화 각 부문별로 1명씩 총 22명 선정, 민주노조 설립을 위한 노동자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다. 이후 81일부터 정상조업에 들어갔으나 회사측은 노조결성에 전혀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불만이 잠복하게 되었다.

 

86, 정주영 회장이 현장 조장급 이상 5,000여 명을 새마을회관에 집합시켜 조회를 실시했다. 이때 500여 명이 체육관 정문을 열고 메가폰을 잡은 후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 25%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대책위원 11명을 못당해내느냐는 등 격앙된 연설로 조회를 마친 정주영 회장이 후문으로 나가려다, 운동장에 와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2만여 노동자들에 의해 에워싸였다. 1시간가량 질서정연하게, 운동장으로 갈 것을 요청하던 노동자들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정주영 회장의 발언에 분노하여 정주영 회장에게 흙을 뿌렸고, 나무를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버티던 정주영 회장은 결국 운동장으로 향하게 됐다. 운동장에 모인 노동자들은 애국가와 사가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결국 연단에 선 정주영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것이 회사와 여러분의 공동목표라는 내용과 합법성 있는 노조와 대화를 하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집단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발언으로 연설을 마쳤다. 노동자들이 세계 제일의 민주노조운운에 현혹되고 있는 동안 정주영 회장은 운동장을 빠져나가 헬기를 타고 떠나버렸다. 그 후 노동자들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받은 게 뭐냐며 연단으로 뛰어올랐고,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대책위와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본관사무실로 몰려가 회사쪽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했으며, 나머지 노동자들도 정문출입을 통제하고 곳곳에서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회사는 이날 4시를 기해 일방적으로 전면 휴업공고를 내걸었으며, 다음날 정주영 회장은 성명서를 통해 노동자들을 통렬히 비난했다. 이로써 ‘22인 노동자위원회를 통해 노조를 재구성하려던 합의사항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대책위에서는 814일 총선을 실시한다고 발표했고, 회사측에서는 외부 불순세력운운하며, “대책위 11명은 인정할 수 없고, 총선은 치를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814, 오전 8시부터 총회가 시작됐다. 회사는 불법집회라며 종합운동장 입구를 포클레인 2대로 막고, 관리자들을 동원해서 정상조업을 하자며 피케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운동장에서는 총회가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 권오성 집행부를 99%의 찬성으로 불신임하고, 간선제 규약을 직선제로 개정한 후 대책위가 소집권을 가진 총선이 시작됐다. 5명의 입후보자가 유세를 하는 동안 장대비가 쏟아지자 6,000명은 체육관으로 들어가 유세를 계속했고, 나머지 노동자들도 자리이탈 없이 선거과정을 지켜봤다. 한편 대책위원회측은 조합원들에게 약속한 대로 위원장에 출마하지 않고 이형건을 내세워 당선시킬 수 있었다.

 

816일 저녁, 노동자들은 정주영 회장과 직접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817일 오전 9시에 효문로터리에서 관광버스로 출발, 오후 6시 서울 계동사옥에 도착했다. 이들은 가로수에 현수막을 내걸고 건물 앞 주차장 입구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가 그날 밤에는 사옥 앞 땅바닥에서 잠을 잤다. 이어 817일 밤에 출발한 이형건 위원장을 비롯한 2진이 818일 도착하자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818, 정주영 족벌체제를 풍자하는 연극과 시위를 하며 연좌농성에 돌입했고, 마침내 819일 정주영 회장이 나서 협상이 타결됐다. 협상타결 주요내용은 이형건 집행부 인정 91일까지 임금인상 타결 노사 당사자를 제외한 외부세력과 결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현대그룹의 핵심사업장인 현대중공업에 진정한 민주노조가 설립됨으로써 이제 현대그룹에서 노동조합은 특별하지 않은 당연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대자동차와 다른 계열사의 노동조합 결성

 

