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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피복노동조합 합법성 쟁취투쟁
⦁ 시기 : 1988년 5월 2일
⦁ 요약 : 1981년 전두환 정권에 강제 해산당한 청계피복노조는 온갖 탄압과 구속·수배·폭력에 맞서 7년에 걸친 끊임없는 투쟁으로 1988년 5월 2일 합법성을 쟁취했다.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되고, 소위 ‘아프리 사무소 농성투쟁’으로 11명이 구속된 후 남은 조합원들은 노조복원을 위해 ‘청계모임’을 조직했다. 청계모임은 산하에 준비모임, 탈반모임, 업종별모임(아동복, 숙녀복, 대인복) 등을 만들어 비공식적인 노조 활동을 계속했다. 이러한 활동과정에서 아프리 농성투쟁으로 구속됐던 사람들까지 석방돼 참여하자 청계모임의 조직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노조복원을 향한 청계모임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고, 1981년 11월 13일 전태일열사 11주기 추도일을 맞이해 시장상가 내에 노동조합 재건을 호소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1982년 3월 9일에는 노동절을 맞아 “노동조합을 찾자”는 내용의 유인물이 배포됐다. 이러한 선전 활동 외에 문화 활동을 통한 조직화 작업도 전개했는데, 1982년 3월 1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청계모임 주최 탈춤공연이 열려 3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했다. 1983년 11월 13일, 노조 해산 이후 처음으로 ‘전태일 동지 13주기 추도식’이 청계노동자들 주최로 열렸다. 이는 청계피복노조와 전태일 열사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행사로, 400여 명이 참석했다.
그 후 청계노동자들은 노조복원 투쟁을 본격화했다. 비록 신광용이 노조복구 계획과 관련된 토론자료를 가지고 다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1984년 3월 2일 구속됐지만, 이는 오히려 청계피복노조에 전화위복이 됐다. 청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신광용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신광용 석방 투쟁을 활발히 전개한 것이다. 1984년 3월 10일, 홍제동 성당에서 한국노협 창립과 동시에 개최된 노동절 기념대회에 청계피복노조는 조합원 400여 명이 참석해 ‘신광용 석방’과 ‘노조복원’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지를 과시했다. 4월 5일 신광용이 석방되자 청계 노동자들은 자신 있게 노조복원 활동을 더욱 본격화했다.
1984년 4윌 8일, 명동성당 사도회관에서 조합원 343명과 내빈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계피복노동조합 복구대회’를 열어 위원장에 합법노조 당시 사무장이었던 민종덕, 부위원장 신광용, 황만호, 김향숙, 김영원, 사무장 김영대, 회계감사 이은숙, 이금숙, 이경숙을 선출하고 노동조합으로서 활동 재개를 다짐했다. 청계피복노조는 복귀 선언에서 “지난날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해산명령은 불법 무효”임을 확인하면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원상 복구하여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복지증진을 위한 노동조합 본연의 활동을 재개해 나갈 것”을 단호히 선언했다. 또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고, 폭력이 평화를 꺾을 수 없으며, 소수 특권층을 위한 지조 없는 방해가 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저지할 수 없음”을 밝혔다. 나아가 “그 무엇 보다 꺾어도 꺾일 수 없고 물러서려야 물러설 수 없으며,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없음을 각성한 평화시장 일대 2만여 노동자의 무한한 저력이 우리의 투쟁을 끝없이 이어갈 것이다”라는 각오를 밝혔다.
1984년 4월 8일 청계피복노조 복구대회가 치러진 이후에도 전두환 정권과 경찰은 청계노조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4월 12일 현판식 다음 날 건물관리인이 무단으로 노조에 침입해 집기를 들어내는 바람에 경찰과 2시간 동안 이빨이 부러지는 등의 처절한 싸움 끝에 비품을 되찾기도 했다. 이후에도 노동부는 끊임없이 복구된 청계피복노조가 불법이라며 조합 활동의 중지를 강요했다. 그러나 노조는 이를 일축하고 1984년 5월 1일, 조합원과 학생·민주인사 등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열어 노조 복구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재확인했다.
