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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수열사 옥중살해 진상규명투쟁(1991년 5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1-05-06 조회 270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열사 옥중살해 진상규명투쟁(19915)


박창수 위원장의 약력

1960728부산시 중구 부평동 135번지 출생

1979년 부산 기계공고 졸업

197931()진양기계 2공장 입사

1980730()진양기계 2공장 퇴사

198091일 영진설비공사 입사

1981530일 영진설비공사 퇴사

1981101일 대한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

1987년 노동조합 활동 시작

1990728일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

1991210일 대우조선노조 파업투쟁 지원을 연대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논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

199154일 구치소 내에서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옮겨짐

199156일 새벽 445분 안양병원 앞마당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

 

사건 배경

노태우 정권은 1990년 전노협 와해 공작에 실패하자 지노협을 와해시켜 전노협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1991년 전노협 무력화 공작은 영남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지인 부산에서 시작됐다. 공작은 안기부 등 공권력을 동원해 부산노련의 핵심 사업장인 대우정밀노조, 한진중공업노조, 고려부산노조를 전노협에서 탈퇴시키기 위한 입체적 작전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0년 말에 한진중공업노조가 민주 집행부를 구성하고 활발한 연대활동을 전개하자 노태우 정권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지역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집행부를 파괴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한진중공업노조에 대한 탄압과 공작이 집중됐다.

19907월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은 91%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민주노조 추진위원회출신인 박창수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어용노조 28년 동안 강요받았던 기나긴 굴종과 침묵을 깨뜨렸다. 새롭게 구성된 노조 집행부에게 조합원의 의식을 바꾸고 민주집행부와 조합원의 결합을 공고히 해서 지도집행력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중요한 과제가 부여됐다.

한편 안기부는 노조 간부를 매수하면서 지도부를 교란·약화시켜 전노협으로부터 떼어내려는 공작을 전개했다. “한진중공업노조는 조합원들의 나이가 많고, 의식이 취약하며, 노조의 집행력이 아직은 취약하므로 지도부 몇 사람만 매수하면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진중공업노조 스스로 전노협과 부산노련을 탈퇴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공작이었지만, 아주 치밀한 정치적 계산하에 진행돼 실제 탄압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는 1991년 상반기에 포항제철노조가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 회의’(연대회의)를 탈퇴하게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공작이다.

 

사건 경위

213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전노협과 연대회의 간부 7명 제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면서 박창수 위원장도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

425부산시 남구 대연동 카페에서 안기부 조정관이라는 자가 한진중공업노조 사무국장 장세군, 조직부장 한재문에게 전노협 탈퇴와 해고자 복직을 맞바꾸자고 제안.

4월 말장세군이 노조 위원장직무대행 이정호에게 구속된 박 위원장 조기 석방을 위해 안기부 직원을 만나보자고 제안해 부산 남구 민락동 횟집에서 안기부 직원 만남. 이때 안기부 직원이 전노협 탈퇴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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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분경 서울구치소에서 박 위원장 이마에 부상(세로 6).

11시경 구치소로 박 위원장을 면회하러 간 사람이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듣고 면회하지 못함.

1130분 박 위원장 안양병원 도착해 2층 중환자실에 입원. X-RAY 검사와 CT 촬영 결과 뇌 손상은 없고 두개골 골절(길이 5, 깊이 2정도) 있었으며 의식 명료했으며 이마 부상에 봉합술을. 저녁에 입원 소식 들은 한진중공업노조 간부들 안양병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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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 노조위원장 직무대행 이정호와 사무국장 장세군 안양병원 도착.

19시 장세군과 박 위원장이 함께 병원 내 공중전화로 안기부 요원과 통화(직접 통화는 장세군)

1915분 안기부 요원이 병실로 전화해 교도관이 받아서 통화 여부를 둘러싸고 언쟁이 오갔으며 결국 장세군이 전화 받음.

1940분경 안기부 요원이 또다시 병실로 전화해 박 위원장 부친과 장세군이 통화.

20시경 박 위원장이 부인에게 전노협과 연대회의를 탈퇴하면 석방에 힘쓰겠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탈퇴하고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으나 고민이다. 일이 자꾸 꼬여 간다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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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분 병원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교도관 최형식과 박 위원장 동생 황인갑이 박 위원장 시신 발견.

