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동운동사건
..... 원진레이온 휴폐업 거부투쟁(1993년 6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3-06-21 조회 75

원진레이온 휴폐업 거부투쟁(19936)


원진레이온투쟁의 배경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1991년 김봉환 열사 장례투쟁, 1992년 직업병 인정기준 개정을 위한 10만인 서명운동 등 직업병 추방과 재취업보장을 위한 투쟁을 꾸준히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933월 초 직업병 추방운동에 앞장선 서경춘 전 노조 위원장이 중형을 구형받고 최승룡 노조 산안부장이 이른바 지역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거쳐 해고됐다.

노조는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며 집회와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황동환 노조 위원장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은 많지 않았고, 현장도 침체돼 있었다. 어려운 현장 조건 속에서 직업병 환자들의 투쟁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초부터 시작해 두 달간 계속한 사장실 철야농성과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 사무실 점거 철야농성 투쟁은 성과 없이 막을 내려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장 방사과에서 화재사고가 빈발하자 조합원과 노동조합 집행부는 회사측에 대책을 촉구했다. 회사는 공장가동을 중지하자고 제안했고 집행부도 동의했다. 그러나 회사는 가동중단 합의 후 사후 대책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장기휴업을 공고해 버렸다. 회사측은 원진레이온 공장의 특성상 가동을 한번 중지하면 장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고 화재사고의 개선을 위해서도 장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충분한 절차와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가동을 중단해버린 것이다. 집행부도 동의했지만 침체된 조합원 대오가 오랜 휴업 기간에 흩어질 수도 있고 언제 폐업될지도 모르는 상태가 돼버렸다. 현장은 점점 약화돼 결국 휴업 말기에는 30~40명의 조합원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집행부와 조합원은 폐업 음모에 맞서 완강하게 공장을 사수했다. 이후 폐업투쟁을 위한 지도력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직업병 대책과 고용보장 쟁취를 위한 원진 비상대책위원회 결성

정부는 199368일 당정협의회에서 일방적으로 원진 폐업방침을 결정하고 사후 대책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원진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집행부에서는 조합원 대중의 분노를 즉각 투쟁으로 만들어나가고 지난 휴업 시기에 열성적이었던 조합원을 기반으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분위기와 요구사항을 하나의 대오로 조직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집행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대책 없는 폐업조치 즉각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곧바로 원진 노동자를 기만한 정부종합청사, 민자당, 산업은행 등에 항의방문 투쟁을 전개했다. 집행부의 이러한 투쟁에 그동안 억눌려 있던 조합원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해 투쟁 대오가 확대됐다. 이러한 대중적 분노를 토대로 원진 문제와 관련된 모든 피해자를 직업병 대책과 고용보장 쟁취를 위한 원진 비상대책위원회(원진비대위)’로 묶어냈다. 621일 출범한 원진비대위에는 원진 가족협의회, 원진노동자직업병협의회 등 직업병 피해자 단체, 노동조합 조합원, 반장, 주임, 과장, 부장 등 관리자까지 포함했다. 연이은 비상총회에서 원진 전문병원 설립, 정부투자기관 재취업보장, 요양 중 사망자 유족보상 지급 등의 요구를 확정했다.

원진비대위는 출범 이후 7월 한 달 동안 항의방문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산업은행과 정부는 원진비대위의 내부 분열을 노리고 탄압을 가해왔다. 항의방문 투쟁을 빌미로 지도부를 고소·고발했고 조합원들을 협박해서 퇴직금을 수령하게 하는 등 투쟁 대오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원진비대위는 이러한 분열 의도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원진비대위의 방침을 어기는 경우 첫째, 총회 시 발언권과 투표권을 박탈하고 둘째, 폐업 관련 합의서 작성 시 불이익을 준다는 규율을 유지해 나갔다. 원진비대위와 정부의 교섭창구는 있었지만 실질 교섭은 진척되지 않았다. 그래서 원진비대위는 조직이 어느 정도 정비되는 시점인 8월 초순쯤 투쟁을 확대해 8281차 연대집회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진비대위가 직업병 피해자 단체, 관리자, 조합원까지 3자의 통일적 조직으로 출발했음에도 피해자 단체가 분열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교섭 시 대표에서 피해자 단체가 빠졌고 지도부가 전체의 집단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는 이후 직업병 대책 활동이 미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연대투쟁의 전개

828일을 기점으로 투쟁의 양상은 대규모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원진비대위는 첫 집회투쟁에 성공하기 위해 집회 전 일주일 동안 명동성당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집회에는 1,2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모였다. 원진 집회는 위축된 정세에서도 당당하게 도심지의 차도로 힘있게 행진하는 전투성을 보였다.

정부는 그동안 형식적으로 대응했던 교섭에서 원진레이온의 법정관리인인 산업은행을 내세워서 800명의 원진 노동자에게 20만 원의 건강검진 비용 지급 폐업 수당으로 통상임금 6개월분 지급 폐업 이후 발생한 직업병 환자에게 지급할 민사배상금으로 30억 원을 재단법인에 출연 등의 안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안을 받지 않으면 8월이나 9월 초순에 파산조치 하겠다고 협박했다.

