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노련은 당시 지연?학연?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서클 및 소그룹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적 대중투쟁을 강화하는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현장의 선진적 활동가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노동운동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국가와 자본의 탄압을 정치적 가두투쟁으로 대응하면서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를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정치적이지 못했던 정치적 노동운동의 깃발, 서울노동운동연합
김영수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85년 6월 22일, 역사적인 동맹파업의 북소리가 서울 구로공단에서 울려 퍼졌다. 대우어페럴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부흥사, 선일섬유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파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세진전자, 롬 코리아, 남성전기, 청계피복노조가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에 동조하는 지원농성투쟁을 전개하였고, 삼성제약 노동조합이 중식을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구로지역 동맹파업투쟁은 심상치 않은 노동자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은 구로동맹 파업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 중에서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7명, 구류 47명, 그리고 해고?강제사직?출근정지?휴폐업 등 약 1,300여 명의 생존권을 박탈해 버렸다.
이들 중에서 생존권을 위해 직장을 찾아 나서는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저항하면서 정치적 노동운동의 주체로 변화되었다. 이들은 파업투쟁을 마치고 두 달도 채 되기도 전인 8월 25일, 서울노동운동연합을 결성하는 주체로 변하였다. 이 단체는 구로지역 동맹파업투쟁의 과정에서 반(半)합법적이고 공개적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했던 노동자 정치운동의 단체, 노동현장에 침투해 있는 정파적 서클운동이 소그룹 운동을 전개했던 개별적인 활동가, 그리고 구로지역 동맹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생존권을 박탈당한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지도부 구속, 민주노조 파괴에 항의하는 노동자와 학생들. 사진_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
서노련은 당시 지연?학연?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서클 및 소그룹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적 대중투쟁을 강화하는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현장의 선진적 활동가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노동운동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국가와 자본의 탄압을 정치적 가두투쟁으로 대응하면서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를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즉 서노련은 노동자 대중들의 현실적 문제와 직결되는 광범위한 대중적 정치투쟁과 노동자 대중들을 반정부 투쟁전선으로 조직화하는 정치투쟁이 최선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서노련은 1986년 임금인상투쟁을 생활임금쟁취라는 전략을 내세운 상태에서 선도적인 가두정치투쟁으로 조직하였다. 서노련은 1986년 태평양화학 노동자(1.7), 한신여객(9.17), 콘티빵(2.13), 신생(2.21), 이성전자(2.27), 대한광학(3.11), 경원기계(3.11), 협진양행(3.17), 신흥정밀(3.17)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을 지원하면서 정치적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치적 가두투쟁의 사례로는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의 분신에 항의하는 가리봉오거리 점거농성 시위 및 구로공단의 모세미용실 점거농성 투쟁(1986.3.19), 삼반세력의 타도를 요구하는 가두투쟁(1986.3.16, 3.26), 전태일기념과 농성투쟁(1986.3.22-3.25), 부평역 앞 시위(1986.4.12), 노동절 가두투쟁(1986.5.1) 등이었다. 서노련은 이러한 임금인상투쟁을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가두투쟁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반정부 개헌투쟁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투쟁은 한편으로는 임금인상투쟁을 전개하는 단위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현장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을 고립시키는 요인이기도 했다. 노동현장의 선진적인 활동가들이 직?간접적으로 공개되어 국가-자본의 위협 또는 현장 노동자 대중들로부터 경원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노련 내부의 정파적 서클 및 소그룹이 1986년 생활임금 쟁취전략을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우려했던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서노련이 ‘한 지붕 여러 가족’을 동시에 머물게 할 수 있는 집을 급하게 지으면서 나타난 결과이자 상층 지도부 중심의 조직운영이 빚어낸 결과였다. 왜냐하면 서노련은 결성원칙 및 수준의 문제, 결성방식의 문제, 조직노선의 문제, 투쟁노선의 문제 등을 정밀하게 검토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서노련은 노동조합의 정치적 대중투쟁을 지향했지만 결코 정치적이지 못했다. 그저 서노련의 간부나 선진적 활동가들만이 자신의 활동들을 정치적이라고 자임했다. 서노련은 노동운동의 역사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정파적 서클 및 소그룹 간의 다양한 차이를 통일적인 이념과 노선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정파적 서클 및 소그룹 간의 다양한 차이 때문에 발생한 대표적인 갈등은 1986년 임금인상투쟁의 전략, 즉 ‘생활임금쟁취냐, 최저임금쟁취냐’라는 이견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임금인상의 요구 수준 및 임금의 성격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서노련은 끝내 임금인상투쟁의 전략적 차이를 좁혀내지 못하여 조직이 분열되었다. 최저임금제쟁취를 주장하면서 서노련을 탈퇴한 세력은 이후 남부지역 노동자연합을 결성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의 원인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상층 지도부들을 중심으로 결정?운영되는 조직 내부의 비민주성과 조직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싸움의 결과였다.
서노련은 정치적 대중투쟁의 전략을 추구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결코 정치적이지 못했다. 서노련은 서클 및 소그룹운동의 정파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추진된 또 다른 조직 성과주의의 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노련은 국가와 자본의 극심한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서 서클 및 소그룹을 넘어서서는 통합의 힘이 필요했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정치적 노동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좁혀 나가거나 그 차이를 인정하는 통일과 분화의 미학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통합적 정치운동은 꽂기 어려운 정치적 깃발을 스스로 짓밟거나 찢어버릴 것이라는 결과을 역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