5~06시 경찰·검찰을 비롯해 연락받은 가족, 노조 간부, 김형태 변호사 등 현장 도착.

630분경 유족과 변호사가 검사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경찰이 일방적으로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다가 유족 및 노조 간부들의 저지로 복도에 임시 안치.

10시경 전경 100여 명이 병원 복도에서 시신을 둘러싸고 출입봉쇄, 100여 명은 병원 밖에서 출입통제. 소식 듣고 노동자들과 민주인사들이 병원으로 속속 달려옴.

11시경 검사가 사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12시경에 부검을 강행한다는 이야기가 퍼짐.

12시경 임석순 전노협 부위원장, 백기완 선생, 박 위원장 부친, 김형태 변호사, 이상수·노무현 의원 등이 병원 3층 원장실 옆 회의실에서 박종환 검사, 안양 경찰서장, 안양병원장 등과 회의하고 순리적으로 푼다 병원에서 경찰 철수 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기고 분향 자유롭게 실시 사체에 대한 CT 촬영과 부검 등은 양측 합의해 실시 등에 합의.

13시경 병원에서 경찰 철수. 시신 영안실로 옮기고 분향소 설치.

1930분경 병원 앞에서 노동자·학생·시민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고 박창수 위원장 구속 살인 규탄대회개최. 모친이 참가해 살인규탄 및 진상규명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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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시경 전경, 백골단 등 1,000여 명이 영안실을 지키던 300여 명의 노동자, 학생들에 대한 강제해산 시작, 부상자 속출

10시경 부산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 2,000여 명, 위원장 사망 보고대회 후 작업거부

1330분경 박종환 검사 지휘하에 일방적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재관, 강신옹 박사팀이 한 시간 동안 부검 강행

16시경 유족(부모, 부인 장모 등)이 병원 4층에서 기자회견, 시신탈취, 강제부검 등을 비난하고 공개사과와 사인규명을 요구함.

1622시 병원주변 및 안양시내에서 2,000여 명 규탄집회와 가두시위 전개

1730분 부산에서 5,000여 명 옥중살인 규탄 및 진상규명 요구 시위

18시경 유족과 대책위원회 관계자 등 20여 명이 병원 623호실로 들어가 농성 시작

21시 안기부원, 경찰, 교도관들 수십 명이 병원 아래층을 통제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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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국민회의) 산하에 고 박창수 위원장 사인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구성

11시경 경찰이 안양병원 완전 봉쇄. 623호실에 있는 유족 등 고립시키고 병원은 셔터를 내리고 환자와 보호자 출입까지 통제. 병원 복도에는 기관원들 수십 명이 진을 치고 6층 출입 완전 차단.

1340분 진상조사단이 병원에 도착해 유족 및 병원관계자 면담조사 요구했으나 병원을 봉쇄 중인 경찰이 저지.

16시경 인의협 소속 의사 양길승·김종구가 병원에서 면담한 서병화 부원장은 6층 병실 사용과 관련하여 공권력 배치를 요청한 바 없다고 말함.

19시경 병원 주위에서 2,000여 명이 규탄 집회 후 안양 시내 거리시위.

59

930분 진상조사단 1차 기자회견

21시경 안양병원 주위에서 2만여 명 집회·시위

오후 57일 연행자 중 15명 구속.

510

930분 진상조사단 2차 기자회견에서 안기부 개입 사실폭로.

111530분 장세군이 수원지검에서 서성준·이광재 검사에게 조사받고 나옴.

16시경 검찰은 유족에게 사체인수증을 받고 시신을 넘겨주었으며, 623호에 감금되었던 유족 및 대책위 관계자들이 영안실로 내려옴.

17시경 영안실에 다시 경찰이 난입해 6층에서 내려온 대책위 관계자 8명 강제연행, 이 중 4명 구속.

20시경 진상조사단 변호사 위원들이 연세대에서 장세군 면담 조사. 면담 마치고 나간 장세군 행방불명됨.

오후 수원지검에서 사건 중간수사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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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조사단 자료 1 <고 박창수 위원장 의문사 - 그 진상은 규명되어야 한다> 발행.