현대자동차는 이상범 등 5인의 소모임을 중심으로 1985년부터 유인물 작업을 전개해왔고, 19873, 임금인상투쟁 당시 중식거부투쟁을 전개하는 등 노동조합 설립 이전에 조금씩 투쟁의 파고를 키워오고 있었다. 198775일 현대엔진 노조결성, 715일 현대미포조선소 노조결성 소식에 힘을 얻은 이들은 721일을 노조결성일로 잡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속연맹 조직부장 이진우가 일정상의 이유로 불참하겠다고 통보하자, 노조 결성을 724일로 재조정했다. 724일 오후 6시부터 2시간에 거쳐 15평 작은 아파트에서 발기인 45명 등 총 48명이 모인 가운데 결성식을 진행했지만, 이날도 이진우는 참석하지 않았다. 24일 오후 4시 이미 어용노조가 결성식을 갖고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한 상태였다.

  

725, 전날 결성된 어용노조의 결성 보고대회가 개최되었지만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분노가 대회 자체를 뒤집어 버렸다.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타도’ ‘회사측 각성’ ‘한국노총 해체’ ‘이진우는 자폭하라등을 외치며 파업과 농성에 돌입했다. 임시총회를 통해 어용집행부를 즉각 불신임했으며 새로운 임원과 교섭대표, 각 사업부별 대책위원을 선출했다. 이어 밤 12시까지 계속된 회사측과의 교섭결과 신고증은 728일 오전 10시에 교부될 수 있도록 하고, 회사는 임원진의 사퇴 보장(자필 사퇴서 첨부) 725일 결성된 집행부가 임원의 역할을 맡는다 1개월 이내 총회 소집, 임원 재선출 집회로 인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늘 근무시간 인정 참석부서 관리자에 대한 문책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로써 현대자동차에도 민주노조가 설립됐다. 현대중공업에 비교한다면 아주 수월한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726, 현대중전기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27일부터 30일까지 매일 보고대회를 개최했으며, 30일에는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공장 안을 돌다가 현대중공업 농성 노동자들과 합세를 시도했다. 81일에는 현대정공 울산과 창원에서 동시에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또한 금강개발과 한국프랜지에서 노동조합이 건설됨으로써 울산지역의 현대계열사 모두가 노동조합 현판을 내걸었다.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결성과 총파업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의 결성은 모든 것이 그룹 회장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고, 각 사의 경영실적에 관계없이 그룹적 차원에서 임금인상이 실시되며, 모든 제도가 종합기획실에 의해 일괄 통제되는 현대그룹의 중앙집권식 가부장적 지배질서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였다.

 

198788일 오후 1시 전계열사 노조가 연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온몸으로 느껴오던 위원장들이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 있는 현대쇼핑센터 3층 예식장에 모여 회의에 들어갔다. 참석노조는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현대자동차, 고려화학, 금강개발, 현대종합목재, 한국프랜지, 현대건설 언양공장, 현대엔진, 현대정공 등 총 11개사였다. 이날 참석자는 각 사 위원장을 비롯 총34명이었는데 이는 대표자만이 아니라 핵심 조합원까지 참여할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참석한 사람들 전원에게 발언권과 투표권이 부여됐다.

 

이날 회의에서 의장에는 권용목 현대엔진노조 위원장, 부의장에는 각 사 노조 위원장, 사무국장에는 현대엔진노조 정흥용 회계감사, 사무차장에는 현대중공업노조 이채석 부위원장을 선출했고, 간사는 각 노조에서 1명씩 추천하여 위원회로 구성·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현안문제와 관련해서 임금 및 제수당에 대한 단체교섭을 협의회 차원에서 종합기획실과 직접 협상하기로 하고, 811, 14, 17일 세 차례에 걸쳐서 현대중공업 소재 도서관에서 그룹측과 협상하기로 했다. 11일은 상견례 겸 의사전달, 14일은 안건조정, 17일은 최종합의를 하기로 하여 각 노조에서 사장단과 종합기획실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어 이날 오후 5시에는 쇼핑센타 정문 앞에서 현노협 결성 보고대회를 가졌다.

