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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인민노련, 그 빛과 그림자_김원 (5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3-10-14 조회 2680
 
 당면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인천지역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이 되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촉진시키며,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부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전국적인 정치적 통일과 노동자정당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구체적 활동과 관련, 인민노련은 파쇼정권에 반대하여 싸우는 모든 계급, 계층 및 정치세력과 적극 연대할 것이며, 특히 전민중의 정치적 통일조직을 형성해 나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인민노련, 그 빛과 그림자
 

김 원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인민노련 사건의 발생
 
19891018일 치안본부는, “지난 876월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따라 서울대와 고려대 운동권 출신 30여명을 중심으로 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인민노련)’을 결성해서 기관지인 <노동자의 길> 정세와 실천,사회주의자등의 문건을 펴내며 인천부천 등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치 의식화를 벌인 혐의로 중앙상임집행위원장 오동렬, 대외연락책 노병직, 교육선전부장 윤철호, 조직1국 사상지도책 최남기 등 1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들 관련자 17명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요원들에 의해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되어 무려 20일 동안 밀실에서 수사를 받았다. 이어 12월에는 4명이 추가로 구속되어 총 구속자는 21명에 달하였다.
1심 재판 때는 김진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 등 교수 147명과 권호경 목사 등 85명은, “소수 독점재벌의 손에 우리 사회의 엄청난 부가 집중되고 그로 인해 많은 폐해가 야기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 인민노련의 활동은 정당한 일면이 있다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해 이들의 활동을 지지했다. 또한 구속자들도 1,2심 재판 전 과정을 통해 인민노련활동의 정당성과 사회주의적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등을 통해 조직과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인민노련의 결성과 활동
 
인민노련은 19876월 민주화 과정에서 결성되었지만 그 조직적 뼈대는 1985년부터 시작되었다. 19856.24 구로연대투쟁, 5.3.인천항쟁, 한미은행 점거농성 등을 담당했던 정치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인천노동운동연합(인노련)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내부분열로 1986년 하반기 해체상태에 들어갔다. 198727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인민노련은 살인?고문?강간 정권 타도투쟁위원회 (약칭 타투)’ 라는 이름으로 서울 지역 원정시위에 나섰고 19876월 항쟁을 거치면서 인민노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민노련은 19876월 항쟁 당시 노동자정치조직의 부재로 개별적인 투쟁 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투쟁일정과 방식에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626일 평화대행진 집회가 있던 날 부평에서 노동자 1만 여명이 운집해서 인민노련 결성을 선언했고, 6월 내내 부평에서 시위 대열을 주도했으나 그 한계는 분명했다. 이에 이들은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확실한 정치적 입장의 천명’ ‘일관적인 투쟁계획, 지도를 시대의 요구로 규정하고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구체화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인민노련 결성 당시 내부 상황분석에 의하면, 첫째로 가내 수공업적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분산된 서클들을 모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 운동으로 새롭게 재편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둘째로 과학적인 정치 노선과 조직노선으로 노동운동을 통일시킬 필요성이 제기됐고, 셋째로 현장 노동자의 소모임 활동이나 일회적인 경제투쟁을 넘어선 공공연한 정치 선전과 선동 활동의 필요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동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인천 지역에서 지역정치 조직을 먼저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인민노련은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조직의 목적과 활동목표를 설정하였다. “당면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인천지역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이 되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촉진시키며,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부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전국적인 정치적 통일과 노동자정당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구체적 활동과 관련, 인민노련은 파쇼정권에 반대하여 싸우는 모든 계급, 계층 및 정치세력과 적극 연대할 것이며, 특히 전민중의 정치적 통일조직을 형성해 나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구체적인 활동에서 인민노련은 노동조합활동 지원, 연대활동 강화, 민중의 정치세력화 도모,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사상적, 조직적 기초를 다지는 일에 일상적 활동의 중심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조직구성에 있어서도 인민노련은 또한 지식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원의 절반을 노동자로 구성했다.
 