진상조사단 관련자 면담 조사 및 회의, 기자회견 등 진행

615

진상조사단 11차 회의에서 활동 중간결산 및 보고서 발행 결정

618

국민회의 산하에 노동열사 박창수 위원장 전국노동자 대책위원회구성

629~30

노동열사 박창수 위원장 전국노동자장

 

시신탈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

57일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경찰병력이 증가하고, 검찰은 사체를 부검하겠다는 안내장을 배포했다. 경찰측 차량은 20여 대였고 노동자와 학생으로 구성된 사수대는 200여 명이었다. 새벽 5시경 경찰이 소화기를 쏘며 바리케이드를 뚫고 안양병원 내로 진입했다.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까지 들어왔다.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전날 대책위원회를 꾸려 검사와 합의해 사체 부검을 같이하기로 했는데 병력을 투입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영안실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신분을 보장하고 논의를 재개하기로 하여 다시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경국장은 내 소관은 이미 떠났다며 영안실을 침탈했다.

오후 130분경 백골단이 영안실 뒷벽을 해머로 부수고 최루탄을 쏘면서 난입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지키기 위해 영안실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을 끌어내고 시신을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영안실을 지키던 노동자, 학생, 시민 등 총 142명이 연행됐다. 영안실을 침탈당하자 700여 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들은 병원 앞 차도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 농성을 벌였다.

오후 230분경 박종환 검사의 지휘하에 일방적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재관, 강신옹 박사팀이 한 시간 동안 부검을 강행했다. 검찰측은 투신으로 인한 신장, 간장 파열, 척추 골절로 보이는 추락사라며 결과를 발표했고 정확한 사인은 58일 오전에 발표하겠다고 덧붙였다. 오후 4시경 유족이 병원 4층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신탈취와 강제부검 등을 비난하며 공개사과와 사인규명을 요구했다. 시신을 탈취당했다는 연락이 전해지자 이에 분개한 노동자, 시민, 학생들이 병원 주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벽산쇼핑 앞과 병원 앞, 주변 가두에서 500~600명이 투쟁을 벌였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한편 이날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 2,000여 명은 작업을 거부하고 박창수 열사의 영정을 앞세우고 부산에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58일 경찰은 안양병원 주위를 포위한 채 출입을 봉쇄하고, 가족들의 식사와 음료 공급까지 차단했으며 병원 내에 있는 모든 공중전화까지 불통으로 만들었다. 병원은 셔터를 내리고 응급실만 가동했다.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은 병원 6층 병실에 감금됐다.

이날 오전에 범국민대책회의 산하에 고 박창수 위원장 사인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이하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진상조사단이 병원에 도착해 유족과 병원관계자 면담 조사를 요구했으나 병원을 봉쇄 중인 경찰이 가로막아 들어가지 못했다. 오후 4시경 양길승, 김종구 등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소속 의사들이 병원에서 서병화 병원 부원장과 면담을 했는데 부원장은 유족 등이 있는 6층 병실과 관련하여 공권력 배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오후 4시경에 검찰이 유족에게 사체 인수증을 받고 시신을 넘겨주었으며 623호 병실에 감금됐던 유족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영안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영안실에 경찰이 다시 난입, 6층에서 내려온 대책위원회 관계자 8명을 강제 연행하고 이 중 4명을 구속했다. 한편 오후 8시경 연세대에서 대책위원회 관계자들과 면담을 하고 나간 한진중공업노조 사무장 장세군이 이후 행방불명됐다.

이날 오후 수원지검에서는 추락사라는 사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전노협 중앙위원이자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인 박창수 위원장이 공작탄압으로 살해된 199156, 노동운동 진영은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은 노동운동 탄압의 집약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곧바로 1차적 투쟁 주체인 한진중공업노조를 비롯한 전노협, 연대회의,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전국노동단체연합준비위원회 등 6개 노동단체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과 노동운동 탄압분쇄 전국노동자 대책위원회’(전국노대위)를 구성했다. 전국노대위는 연세대와 안양, 그리고 전노협 사무실에 상황실을 두고 집행위원장 산하에 집행위원회를 구성했으며, 57일 사건의 성격과 요구 그리고 이후 투쟁계획을 발표했다.