 

현노협측에서 1차 협상일로 지정한 811, 협상 장소인 현대중공업 도서실은 문이 잠긴 채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회사측에서는 현노협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에 따라 12일부터 쟁의부, 조직부 등을 파견해 14, 17일의 협상이 결렬될 것에 대비한 쟁의계획을 수립하고, 각 노조의 쟁의부와 조직부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투쟁준비에 착수했다. 142차 협상도 결렬됐다. 설상가상으로 이날은 6개 노조 대표만이 참여하였고, 고려화학노조와 같은 곳에서는 현대그룹이 아니라는 이유로 현노협 탈퇴를 통보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측의 현장에 대한 악선전과 공격에도 현장의 분위기는 폭풍 전야처럼 긴장되기 시작했다. 15일이 지나면서 회사측에서는 더 이상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16일 오후 5시를 기해 6개사에 일제 무기한 휴업조치를 내렸다. 이어 철판으로 각 출입문을 완전히 용접하여 봉쇄하고, 50200톤에 이르는 철 구조물을 사용해 중장비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며, 중장비 차량은 바퀴의 바람을 빼고 키를 수거하는 등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현대중전기 정문 쪽에서는 철 구조물을 옮기는 회사쪽 관리자들에 맞서 특근 중이던 노동자들이 지게차 앞에서 장대 같은 소나기를 맞으며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이에 현노협은 17일 오후 1시로 예정되었던 투쟁을 출근과 동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수정하고, 투쟁준비에 돌입했다. 특히 머리띠를 이용해 빨간 띠는 의장단, 각 사 대의원 및 상집간부들을 중심으로 200여 명은 흰 띠, 경비 및 질서유지대 300명은 파란 띠로 구분하는 등 세밀한 준비를 진행했다.

 

817, 투쟁은 현대중공업 정문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정문 철책위에 올라선 오종쇄(현대엔진노조 교선부장)그 누구도, 그 어떠한 힘과 재물도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억압의 상징인 저 철책을 넘어야만 합니다라고 외치자 순식간에 정문이 돌파됐다. 이어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1,000여 명이 10km를 행진해 와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합류했다. 현대그룹 최초의 연합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억눌려 있던 조합원들이 현대중공업 앞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서부동에 대치하고 있던 전경들과 직접 충돌함으로써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현노협은 더 이상 운동장 집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체 참가자에게 질서, 비폭력, 의장단 요구 절대 준수를 복창하게 한 후 행진에 돌입했다. 그러나 정문과 후문으로 진출하는 노동자들에게 최루탄 세례가 쏟아져 돌파에 실패했다. 이어 전경과 대치해 있는 배후로 돌아온 2진에 의해 전경들이 완전히 역포위되자 불리하다고 판단한 도경국장은 남목까지 행진을 허용했고, 행진은 남목에서 돌아와 210,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해산했다. 

 

817, 본대는 해산했지만 투쟁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기숙사가 단전·단수되고 식당도 폐쇄되자 기숙인들 500명이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다이아몬드호텔 앞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연좌농성을 벌였고, 결국 다이아몬드호텔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어 제공, 정문 옆 사내 식당에서 배식을 받음으로써 사태는 진정됐다. 그러나 이날 밤 투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사측에서 다음 날 집회를 막기 위한 유인물을 뿌리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더욱 분노해, 유인물을 뿌리던 현대중공업 전 노조 집행부 홍사기의 집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 한편 남목 사택지 돌안아파트에서는 경비대장이 중심이 되어 유인물을 뿌리다 아주머니들에게 발각되어 팔다리가 부러지도록 얻어맞고 시궁창에 처박히기까지 했다. 안기부와 노동부 소장이 찾아와 중재를 자청하기도 했는데, 현노협에서 모든 실질적인 권한을 사장단에게 위임한다는 발표만 한다면 시위를 중지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주영 회장은 전부터 모든 권한이 사장들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현대그룹 기능직 종업원 평균임금이 40만 원 이상이며, 이외에 수당이 10만 원 정도라는 등의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818, 전날보다 더 불어난 현대노동자들과 가족까지 3,000여 명이 정문에 집결했다.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트럭, 지게차, 샌딩머신차 등을 전면에 세우고 정주영 회장과 족벌체제 타도화형식을 치른 후 행진을 시작했다. 남목고개에는 전경 4,50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4만여 명이 중장비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것을 제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km가 넘는 대열이 16km에 걸친 행진 끝에 공설운동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노동부차관이 급거 내려와 협상에 돌입했다. 이 협상을 통해 노동부 장관은 현대중공업 이형건 위원장이 이끄는 집행부가 회사측과 공식적으로 단체교섭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은 91일까지 타결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장 정주영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내용을 보장 위 사항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합의서가 발표됐다. 합의서에는 현노협 의장 권용목, 노동부 울산사무소장 옥치현, 안전기획부 소장 이찬희, 노동부차관 한진희, 울산시장 윤세달이 서명했다.

