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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에 가려진 생존권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월가’에서의 계급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비롯된 빈곤화(양극화)는 자본의 끊임없는 부의 축적으로 모아지며 ‘월가’에서 시작된 투쟁이 파죽지세로 번져가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요구에서 시작된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격과 저항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금융세계화로 찬란하게 조명된 희망의 장밋빛이 점차 절망과 허상임이 확인되고 있다.
2008년 대공황 이후, 빈곤이 심화되었지만 완만한 정세가 유지되었던 이유는 거품의 영향이었다. 일자리를 잃고 당장 주머니에 돈이 없지만 가상의 소득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즉, 일단 주식이나 집을 사고 그 값이 올라갈 때, 주머니에 돈은 없지만 주식과 집에 대한 가치 상승을 따지면 재산이 늘어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상의 소득을 늘이기 위해 노동자, 민중은 집값과 주식이 계속 오르기를 기대하며 빚을 내서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 집값과 주식은 몇 년간 계속 올라간다. 그 결과 가구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런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헛된 기대심리가 한시적 평온을 유지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시작된 대공황은 오랜 기간 부풀려졌던 거품이 한 번에 터짐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재산은 반 토막, 4분의 1토막이 나고 말았다. 실제는 없었던 재산이지만 말이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자본에 대한 맨살이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소득은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빚은 쌓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당시 미국인들은 “우리 세금으로 금융자본을 살리자 마라! 복지를 확충하라!”고 외쳤지만 3년이 경과한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월가점령시위’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으며 투쟁의 성격은 자본가의 탐욕에 대한 저항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자본을 점령하라!”며 자본주의 본질을 폭로하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복지’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충분한 외환보유와 건실한 재정구조를 갖췄다는 한국의 예도 전혀 다르지 않다. 장기간 부풀어 오른 거품도 같은 양상이고, 사회적 쟁점은 널부러진 채, ‘사회복지’가 정치논리에 편중되어 본질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혼란을 조성하는 형국이다. 노동자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비정규직, 그에 따른 정리해고 등에서 비롯되는 절망이 팽배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복지’가 모든 쟁점을 해결할 대안인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10.26 선거를 기점으로 여, 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에서는 복지에 대한 합창소리가 요란스럽다. ‘선별적 복지’, ‘보편적 복지’를 떠들어대며 복지야말로 미래에 대한 장밋빛인양 사회화되는 현상이 ‘죽음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 ‘실존을 포기하지 못해 생존을 헌납하는 노동자들’, ‘실존도 생존도,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산 편성을 잘하고 자본가들이 세금을 조금 더 내고, 기부를 늘려 복지정책을 만든다고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으며 ‘복지담론’이 빈곤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복지가 나쁘다는 건 결코 아니다. 물론 복지는 좋은 것이고 그것을 확대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한국의 복지는 OECD국가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꼴찌를 기록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복지비가 GDP의 7% 대에 간신히 걸려있는 한국이 유럽 국가들의 20~30%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건 정치논리로 읊어대는 복지정책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서, 북유럽의 국가들은 19세기 말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경과하며 20세기 후반부에 복지국가를 선언했으니 무려 100년의 계급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이 정착되었기에 선진국이라는 미국, 일본보다 배에 가까운 사회복지가 가능했다.
자본의 헤게모니가 온전히 관철되고 있는 우리의 경우, 정치권에서 떠들어대는 ‘복지’는 노동자, 민중에게 떡고물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나마 정치적 논리에 머물 공산이 매우 크다. 그 근거는 경제대국이라는 미국과 일본의 복지가 GDP의 16%와 18%대로 한국보다는 두 배가 높지만 유럽국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국의 복지비가 GDP대비 배가 늘어난다고 치자. 그렇다고 핵심적인 불안정 노동과 생존의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취약계층에 약간의 영향을 주겠지만 오로지 그것뿐이다. 주거사정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의료보건, 교육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고용이 안정되고 임금이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현안 쟁점인 비정규 악법과 그에서 비롯되는 정리해고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진정한 복지는 노동자 세상을 만들 때 가능하다.
이렇게 정치권에서 이슈를 삼고 있는 ‘복지’가 시민단체와 노동단체에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민주노총, 여성단체연합 등 6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복지 상황을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한다는 기획팀이 꾸려져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복지는 중요하지만 노동자계급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복지를 들이대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의 복지담론이 노동자계급의 담론으로 형성되는 순간, 당면한 쟁점에 투쟁을 집중하기 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힘이 분산되어 투쟁방향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 또한 노선과 노동자의식이 퇴보할 수 있으며 어쩌면 노동자 민중에게 거품과 같은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보수정치권의 들러리 결과도 우려되고, 광란의 자본주의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공황과 빈곤은 정책의 오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되기에 구조적 모순을 깰 때, 변화발전이 되는 것이라 확신한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노동자들의 의욕과 열정에 빨대를 꽂아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사회이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기본권은 끊임없이 유린되고, 생존의 벼랑에서 버티다 끝내 좌절과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여 목숨을 끊는 노동자의 행렬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가 목숨을 지탱하는 최저의 비용인 ‘최저임금’조차도 사활을 걸며 깎아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본의 비열함에서 ‘사회복지’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비정규악법을 분쇄하고 비정규직을 철폐하여 야만적인 정리해고를 없애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여 노동자가 이 사회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전망인 동시에 복지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