1차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원진비대위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유물인 원진 직업병 문제를 김영삼 정권이 민주개혁의 일환으로 직접 해결해야 함을 강력히 요구했다. 918일과 25일의 2·3차 연대집회도 이러한 기조로 진행됐고 각각 1,500, 1,800명으로 참가자 수가 갈수록 늘었다. 4차 연대집회의 규모와 참석자들의 결의는 그동안의 어느 집회보다 높았다. 집회 후 청와대를 향한 시위와 행진이 경찰에 가로막히자 참석자들은 도로 연좌투쟁을 완강히 전개했다. 경찰은 연좌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며 진압했다.

19931211일 원진 노동자 3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리시 민방위교육장에서 비상총회를 열었다다. 이날 비상총회에서 미완의 과제인 원진 전문병원 설립, 2기 지하철공사와 한국전력공사 등 정부투자기관 재취업을 완전 쟁취하기 위한 1994년 제2차 투쟁을 결의함으로써 원진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 시작됐다.

1993년 전국노동자대회 참가를 끝으로 원진비대위는 1993년 투쟁을 일단락지었다. 1993119일 노동부, 산업은행, 원진비대위 3자는 원진 폐업 관련 후속 조치로 회사측은 직업병 환자에 대한 민사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현금으로 50억 원, 파산채권으로 50억 원, 토지매각에 따른 잉여자금 50억 원 등 모두 150억 원을 출연하고 이의 운영을 위해 공익재단법인을 설립한다. 재직노동자 755명에 대해 1인당 특수촬영비 254,000원 등 1,508,000원을 정밀검진비로 일괄 지급한다. 노동자 1인당 평균임금 5개월분의 폐업위로금과 재취업지원비 250만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노동부는 직업병 대책으로 종합병원급 산재병원 설립 원진 노동자 검진 병원을 경희대병원·이대목동병원·중앙대병원·순천향병원·국립병원 등으로 확대 원진 노동자 재취업을 위해 노정 특별위원회 구성 해고자 4명 원상복직 및 고소·고발 취하에 합의했다.

2기 지하철 5·6·7호선 건설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부분적인 개통을 앞둔 상황에서 19931124일 정부는 합의서에 대한 후속 조치로 당정협의회를 통해 원진 노동자 620명을 2기 지하철에 우선 취업시키기로 했다.

 

원진레이온 투쟁의 의의

원진레이온 투쟁은 산업재해·직업병 추방과 고용보장 요구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임금인상, 고용보장, 산업재해추방 등은 노동자의 중요한 계급적 요구다. 임금인상이 생계비용의 문제라면 고용보장은 생계 자체의 문제며, 산업재해와 직업병 추방은 건강과 생존의 문제다.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노동자들의 고용보장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도 산업재해나 직업병 추방 요구는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는데 원진레이온 노동자의 그 포문을 연 것이다.

원진비대위는 상여시위, 영정시위, 소복 행진, 휠체어 행진, 해골가면 시위, 방독마스크송기마스크 시위 등을 통해 산업재해·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렸다. 원진 노동자들은 명동, 광화문, 종로, 영등포, 신촌 등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대국민 홍보 활동을 전개했고 차량시위, 피케팅, 산업재해·직업병 추방 화형식, 직업병 환자 사진전시회, 원진신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직업병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진행된 서울지역의 모든 집회에서 원진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와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폭로했다. 그 결과 원진레이온 투쟁에 연대하는 노동조합이나 단체가 늘어 모금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됐으며 지지광고와 쌀, 컵라면 등 물품 지원이 끊이지 않았다. 원진 노동자들은 직업병 실태와 그동안의 투쟁내용을 담아 원진백서 <얼룩진 원진레이온 이력서>를 발행·배포하고 언론기관과 단체 회보에 산업재해·직업병의 참상을 알렸다. 720일 원진레이온지원대책위가 직업병 문제에 대한 공청회를 연 데 이어 113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등 학술인 공동으로 공청회를 열어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93년 원진레이온 투쟁을 계기로 산업재해·직업병 문제 처리가 그동안은 피해자 보상문제로 끝났던 것이 근본적인 치료와 예방대책 마련으로 중심을 옮기게 되었다. 직업병 피해 예상자들에 대한 특수건강검진의 지속적인 실시와 직업병 전문병원 설립을 요구하게 된 것이 그 성과다. 

또 정부투자기관 재취업을 요구하면서 전해투와 함께 고용문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촉구·폭로했다. 이러한 투쟁으로 그동안 고용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온 해당 지방자치단체나 중앙행정기관이 대책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부는 형식적이나마 수도권 노동부 지방관서장회의와 관계장관회의를 두 차례씩 열어 원진 노동자를 위한 직업훈련 시행, 취업 알선 업무 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끈질긴 투쟁으로 정부투자기관 재취업 방침을 끌어낸 것이다.

이전글 현총련 공동투쟁(1993년 7월)
다음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결성(1993년 6월)
목록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