 

818일 투쟁은 평화적으로 정리되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이 합의서는 철저히 기만당하고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더 치열한 투쟁뿐이었다.

 

현대중공업 임금인상 투쟁

 

현대중공업 임금인상 투쟁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이미 울산지역을 떠나 서울로 북상하고, 전국적으로 파업투쟁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을 즈음에 시작됐다. 이 시기의 투쟁은 현대엔진노동조합 설립투쟁으로 불붙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이 대우조선 이석규열사의 투쟁을 계기로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산되고, 다시 현대중공업 임금인상 투쟁을 통해 마무리된다. 7~8월의 공세기를 거쳐 이석규열사 장례투쟁을 계기로 한 상호공방전, 그리고 공권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파업대오가 분쇄되는 그 마지막 순간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828, 권오성 집행부의 사표와 이형건 위원장의 재추대로 임원선거를 마친 신임집행부는 8295차 협상에서 ‘9112시까지 협상이 안 되면 태업에 돌입한다는 공고문을 써 붙였고, 91일 오후부터 태업에 돌입한 상태에서 교섭이 늦게까지 진행됐다. 새벽 3시 현대엔진이 인상률 14%로 타결되었다는 소식은 협상의 진척을 가져왔지만, 회사측은 또다시 봄철 임금협상 포기를 들고 나왔다. 이러한 진통 속에서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회사측에서는 새벽 6시부터 당시 조합원들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던 이재식을 외부세력과 연계된 자라느니, ‘과격난동자라고 다섯 번이나 거론하는 등 노골적으로 민주집행부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조합원들은 이 유인물을 보면서 몹시 분노하기 시작했고, 새벽 7시 협상결렬 소식이 들려오자 일시에 분노가 폭발했다.

 

출근과 동시에 개최된 보고대회에서 노동자들은 오전 9시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본관 점거, 오전 11시까지 안되면 가두로 진출하겠다고 결의했다. 노조측의 설득으로 오후 1시까지 대기했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집행부의 출발신호로 오토바이부대­지게차부대­덤프트럭­크레인­도보부대 순으로 질서정연하게 가두로 밀고나가기 시작했다. 8월 투쟁의 경험으로 이들은 방진마스크에 치약을 바르는 등의 준비를 하고 남목고개를 향해 나아갔다. 전투경찰부대는 성내삼거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오토바이부대가 기습적으로 이들의 저지망을 뚫어버려 효문로터리까지 후퇴해서야 겨우 대치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시청으로!”를 외쳤고, 집행부는 운동장으로 방향을 틀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처음부터 현대중공업 임금인상 투쟁을 강경한 쪽으로 몰고 가 무력진압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졌던 집행부들이 그러한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집행간부들이 시청쪽으로 향하는 조합원들을 막기 위해 중장비 앞에 드러눕자 이들은 집행부를 들어 길옆으로 비켜놓고 시청을 향해 행진해갔다. 반구동로터리에서 전경 50개 중대 8,000여 명이 동원돼 이중삼중으로 차단했으나 샌딩머신과 중장비를 앞세운 노동자들을 막지 못했다. 이때 동원된 중장비는 지게차 20, 덤프트럭 12, 소방차 3, 크레인 15, 일반 중장비 30대 등 80여 대와 샌딩머신을 장착한 트랜스포터 1대였다.

