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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노동법개정투쟁과 고용보장투쟁
[1994년 노동법개정과 고용보장 투쟁 사업방향]
전노협은 1994년 노동법개정 투쟁의 주요 요구로 △노동조합법 및 노동쟁의조정법 개정 △근로기준법 개악 및 공공부문 노사관계법 제정 반대 △근로자파견법 제정 반대 △ILO 조약 87조 비준 요구를 설정했다. 그리고 노동법개정 투쟁을 통해 다양한 업종별 조직과 산업별 노조를 건설해 민주노조 총단결의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는 한편 사회개혁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정부는 개별적 노사관계법 개악과 고용 관련 근로자파견법 도입을 목표로, 민주노조 진영에서 요구하는 집단적 노사관계법 개정에 대해서는 유보 입장을 취하면서 1994년 초부터 노동법 개정을 공론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노협은 노동법 개정을 위해 지속적인 정책·교육·선전과 함께 1994년 내 노동법 쟁점화와 국회 상정 시 정치적 대응, 5․1절 기념대회와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한 대중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제연대 활동을 강화해 ILO 총회 대표단 파견, 국제노동기구에 서한 보내기와 방문, 각국 노조 단체의 지원 및 연대 행동을 조직하기로 했다.
또한 노동법 개정 투쟁과 함께 고용보장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한다는 방침에 따라 △근로자파견법 저지 △불법 근로자공급사업 근절 △외국인노동자 고용 확대·수입 저지 △고용보장을 위한 제도개선투쟁 강화 △단위노조의 고용보장 쟁취 투쟁 지원 △연대투쟁의 활성화를 사업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고용정책 연구, 고용보장투쟁 기획, 토론회를 활성화하는 한편 ‘고용안정쟁취를 위한 특별위원회’(고용특위)를 운영하기로 했다.
[노동법개정 투쟁]
노동법개정투쟁의 전개 전노협은 선전, 쟁의, 정책, 서노협 선전부 등을 중심으로 선전자료 기획팀을 구성해 11월 8일 노동법 개정요구 선전자료집 <조합원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 건설을 위하여>를 1천 부 발행해 전노협 가입 및 미가입 노조들에 배포했다.
중앙 차원에서는 노동법 개정을 위한 꽃다지 공연을 9월 28~30일 세종문화회관(1만여 명 참석), 11월 5~6일 연세대 노천극장(6천여 명 참석)에서 개최했다. 지역 차원에서는 지역 문화제와 결합해 노동법 개정의 필요성을 부각했다.
국제연대 활동으로는 국제자유노련(ICFTU) 대표단이 방한했을 때 한국의 노동법 개정 필요성을 적극 개진하고 10월에는 ILO 추가 제소를 통해 ILO의 기존 권고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1994년 임금인상 투쟁에서 쟁점 사항과 방위산업체 쟁의행위 금지 조항을 집중 부각했다.
국제노동기구(ILO) 산하 결사의자유위원회는 1993년 10월 14일 전국노조대표자회의가 추가 제소한 것과 관련, 1994년 6월 27일에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개입금지, 공공운수 분야에 대한 직권중재, 노조에 대한 업무조사권 등은 ILO 헌장에 규정돼 있는 결사의 자유 원칙에 어긋난다며 한국 정부에 개정을 권고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미 1993년 11월 한국 정부에 대해 복수노조금지 조항, 제3자개입금지 조항, 교사를 비롯한 공무원의 단체행동권금지 조항 등을 개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었다.
결사의자유위원회는 국제노동기구의 최고집행기관인 집행이사회의 직속 기구로서 회원국들이 ILO 헌장에 명시되어 있는 결사의 자유 원칙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조사·심의하는 상설기구로, 위원회가 결정하면 ILO 의결기구인 이사회가 그대로 추인하는 것이 관례다. 정부가 노동법을 악용해 서울지하철노동조합에 대한 직권중재, 전노대 공동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등으로 탄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사의자유위원회는 국내법은 결사의 자유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한국 정부에 상기시켰다.