전노협은 전국노대위의 투쟁방침에 따라 전국투본의 투쟁 일정과 지침을 발표했다. 지침은 59일 오후 330분부터 전국적 총파업 돌입 후 국민대회에 적극 결합 59일 이후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사망자와 관련해 집중 규탄투쟁 전개 59일 이후 전국노동조합비상대표자회의 소집 515~18일 사이 최고 수위의 투쟁 전개 등이다. 이와 함께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퇴진 구속노동자 석방 동지의 억울한 죽음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구체 실천지침도 하달했다.

이러한 계획하에 199158일부터 진상조사단의 활동과 전국노대위의 사업이 전개됐다.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은 581차 모임을 하고,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510일 기자회견을 열어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안기부 요원이 몇 차례 전화하고 방문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에 따라 전국노대위는 투쟁 요구에 안기부 개입 진상규명, 안기부장 비롯한 책임자 처벌 등을 추가하고 이에 관한 선전과 투쟁에 집중했다. 이에 앞서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이 알려지자 각 지역에서는 56일 오후부터 전국노대위와 함께 살인정권 규탄대회를 여는 등 즉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부산노련은 56일 오후 1시 한진중공업노조, 대우정밀노조 등 8개 노조를 중심으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결의를 모은 뒤 곧바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부산노련 소속 노조들은 리본 달기, 대자보 붙이기를 긴급 조직하고 지역 속보도 발간했다. 당시 휴무 중이던 한진중공업노조는 특근자를 중심으로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소식을 알리고 시신 사수와 진상규명을 위해 120명의 조합원을 안양병원으로 올려보냈다. 회사는 조합원들이 조업을 중단한 채 대책을 논의하려 하자 바로 귀가 조처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날부터 100여 명이 비상대기하면서 농성하는 한편, 57일 오전 다대포 2공장 500여 명과 함께 의문사 경과보고와 살인정권 규탄대회를 열고 전조합원이 분향했다. 수도권에서는 경기노련 안양지구를 선두로 검찰의 시신탈취를 막기 위해 안양병원으로 집결했다.

울산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은 이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등 6개 노조 대표자가 모여 현총련 대표자를 서울에 있는 전국노대위로 파견하고 569일까지 울산 전교조 사무실에서 노동단체들과 함께 농성, 성명서 발표와 조합원 홍보 강화 등을 공동으로 결의했다. 마창노련도 오후 2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해 단위사업장별로 분향소를 설치하고 59일까지 중식집회, 59일에는 총회투쟁 및 집단조퇴 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대구노련은 576시 계명대에서 살인정권 퇴진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했고 대우조선노조에서도 56일 간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59일에는 강경대 열사, 박창수 위원장의 타살과 연이은 학생·노동자의 자살에 분노한 민중들이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와 전국 87개 시군에서 50여만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6공화국 들어 최대 규모로, 특히 대도시에서는 서울 20, 부산 7, 광주 4만 등이 집결했다. 이들 노동자, 학생, 재야단체 등은 조직대오를 갖춰 도심을 완전 점령하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진압하는 경찰을 포위, 곳곳에서 무장해제시키며 밤늦게까지 투쟁을 벌였다. 전국투본의 시한부 총파업 결정에 따라 산하 98개 노조는 이날 330분 일제히 작업을 중단하고 총회를 열어 노태우 타도를 위한 국민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무리 지어 대회에 합류했다. 그 외 노조들도 중식시간에 집회를 하거나 잔업을 거부했으며 전국에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구로공단의 9개 노조가 파업에 돌입, 오후 2시 가리봉역에서 800여 명의 노동자가 가두 집회를 하고 시청 앞 국민대회에 참가했다.