 

오후 5시 울산시청에 도착한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시청 앞 마당과 도로를 가득 메우자 시청을 지키던 전경들은 흔적도 없이 퇴각해 버렸다. 시장실에서 검찰지청장, 법원장, 교육감, 노동부 담당자, 안기부 담당자, 경찰서장, 울산주재 부대 연대장과 노조대표가 참여한 회의가 진행됐지만 회사측이 빠진 상태에서 협상이 진척될 리 없었다. 울산지역 위수령 이야기도 나왔지만 노조측과 윤세달 시장이 이에 반대하고, 시장은 노동자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장들이 운동장까지 동행해 함께 철야농성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일부 조합원들의 반대를 설득해 대오를 운동장으로 돌렸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빠져나간 뒤 갑자기 몇 명이 여기서 결판을 내야지, 시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며 항의하다가 유리창을 깨뜨리자 격앙된 노동자들도 함께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집행부, 대의원놈들, 빨간띠 두른 놈들, 모조리 죽여라며 이재식 사무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각목으로 후려쳤고, 간부들이 맞으면서도 출입증을 요구하자 꽁무니를 뺐다. 이때 차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차량 7대를 모두 90도 각도가 되게 모로 세워놓고 기름 넣는 주입구를 땅으로 향하게 하고 불을 질렀다. 머리가 길고 윗도리는 현대작업복을 입었는데 바지는 사복을 한 건장한 남자 10여 명이었다. TV와 신문에 자동차가 불타는 장면이 실리면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국민들로부터 너무한다는 질책을 받게 되고 공권력 개입의 훌륭한 명분을 안겨주게 되었다. 의문투성이의 난동과 방화사건은 시위대의 소행이라고 발표됐지만, 이미 사전에 준비된 것이 분명했다. 이재식 사무장은 아직 남아있던 노동자들을 설득해 중장비와 함께 운동장으로 철수했다.

 

한편 운동장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는 도중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태화교 시내 쪽 끝부분에서 술 취한 운전자가 도로를 통제하고 있던 통제반원들과 실랑이 하다가 차량을 뒤로 빼는 척하며 그대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차는 골목어귀에 설치되어 있던 목책을 뛰어넘어 주차 중인 4.5톤 트럭을 들이받고 멈췄는데 5명의 노동자가 쓰러졌고, 그 중 3명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채태창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시신은 동강병원으로 옮겨졌고, 다음날 아침 채태창의 시신을 영구차에 싣고 전하동으로 옮기기 위해 오토바이 부대가 파견됐다. 시위대는 전날 힘차게 나갔던 길을 운구차를 앞세우며 눈물을 삼키며 돌아왔다.

 