노동법개정 투쟁 평가
1994년 노동법개정 투쟁은 시기적으로 민주노총 건설과 직접 결합해 진행했다.
민주노총 건설은 청원식 노동법개정 촉구 투쟁을 뛰어넘어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무력화하고 자주적 단결권을 쟁취하기 위한 대중투쟁으로서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따라서 많은 과정상의 어려움에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건설준비위원회가 대중적으로 가시화한 것은 합법성 쟁취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을 통해 자주적 단결권을 쟁취하려는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다양한 대중사업과 결합해 노동법개정 요구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대내외적으로 인식시키는 노력은 부족했다. 교육, 선전, 문화공연에서도 노동법개정의 필요성은 의례적으로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1인 1소깃발 서명사업을 제외하고 노동법개정을 위한 구체적인 대중사업은 없었다.
1994년 임단협투쟁 과정에서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등 독소조항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 등 현안으로 걸려 있는 조직을 중심으로 사안별 투쟁을 조직한다는 계획도 힘있게 실천하지 못했다. 교도소 항의방문 등을 통한 구속자 석방, 수배 해제 요구를 쟁점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1994년 노동법개정 투쟁은 민주노총 건설과 결합해 진행했으나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노동법개정 요구를 제대로 부각하지 못한 셈이다. 여기에는 1994년 노동법개정 투쟁을 민주노총 건설과 분리해 독자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민주노총 건설로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고용보장 투쟁의 전개]
불법용역 철폐 및 파견법 저지를 위한 대응
1994년에는 단위노조에서부터 불법용역을 철폐시켜 파견법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전선을 형성해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불법용역 철폐투쟁은 1994년 1차 고용특위, 고용투쟁사업장 간담회, 전노대 운영위원회에서 결의한 사항으로 1994년 임단협 갱신투쟁과 결합해 대응투쟁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임단협 시기에 단위노조 차원에서 불법용역 철폐에 대한 요구가 광범위하게 제기됐으며 이에 대한 지원과 결합을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병원노련 부산지부에서는 불법용역에 대한 법률적 대응과 함께 용역철폐 투쟁을 전개했으며, 창원 현대정공, 대원강업, 대흥기계 등에서는 용역의 정규직화를 단협에 명시하거나 투쟁을 통해 쟁취했다. 아시아자동차, 기아자동차 등에서도 그동안 방치돼 온 불법용역과 관련 단협 요구, 용역실태 파악 등을 통해 대응을 준비했다. 지노협들과 언론노련 등에서도 용역 관련 법률적 대응, 실태 파악 등을 실시했다. 이후 신천개발에서 법원청사 용역에 대한 사용자 확인신청을 통해 새로운 대응을 모색했으며, 이를 계기로 6월 21일 불법용역 철폐촉구 기자회견과 함께 성명을 발표했다. 정기국회에서는 아시아자동차 등 8개 노조가 불법용역 단속촉구 진정서를 국정감사 자료로 제출하기도 했다.
경영합리화 등에 대한 대응
1994년 임단협투쟁 과정에서는 경영합리화에 따른 고용안정 조항의 확보가 핵심적 과제의 하나로 제기됐다. 이 시기는 기업조직의 변화를 비롯하여 기술혁신과 자동화, 배치전환, 공장 이전, 부도, 휴․폐업 등 다양한 형태의 고용조정과 신인사제도나 직급제도 개편이 광범위하게 추진돼 이에 따른 조합원의 고용불안도 크게 증가했다.
이와 관련하여 각 지역·업종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아폴로산업(라인축소, 별도법인화), 한일전장(법인체분리, 하청화), 현대정공(하청화, 합리화), 나우정밀(단협, 하청화), 성남 OPC(파산 시 임금채권, 법정관리), 현대중공업(고용보장기금, 사내하청·도급), 금호특송(양도), 배이산업(생산축소, 배치전환), 삼경복장(휴폐업), 갑일전자(부서이동, 라인이전), 오트론(법정관리), 한보철강(공장 이전), 대흥기계(공장 이전), 신창전기(공장 이전), 대우자동차 부산지부(사업장 이전), 이동통신(직급체계) 등 단위노조 차원에서 치열한 대응투쟁을 전개했다.