인민노련의 구성과 사회성격 인식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의 성격, 정세인식 등에서 견해차를 보이는 주사파, 비주사파라는 두개의 세력들이 결합하여 조직되었기 때문에 조직결성 이후에도 조직의 위상, 투쟁방침 등을 둘러싸고 내부적인 논쟁을 거듭해왔다. 당시 인민노련 조직원들은 주체사상의 김일성 중심의 수령론과 비민주주의적인 북한 사회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당시 주체사상파가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무시한 채 미국의 일방적인 식민지로만 한국사회를 바라보았다고 비판했다. 강령을 둘러싼 내부 노선투쟁 과정에서 정치적 대중조직으로서의 인민노련의 위상과 관련하서도 주사파는 그것을 노동자의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 동렬의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 반면, 비주사파는 전위조직과 대중조직의 중간쯤에 위치하면서 전위조직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전위조직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사고했다.
창립 3개월 후 열린 198710월 대의원대회에서 장시간의 토론 끝에 정치조직(전위조직)이라는 자기규정과 민중민주정부 수립을 전략적 목표로 설정하는 비주사파의 정치노선이 강령개정의 기본 방향으로 채택되었다. 비주사파 그룹의 입장이 채택되자 인민노련 내부 주사파 그룹은 인민노련을 탈퇴하여 1987111일 인천지역노동자연합준비위원회(속칭 인준위)를 결성하였다.
구체적 활동과 관련해서 인민노련은 1987년 대선당시, 백기완 독자후보 진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6월 항쟁이 끝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최초의 선거였다. 군정종식에 대한 국민의 여망은 높았지만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후보단일화를 외면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백기완 후보는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였고 당시 백기완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은 보수 야당과 구별되는 새로운 세력으로 야당 후보 단일화뿐 아니라 긴 안목에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고자 했고 그 중심에 인민노련이 있었다.
 

인민노련과 노정추
 
한편 인민노련의 핵심조직원들이 각각의 조직사건으로 투옥된 뒤 일부 정치조직들이 통합하여 19918<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91년 하반기 노동운동 세력 내부에서 노동자정당결성의 움직임이 가시화되었고, 이는 진보정당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사진=노동자역사 한내


그 흐름은 바로
한국노동당창준위(이하 한노당) 혹은 노동자정당창당추진위”(이하 노정추)였다. 3파 연합이라고 불린 노동자운동 내 한국사회주의노동당그룹은, 199112월을 즈음해서 비합법적 전위정당 노선을 실천적으로 폐기하고 공개적인 노동자정당 노선을 전격 선언하며 지상에 등장했다. 그러나 민중당 그리고 진보정당 운동에 있어서 노정추의 출현은 진보정당 운동의 장미 빛 희망을 던져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지하정당을 합법정당으로 조직을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지하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러한 한노당의 출범에 대해 대중의 광범한 투쟁보다는 선거에서의 득표율을 기반으로 정치세력화를 이루려는 민중당의 재탕이라고 규정하고 추진방식도 음모적이고 비대중적 활동방식이라 민족민주운동의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되기도 했다. 또한 한노당이 탄압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탄원서 사건은 당시 노동운동 세력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회주의 이념의 포기, 폭력혁명 포기, 프롤레타리아 독재폐기, 계급정당 포기 등을 담은 ?탄원서?를 당시 노태우 정권에게 제출한 것이었다. 급조된 합법정당 추진도 논란을 일으켰지만 조직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정권에게 투항했다는 것에 대해 한노당의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인민노련은 1980년대 전반기부터 인천 지역에 형성되었던 정치서클들이 통합하여 노동현장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이론진영과 대중운동의 경험자들이 결합하여 조직발전을 꾀하면서 당시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조직원들이 인민노련에 대한 자긍심도 상대적으로 높아 조직 상?하부 간의 결합력이 강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무리한 정치조직결성이나 전위당 건설을 시도하지 않고 스스로 제기하듯 실사구시적 태도로 조직 내적 역량과 대중운동과의 결합정도에 따라 조직운동의 단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89년 하반기에는 인민노련과 별도로 다른 운동세력들과 소통하면 전위당 건설을 위한 시도 단계까지 나아갔다.
 
 
이달의 역사_노정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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