92, 시신을 해성병원으로 운구해 온 노동자들이 전경들과 옥신각신하는데 본관 4층에서 78명이 의자를 들고 유리창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최루탄가스 때문이라고 생각해 별 의심 없이 지나쳤다. 인력관리부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도 때려부수자고 선동하자 그때서야 의심한 노동자들이 당신들 누구냐?”며 신분을 확인하려 하자 수송부 소속이라며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물론 수송부에서도 그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괴범 중 5명을 붙잡아 전체 노동자들 앞에서 신문한 결과 2명은 미성년자여서 그대로 풀어주었고 나머지는 경찰에 인계했는데 어이없게도 경찰은 이들을 바로 석방해버렸다. 또 다시 노동자들이 파괴범으로 몰릴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것이다. 이로써 일련의 사태가 노동자들의 목을 죄어오기 위한 자본측의 계략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93, 새벽 5시경 백골단과 전경들이 정문사수대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노조사무실로 뛰어들어, 잠자고 있던 대의원을 비롯한 노조간부 89명을 꼼짝 못하게 연행하고 말았다. 이형건 위원장, 김진국 수석부위원장, 정영빈 여성부장 등 노조간부 대부분이 연행되고, 이채석 부위원장, 장세근 홍보부장과 김형권 총무부장만이 싹쓸이 연행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연행되었던 이형건 위원장이 다이아몬드호텔 앞에서 수습 잘하라며 석방되자 조합원들 중 유단자 수십 명이 자원경호대를 구성하여 호위했다. 집회에서 이형건 위원장은 시청 파괴는 노동자들이 한 것이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것이라는 발언을 한 후 피로로 쓰러졌다. 그는 95(토요일), 운동장에서 조합원들에게 구속동지들이 석방될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투쟁하기 위해 내일은 쉬고 월요일 아침 8시에 다시 만나자고 당부한 후 저녁 6시 반 채태창의 보상문제로 회사쪽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강제 연행되고 말았다. 이후 경찰은 집회에서 강경 발언하는 사람은 무조건 체포했고, 회사측은 전면적인 휴업을 실시했다. 투쟁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95, 만세대에서 그 후 전개될 17일에 걸친 대파업의 전기를 마련해 준 감격적인 승리가 이루어졌다. 90여 명을 연행한 경찰은 여세를 몰아 방어진 일대와 만세대 주변에 수천 명의 병력을 깔고 위압감을 조성했다. 더구나 회사측에서는 휴업공고와 함께 숙소지역에 단전, 단수, 식당 폐쇄까지 실시했다. 이때 기숙사에서 살고 있던 미혼노동자들 20여 명이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두들기며 한 줄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억압의 정적 속에서 우리에게 밥을 달라 훌라훌라하며 훌라송을 부르는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시위대는 50명으로, 100명으로, 500명으로 불어났다. 이어 이들은 숙소 돌기를 끝내고 만세대 아파트를 돌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밥을 달라! 전기를 달라! 물을 달라!”며 만세대 아파트를 휘돌자 시위대는 5,000여 명으로 거대한 물결이 되었고, 전경들은 혼비백산해 철수해버렸다. 시위대가 다시 기숙사 앞길로 접어들어 중간쯤 오는 길에 숙소에 전기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무참한 패배 끝의 소중한 승리였다. 이때부터 기숙사에서 배식을 하지 않자 만세대의 노동자 가족들은 새벽마다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기숙사 노동자들과 공동취사, 공동식사를 했다. 뜨거운 신뢰와 믿음이 굳건하게 형성된 것이다.

 

910, 민주노동자 채태창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회사측과 경찰측의 집요한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선 구속자 석방, 임금인상 타결을 내세우고 노동자장으로 치를 것을 선언했지만, 9일 가족장으로 치러진 것이다. 당시 7일장을 넘긴 고인의 부인이 노동자들 앞에서 눈물로써 채태창의 장례를 호소했다. 

 

한편 채태창의 장례가 치러지자 회사측은 울산지역 노사문제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최병권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장, 이현태 현대중공업 부사장, 신익현 이사, 도영희 현대엔진 부사장, 한유동 현대엔진 전무가 중심이 됐다. 이들은 장례가 끝나자 여세를 몰아 울산시청에 현대중공업 노조해산 명령 요청서를 제출했다. 임원구성 절차가 잘못됐고, 불법집회를 주도했으며 시청 방화와 파괴를 선동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시청 측에서는 해산요청을 거부하고, 대신 절충안으로 임원개선 명령을 경상남도에 건의했다. 경상남도는 신속하게도 12일 새벽 7시부터 도지사, 교육감, 노동부 마산사무소장 등 대책위원 10명이 모여 이 건의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914일에는 치안본부가 나서 경상남도 노동위원회가 임원개선 명령을 내리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내리지 말도록 요구했지만, 경상남도 노동위원회는 15일에 1차 심의, 17일에 2차 심의를 거쳐 임원개선 명령이 타당하다고 의결했다.

 