1994년에는 대부분 사업장에서 경영합리화와 관련된 다양한 고용문제에 직면했으나 마땅한 대안을 확보하지 못해 대응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으며, 공동대응을 조직하는 활동도 부족했다.
공기업 민영화 문제에 대한 대응
1994년부터 대대적인 공기업 민영화 조치가 시행된 가운데 전노협은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하기로 했다. 3월 29일 민영화 대상 노조 간담회를 하고 4월 26일에는 ‘전국 공기업 노동조합 민영화대책위’(데이콤, 이동통신, 한국PC통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한국중공업, 원진레이온, 대한중석, 남해화학, 한국비료, 국민은행, 효성중공업, 동남은행_12개 노조 참가)를 구성했다. 5월 20일 4개 노조 26명이 참여한 가운데 정부청사 앞에서 홍보활동을 벌이는 등 공동대응을 추진했다.
이러한 활동은 공기업 민영화에 따른 고용문제를 크게 부각하기보다 주로 공공성 유지, 경영 민주화 및 참여 확대, 재벌배제 등을 소극적으로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원진레이온의 경우는 민영화 이후 파산에 따른 재취업 대책 확보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했으며, 대한중석(민영화된 이후 고용안정 등에 관한 단체협약 쟁취투쟁),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민영화 반대투쟁), 고속도로시설공단(민영화에 따른 고용보장 요구) 등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전개됐다.
외국인노동자 고용 문제
1994년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문제가 본격적인 사회문제와 국제문제로 비화한 가운데 편법적인 취업연수생 확대수입정책이 추진됐다. 전노협은 외국인노동자 취업연수제도 철폐 투쟁에 적극 나서기로 하고, 민주노총준비위 등 민주노조 진영에 공동투쟁을 제안했다. 6월 13일에 ‘외국인 노동력 확대수입의 문제점과 대책’에 대한 자료를 작성·배포했으며 9월 10~12일에는 ‘3차 고용보장을 위한 노동조합간부 교육수련회’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다. 9월 22일부터 10월 2일까지 일본에서 열린 APWSL(Asian Pacific Worker’s Solidarity Links) 주최 포럼 ‘동아시아 외국인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운동’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10월 27일에는 전노대 등 10개 단체 공동주최로 ‘현대판 노예노동자, 외국인 취업연수생 인권실태 개선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으며 성명서를 공동발표했다. 취업연수생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 18명은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해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다. 11월 25일에는 민주노총준비위 등 10개 단체에서 주최한 ‘외국인 취업연수생 인권실태개선 촉구 캠페인’에 100여 명이 참석해 종묘에서 명동성당까지 가두행진을 전개함으로써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한편 1995년 1월 초 9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삼영 사업주의 무자비한 학대를 피해 외국인노동자 피난처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13명의 외국인노동자가 1월 9일 10시 명동성당으로 진입해 농성을 시작했고, 1월 12일 32개 단체(이후 38개 단체로 확대)가 모여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인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외국인노동자공대위)를 구성해 지원·연대활동을 전개했다. 농성자와 외국인노동자공대위는 △농성자 13명의 여권과 임금 직접지급, 적절한 사과, 신변·재취업 보장 △3만여 명의 산업기술연수생에 대한 임금과 여권의 직접지급 △노동자 자격인정하고 전면적 재계약 △산업기술연수제도 즉각 철폐 △필요한 외국인노동자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노조와 사전합의 및 내국인 노동자와 동등자격 부여를 요구했다. 1월 15일 주일 네팔대사가 방한했고 16일에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기자회견을 연 데 이어 농성 9일만인 17일 밤 10시 30분에 박상규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장과 △네팔인 산업연수생들이 요구하는 체불임금 전액 즉각 지급 △한국인 고용주들이 보관해 오던 여권 즉각 반환 △임금 및 노동조건 보장 등의 내용으로 합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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