511일에는 전국 14개 도시에서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 살인규탄과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서울지역 노동자들은 건국대에서 3,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하고 630분경부터 종로, 을지로, 명동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518일 전국 총파업투쟁

전국투본은 515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비상대표자 회의를 열어 518일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이날 현주억 전노협 위원장 직무대행은 전국투본과 업종회의 대표자회의의 결의를 모은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에게 드리는 긴급 제안서를 통해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면 현재 노태우 정권이 부딪히고 있는 위기는 곧바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의 위기로 돌아올 것이라며 총파업투쟁을 호소했다. 비상 결의대회에 참여한 350여 개 사업장 5백여 명의 대표자와 간부들은 노태우를 몰아내는 것만이 노동자가 갈 길이라며 우레와 같은 박수로 제안을 통과시키고 지역과 사업장별로 총파업투쟁의 결의를 밝혔다. 이 결정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51516일 사이에 대표자회의 등을 열어 결의를 다지고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518일 투쟁에는 전국적으로 총 19개 지역, 156개 사업장, 91,415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이후 520일 오후 9시 집계를 보면 파업 중인 사업장은 4216,202, 휴무 사업장은 2045,833(현대자동차 28,000, 대우자동차 12,600명 등), 그리고 4시간 파업은 25, 2시간 파업은 38, 1시간 파업은 29, 집단조퇴는 2개 사업장이었다. 파업 돌입 이외의 모든 노조는 중식시간 집회와 잔업거부 후 동시 퇴근, 사업장별 가두행진을 벌여 지역별 광주항쟁 계승 및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와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울산 현총련은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중전기, 현대강관, 현대종합목재, 한국프랜지, 해성병원, 금강개발, 대한알미늄, 현대전동기, 현대철탑, 고려화학, 현대알미늄, 현대자동차써비스, 현대로보트, 현대중장비, 현대자동차 등 18개 노조 총 63,092명이 중식시간 규탄 집회 후 사업장별로 가두행진과 국민대회에 참여했다. 연대회의 소속 대기업 노조는 한진중공업,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기아기공, 세일중공업노조가 파업에 돌입했고, 대우기전, 서울지하철공사, 풍산금속, 대우조선, 현대정공울산 등이 중식시간 규탄집회 후 2차 국민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전노협은 518일 총파업투쟁의 여세를 몰아 이후 투쟁의 파고를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강경대 열사 장례 이후 박창수위원장 문제를 정치 쟁점으로 부각하고자 했던 목표는 사실상 실패했다. 진상조사단 역시 2차례 회의 이후에는 활동이 부진했다. 변호사 등이 개별적으로 조사활동을 전개했지만, 그 성과가 조직적으로 취합되지 못하는 등 이토록 혼선과 오류가 있었지만 전국노대위가 일관된 방침을 가지고 책임 있게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진상조사 활동은 계속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또 연세대에 설치된 중앙 상황실과 한진중공업노조 및 부산, 가족, 안양지역의 사업도 유기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진상규명 투쟁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한 일상적인 사업을 조직하지 못하면서, 5월 하순 이후 완강한 투쟁을 전개하는 데는 한계가 드러났다.

 

대중투쟁 동력의 저하와 투쟁의 재배치

이러한 조건 속에서 경기남부 대책위원회는 진상조사 답보상태와 대중 동력의 침체, 그리고 경기지역의 조건 등을 근거로 장례투쟁을 전제로 한 투쟁의 집중적 배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전국투본과 전국노대위는 진상규명 투쟁의 올바른 전개 없이 장례투쟁을 논의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5월 하순에 전국노대위는 투쟁이 힘있게 전개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한 총괄 평가에 기초해 6월 투쟁계획을 마련했다. 노동운동·민중운동 탄압 규탄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현장 중심의 진상조사 투쟁을 강화하고 안기부를 초점으로 정치공세를 집중키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투쟁이 성과 있게 조직되는 것을 바탕으로 장례투쟁을 준비하기로 했다. 주요사업으로는 진상조사와 관련해 안기부와 검찰을 상대로 한 선도투쟁의 강화, 현장 중심의 적극적인 규명투쟁, 전국노대위 내의 전담반 구성 등이다. 이와 함께 노동운동에 대한 안기부 등의 공작탄압 분쇄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범노동운동 및 민중운동권의 동참을 광범하게 조직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전국투본은 525일 회의를 열어 전국노대위 구성과 활동이 조합원을 중심에 놓는 실천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지속적이고 완강한 규명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대중사업과 투쟁을 중심으로 조문단을 조직하고 영안실 규찰을 조직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또한 영남권노조단체대표자회의의 신민당사 농성, 한진중공업노조의 안기부 항의방문, 62일 노학 결의대회 등 영남권의 노력에 부응해 62일에 고 박창수 위원장 공작살인 안기부 해체와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수도권 노동자 결의대회와 안기부 항의방문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5월 말에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신민당사 점거농성과 안기부 항의방문, 그리고 노동자들의 항의 규탄집회가 열렸다. 62일 부산에서는 부산지역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마산, 창원, 울산, 대구, 구미 등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부산대 운동장에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주범 안기부 해체, 91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승리, 노태우정권 타도 전국 노동자·학생 결의대회를 했다. 대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 후 동래구 내성로타리에서 부산진구 하마정까지 박창수 위원장 공작살해 안기부를 해체하라!’, ‘민생파탄 폭력살인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서울에서도 수도권 노동자 2,500여 명이 백병원 맞은편 명동성당 앞길에서 결의대회를 하고 안기부 남산분실로 항의행진을 했다. 노동자들은 박창수 위원장의 영정 11개와 박창수 위원장 살해 주범 노태우를 타도하자!’ 등의 현수막을 앞세우고 행진을 벌인 뒤 종로2가에서 열린 국민대회에 합류하여 투쟁을 전개했다. 65일에도 지역별로 투쟁이 벌어졌고 이후 국민대회에 합류했으며 서울지역에서는 안기부 항의방문도 전개했다.