912, 오후 3시 현대중공업노조 김형권 총무부장이 참여한 가운데 현대엔진노조에서 현노협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때 현대중공업 관리자들이 들이닥쳐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며 김형권 총무부장을 연행하려고 했다. 이때 휴식시간이라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현대엔진 조합원들이 노조간부들을 다 잡아간다는 소리에 달려와 김형권을 싣고 떠나려는 봉고차를 가로 막았다. 그러자 차를 잠시 뒤로 뺐다가 곧이어 가속기를 있는 대로 밟아서 사람들을 들이받았고 이상남이 차 밑에 깔리게 되었다. 그러나 운전사 배무한(총무부 소속)은 김영구(안전관리과)밀어붙이라는 소리에 차를 그대로 내몰았다. 이상남은 머리가 앞바퀴에 깔린 채 34m를 끌려갔고, 사람들이 에워싸서야 겨우 차를 멈출 수 있었다. 그는 귀고막이 터지고 광대뼈가 깎였으며 코뼈, 골반뼈, 무릎뼈, 발목뼈가 부러지고 척추와 시신경을 다쳤다. 김형권 총무부장도 납치된 그 잠깐 사이에 목이 밟혀 실신해 있었다. 두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면서 납치범들을 붙잡았는데 그들은 현대중공업 총무부 직원 3, 조남길 경비대장과 대원 2, 안전관리과 소속 직원 1명이었다. 이들은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분노 속에서 전하1동 파출소로 넘겨진 후 다음날 울산경찰서에서 석방됐다. 이에 비해 3주간 혼수상태에 있었고, 그 후 1년이 넘도록 퇴원하지 못한 이상남은 해성병원에서 6주 진단을 받고 방치되었다가 913일에야 동강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되었다. 현대엔진노조에서 919일까지 회사측의 직접방문을 통한 공식적 사과가 없으면 현대중공업 총무부 건물 앞에서 농성에 돌입할 것을 공표하자 이현태 부사장이 34명의 현대엔진 대의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치료비 등 일체를 현대중공업에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노동조합이 약화되면서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916, 농성 15일째인 이날 정주영 명예회장이 수습안을 내놓았다. ‘구속자 전원에 대해 당국의 협조를 얻어 회사가 신병보장 조건으로 석방을 요청하고, 전원 직장 복귀시키며, 임금은 새 집행부가 선임되기 전이라도 91일자로 현대엔진 수준인 14%를 인상한다. 또한 921일부터 정상조업하며 이에 응하면 쟁의기간 중의 모든 임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몽준 사장은 변호사 선임과 구속자 가족 생계비를 책임지겠다고 덧붙였지만 대의원대회에서 이를 부결시켰다. 조합원들은 정몽준 사장과 관리자들이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어깨띠를 두르고 나누어준 일하며 협상하자는 유인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구속자 무조건 즉각 석방이었다.

 

917, 경상남도에서 임원개선 명령이 내려졌다. 조합원들은 임원개선 명령을 취소하라며 격렬히 요구했지만, 감옥에 있던 이형건 위원장은 김종섭 교육홍보 차장이 가져온 정상조업 방안이라는 합의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김종섭 차장은 합의서에 도장을 받은 뒤 내용을 살펴보니 기한이 명시되지 않아 추석 전에 석방되지 않을 시는 재농성에 돌입한다는 내용을 추가시켰고, 그는 이 문제로 회사측에 의해 사문서 위조로 고발되어 구속됐다. 말썽 많은 조업정상화 방안에 관한 노사합의 사항은 대략 이형건 위원장 등 구속자 전원을 추석 전까지 석방되도록 노력하고, 석방을 위해 회사와 노동자대표 공동발의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탄원서를 제출하며, 석방되면 원직복직, 행정소송에서 승소할 경우 원 조합직위에 복귀 회사는 구속자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며 부상자의 급료 보장 임금은 현대엔진 수준으로 하고 임금협상이 타결되면 91일부로 소급 임원 개선명령에 대한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회사는 소송에 필요한 제반비용 적극 지원 922일부터 정상조업 재개 등이다.

 

이러한 조업정상화 합의 결정에 대해 전 조합원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921노사화합의 날에 중간관리자들을 총동원해 다양한 회유책을 썼지만 수천 명의 조합원들이 운동장에 모여 합의안 철회와 대의원 총사퇴를 요구했고, 합의안에 도장을 찍었던 수습대책위원과 대위원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회사측은 919일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21일을 노사화합의 날로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사항 중 지켜진 것은 임금인상을 현대엔진 수준으로 한다는 항목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919일 현대엔진의 현노협 참가안 부결, 921일 현노협 차원의 울산지역 동맹파업 실패 등이 이어지면서 922일부터 정상조업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부상 중에도 쉼 없는 투쟁을 전개해온 김형권도 조업이 재개되자 동료들이 있는 감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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