이어 노조는 투쟁을 통해 합법성을 쟁취하기로 결의하고 3차에 걸친 합법성 쟁취대회를 열었다. 1차 대회는 한 달 이상의 치밀한 준비 끝에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바로 그곳, 평화시장 앞길에서 9월 19일 개최했다. 경찰은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일부 조합원을 가택연금하고, 수백 명을 동원해 대회장을 완전히 봉쇄했으나, 1시 20분쯤부터 2,000여 명이 청계천 고가도로와 인근 도로를 점거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해 동대문·청계천 일대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됐다. 이날 시위로 청계노조 조합원 17명, 노동자·학생 122명이 연행됐으며, 구타와 최루탄 파편으로 많은 사람이 다쳤고, 민종덕 청계노조 위원장은 지명 수배됐다. 시위를 마친 청계노조 간부와 조합원 40여 명은 9월 19일부터 23일까지 5일간 기독교회관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사무실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1984년 10월 12일 오후 1시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제2차 합법성 쟁취대회’를 하려 했지만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자 2,000여 명이 을지로5가 로터리를 점거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고려대 학생 임진수는 5미터 앞에서 정조준한 최루탄에 맞아 두개골의 4분의 1이 상실되는 중상을 입어 뇌수술을 받았고, 조합원 한경열은 최루탄 파편이 얼굴에 박혀 피가 낭자한 채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시위를 주동한 김영대 사무장을 비롯하여 노동자 5명과 대학생 27명 등 32명이 연행돼 민종덕 위원장, 김영선 부위원장, 김영대 사무장, 이승숙 운영위원, 이은숙 회계감사, 한경렬 조합원이 즉심에 넘겨졌다.
1985년 4월 12일, 4월 8일로 기념식 일자에 관한 거짓 정보를 흘려 경찰의 봉쇄태세를 철저히 점검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오후 1시 20분 경비가 허술한 곳으로 확인된 신당동 쪽으로 진출한 2,500여 명의 시위대는 용현파출소 등 5개의 파출소를 타격하고 경찰차 1대를 불태우며 약수동 로터리로 퇴각한 후 자진 해산했다. 치밀한 준비에 허가 찔린 경찰은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경찰은 3차 합법성 쟁취투쟁을 문제 삼아 5개월 뒤인 9월 15일 민종덕 위원장(서울노동운동연합 위원장)을 구속했다. 청계피복노조의 합법성 쟁취투쟁은 경찰력을 압도하는 참가인원, 노학연대, 그리고 과감한 투쟁 전술 등으로 전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민중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모금운동과 외국 사회봉사단체로부터 빌린 돈으로 1985년 3월 종로구 창신동 131-106호 한옥을 사들여 노조사무실 겸 조합원 모임 장소, 집회 장소, 전태일열사기념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어떠한 탄압이 가해져도 확실한 근거지를 중심으로 또다시 모이고 뜻을 이어갈 수 있는 굳건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그 후 청계피복노조는 6․29선언 후인 1987년 7월 7일,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봉쇄된 노조사무실에 기습적으로 들어가 청소를 하던 중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고 강제로 끌려 나왔지만, 7월 15일 새벽 6시 한층 강화된 포위망을 뚫고 마침내 조합원 40여 명이 진입에 성공함으로써 노조사무실 봉쇄 조치를 풀어냈다. 이어 1987년 11월 28일 노동법이 개정돼 지역노조 설립이 자유로워지자 12월 1일 노조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 이때 선출된 임원진은 위원장 김영대(재단사), 부위원장 김한영(미싱사), 이경숙(미싱사), 회계감사 이현주(미싱사), 김점복(미싱사) 등이다. 이때도 노조설립증은 교부되지 않았고,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쉼 없는 투쟁을 계속했다.
청계피복노조 설립증은 신고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교부됐다. 1988년 5월 2일 마침내 신고증이 교부되고 5월 3일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투쟁 승리 보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영대 위원장은 “오늘의 이 자리는 그 많은 시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싸워온 청계노조 조합원들과 많은 민주노조 조합원들, 학생 등 동지들이 함께 투쟁한 결과다. 오늘의 승리를 바탕으로 우리는 모든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가 완전히 쟁취될 때까지 힘차게 싸워나가자”고 선언했다.
⦁ 참고자료 : 청계피복노동조합, 「영원한 불꽃 청계노조 20년 투쟁사」(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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