투쟁의 집중과 더불어 진상조사단의 활동도 재개돼 가족 진술과 병원에 대한 재조사 등을 실시하고 부산에도 장세군 체포조를 조직·파견하는 등 조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5314차 기자회견에서는 안기부원 홍상태의 개입 사실과 장세군이 72평 초호화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초순까지 집중투쟁을 벌였음에도 진상규명 활동이 답보상태에 머무르는 가운데 613일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발생한 정원식 총리에 대한 달걀 세례 사건을 계기로 정세는 급격히 퇴조되고 말았다.

 

정세의 급격한 퇴조와 장례투쟁의 전개

전국노대위는 김귀정 열사 장례 이후 정세퇴조에 따라 집중적으로 강화되는 노동 탄압을 저지하며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당면 전선을 유지한다는 기조 아래 대우정밀, 한진중공업, 태평양화학 등 파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상경 집중투쟁을 계획했다. 그러나 상경투쟁에 파업 사업장이 동참하지 못하고, 노동운동 탄압 저지 전선 구축이라는 투쟁의 의의를 살리지 못한 채 한진중공업노조 중심의 진상규명 투쟁으로 전개됐다.

한진중공업노조는 박창수 위원장이 의문사를 당한 지 40여 일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전조합원의 결의를 모아 서울에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612일 새벽, 다섯 대의 버스로 상경한 1,000여 명의 조합원들은 성균관대학교에 모여 시위 진압과정에서 숨진 김귀정 학생의 장례식에 참가한 뒤 장례행렬과 함께 거리로 나가 유인물 2만 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산 안기부 앞에서 항의규탄집회를 했다. 613일에는 한진그룹 본사 항의방문을 하다가 참여한 조합원 전원이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은 조합원들을 전경버스에 태워 서울 각지에 분산시켰지만, 조합원들은 성균관대학교로 재집결해 16일까지 본사 항의방문 투쟁을 이어갔다.

회사측은 상경투쟁을 막기 위해 조합원 개개인을 만나 올라가면 해고하겠다며 협박했고 부산에서 출발하는 날에는 관리자들이 부산역에 나와 상경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박창수 위원장 사인규명, 임금인상 투쟁 완전 승리만이 민주노조와 전노협을 사수하는 길이라는 굳은 결의로 파업투쟁을 계속했고, 확실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내려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모아 입장을 발표했다.

한편 명동성당에서 철수한 국민회의는 전국노대위의 제안에 따라 체계를 확대 개편하여 618일 국민회의 산하에 노동열사 고 박창수 위원장 전국노동자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구성했고 대책위원장에 백기완 전노협 고문, 집행위원장에 문성현 전노협 중앙위원을 선임했다. 그리고 대책위 산하에 교섭단을 구성해 한진중공업 회사를 상대로 한 막바지 교섭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획회의를 구성해 장례 실무기획을 준비했다.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과 관련된 투쟁 과제로는 철저한 진상규명, 유가족 생계대책 및 보상, 그리고 진상규명 투쟁기간 중의 임금지급 및 고소고발 취하, 한진중공업노조의 임금인상·단체협약갱신 투쟁 등이 제기됐다.

국민회의 산하에 구성된 대책위는 단기적으로는 결정적인 진상규명의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다른 투쟁 요구 등을 해결하기 위해 교섭을 진행했다. 장례대책위의 노력도 결국 투쟁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써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622, 안양에서 투쟁을 전개하던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이 독자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대의원대회와 조합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부산으로 내려갔다. 623~24일 대의원대회에서는 조합원들의 의견에 따라 조업 재개를 포함한 방안들이 검토될 예정이었다.

장례위는 622일 밤에 회의를 열어 많은 현안 해결과제 가운데 한진중공업노조의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의 요구는 노조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토록 하고 장례대책위는 유족 보상문제와 진상규명 투쟁과 관련된 파업 기간 중의 임금 지급, 고소고발 취하, 그리고 장례문제로 한정하는 것이 실정에 맞다는 점과 유족과 한진중공업노조가 동의한다면 629일 장례를 치르자는 것을 내부방침으로 결정했다. 결국 유족과 한진중공업노조의 동의를 기초로 대책위원회는 논란을 벌인 끝에 최소한의 요구인 유족 보상이 관철되지 않을 시 연기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 625일 기자회견을 통하여 장례 일정을 62930일로 발표했다.

고 박창수 위원장 전국 노동자장 장례위원회는 재야원로를 고문으로, 국민회의 상임 공동대표들을 장례 부위원장으로 해서 각계각층을 망라해 구성했다. 이는 고 박창수 위원장의 장례는 전국노동자장으로 하되 장례위원회는 범국민적으로 구성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또한 열사의 장례가 전국노동자장임을 고려해 집행위원장을 전노협에서 내정하고 장례위원의 절반 이상을 노동 쪽에서 구성키로 하고 전국의 단위노동조합 위원장 및 간부 등을 장례위원으로 선정했다.

 

열사여 살아오라 노동해방의 함성으로

629일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오후 2시로 예정된 발인식을 앞두고 유족 보상과 한진중공업노조 간부에 대한 고소 고발 취하, 파업 중인 한진중공업 조합원에 대한 임금보장이 있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가족들의 입장에 따라 장례가 연기되는 듯했으나 장례와 투쟁을 병행한다는 결정에 따라서 오후 4시에 염이 시작됐다.

안양병원 앞에는 전국에서 모인 3,000여 명의 노동자·학생·시민과 1,200여 명의 경호대가 창수야, 내 아들아! 일어나 싸워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흰옷을 입고 장례행렬을 인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이 있는 영안실 옆 안치실에서 50여 일 만에 염이 시작됐다. 꽁꽁 언 몸에 흰 삼베가 총총 감기고 발엔 꽃신이 신겨졌다. 옮기는 도중 시신이 부패할까 봐 드라이아이스로 관을 채우고, 관 위엔 전노협 깃발을 덮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이 한반도를 수놓은 국화꽃으로 관 덮개를 덮었다. 오후 5, 영안실 앞에서 발인제가 거행됐다. 가족들의 오열 속에 박창수 위원장의 부인 박기선은 아들 용찬이와 함께 절하며 여보, 우리 용찬이 잘 키울게라며 흐느꼈다.

운구는 안양병원을 떠나 벽산쇼핑 앞으로 향했다. 대형 태극기가 앞장서고 가족, 장례위원, 노동자, 시민이 그 뒤를 따랐다. “동지여 나를 땅에 묻지 말고 그대 가슴에 묻어 주오”, “깨어나라 투사여 일어나라 동지여”, “아가야 아빠는 자랑스런 노동자였다라고 쓴 100여 개의 만장과 깃발이 그 뒤를 이었다.

610, 운구는 벽산쇼핑 앞 사거리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를 지냈다. “박창수 위원장은 공동묘지에 묻히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개, 돼지만도 못한 노태우 정권을 땅에 파묻으러 간다는 백기완 장례위원장의 개식사에 이어 추모시가 낭독됐다.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의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 앞에서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 손으로 씻고 자유와 평등의 길을 열 것을 맹세하자는 비장한 추모사에 이어 권영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이대수 목사 등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이어 추모공연이 시작되었다. “죽여라! 죽여!”, 영안실을 깨부수며 난입한 백골단의 고함소리, 최루탄 소리, “여보 당신은 죽어선 안돼, 일어나부인의 절규가 효과음으로 나오고 문화선동대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조객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고 열사의 동생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단결투쟁가가 흘러나오고 한진중공업노조 깃발이 나와 춤추며 동지여 복수다!”라는 외침이 터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시민들이 함께 부르는 가운데 공연이 끝나고 장례행렬은 벽산쇼핑 앞을 떠났다.

서울구치소로 갈라지는 인덕원 사거리 앞까지 이어지는 행렬의 도로 양편에는 시민들이 가득 차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음료수를 한 보따리씩 사와서 장례위원들에게 전해 주는 시민들도 있었다. 1040분 인덕원 사거리에서 간단한 추도식을 하나 뒤 24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30일 새벽 120분 서울구치소 입구에 멈췄다. 전경들이 수십 대의 쓰레기차로 입구를 철통같이 막아놓고 늘어서 있었다. 서울구치소 앞 추모식을 죽어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경찰의 입장에 유족과 노동자들은 격분해 방패를 부수고 쇠파이프로 내려치는 등 격렬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한진중공업노조와 부산대에서는 6,000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29일 추모제를 열며 장례행렬을 기다렸다. 30일 아침 9시 통도사 입구 톨게이트, 새벽 6시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던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과 경호대들이 차를 같이 타고 한진중공업노조로 향했다. 1030분 한진중공업 정문 1앞에서 내려 운구행렬을 앞세우고 노동조합으로 향했다. 한진중공업 정문에는 열사여 살아오라 노동해방의 함성으로라는 검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박창수 위원장은 생전에 앉아 일하던 위원장실에 안치됐다. 한진중공업 단결의 광장에는 박창수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해 4,0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가득 모여 있었고 광장 왼쪽 도크에는 박창수 위원장이 만들던 거대한 화물선 한진 엘리자베스 호가 작업이 중단된 채 있었다.

장례를 앞두고 장례위원으로부터 갑자기 장례 연기 결정이 전달됐다. 유가족 보상, 노조원들의 50여 일간의 진상규명 투쟁 중의 임금 지급, 간부 6명에 대한 고소 고발 취하가 해결되지 않은 채 박창수 위원장을 묻을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의견이 장례위원회에 전달됐다. 조합대표는 교섭에 들어갔고 규탄집회가 시작되었다. 535분 교섭이 결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고 6시에 다시 장례를 치른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7시에 노조 사무실에서 발인제가 열렸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1,000여 명의 경호대 사이로 운구가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박창수 위원장이 죽음으로 사수한 전노협의 단병호 위원장은 박창수 위원장은 임금 몇 푼 더 올리려 싸운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다 갔습니다라고 했다. 열사 부활 굿을 끝으로 장례행렬은 한진중공업을 떠났다. 작업복을 입은 60여 명의 늙은 노동자들이 위원장 운구에 나섰다. 그 앞뒤로 경호대, 방송차량, 선도차량, 태극기, 영정, ‘노동해방의 불꽃대형 만장, 유족, 장례위원, 열사부활도, 만장, 깃발, 추모대열 순으로 1에 달하는 긴 행렬이 부산 시내로 향했다.

10시 부산시청 앞 노제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1120, 장례행렬이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산노동자연합 김진숙 의장, 부산 국민연합 배다지 의장,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 강민조, 권영길 언론노련 위원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71일 새벽 1시 장례행렬은 장지로 향했다.

새벽 5, 양산 통도사 앞 솥발산 공원묘지에 도착했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관을 땅에 묻었고 유족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백기완 장례위원장은 세상 모든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박창수 위원장은 꽃도 피우지 못했습니다. 박창수 위원장이여 눈에 흙이 들어오더라도, 천년 동안 눈을 번쩍 뜨고 있으시오. 당신의 씨앗이 해방의 세상을 꽃피울 때까지, 네 원수를 갚는 그 날까지 산자가 따르리니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어 아들 용찬이와 박창수 위원장의 부인이 울부짖으며 관 위로 흙을 뿌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투쟁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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