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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열사 조수원 장례투쟁
○ 시기 : 1995년 12월 15일 ~ 1996년 1월 6일
○ 요약 : 대우정밀에 병역특례로 입사한 노동자 조수원은 의무복무 기간 만료를 6개월 남기고 해고되자 부당함에 항의하는 투쟁을 전개하다 자결했다. 노동계는 장례대책위원회를 구성, 투쟁을 벌여 병역특례해고자 전원 복직을 쟁취했다.
1995년 12월 15일 새벽 민주당 서울시지부 당사 전해투(위원장 나현균) 농성장 화물칸 엘리베이터 5~6층 사이 비상계단에서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조수원(28세)이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됐다.
조수원은 대우정밀에서 병역특례자로 근무하다 1991년 6월 18일 해고돼 1995년 당시까지 수배 생활을 하면서 원상회복을 위해 투쟁해왔다. 조수원은 1986년 1월 22일 병역특례자로 입사해 회사에서 5년 6개월을 복무했으며, 병역특례자로 편입된 지 4년 6개월째에 해고돼 복무 만료 6개월을 남기고 병역특례자의 신분을 박탈당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조수원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1986년 방위산업체인 부산 대우정밀에 병역특례로 입사했다. 저임금에 반인권적이었던 대우정밀의 분위기는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민주노조가 설립되자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임금이 올랐을 뿐만 아니라 부당한 처우와 강요가 줄어들었다. 조수원 열사는 이를 목격하면서 노조 편집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91년 사측은 부산지역 민주노조의 선봉에 있던 대우정밀노조를 깨기 위해 조합원 200여 명을 해고했다. 특히 병역특례자들을 대거 해고했는데, 당시 병역법에 따라 의무복무 기간을 채우지 못한 병역특례자는 해고 시 그동안의 근무 기간에 상관없이 곧바로 군대에 징집된다는 점을 이용했다. 노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병역특례자들을 제거하고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수원을 비롯한 병역특례해고자들은 1993년에 마포 민주당사에서 38일간 아사단식을 전개했고, 끝없는 농성, 장기기증식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쟁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1994년 5월 27일 대우그룹과 복직합의에 이르렀으나 정부(병무청)는 “병역문제는 복직합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병역특례해고자들에게 입대할 것을 강요했다.
1995년 4월 24일에는 박형규 목사 외 각계인사 498인이 국회에 청원서를 접수하고 병역특례자 군 문제 해결을 위한 병역법 시행령 개정을 요구했다. 이어 집회, 피켓 시위, 당사자 편지 보내기, 전국노동자 엽서 보내기, 전국 민주단체 건의서 보내기, 병역악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 등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12월 국회 국방위원회가 세 당사자인 병무청, 해고사업장 사업주, 병역특례자가 합의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12월 12일 조수원을 비롯한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3명과 대우그룹, 풍산그룹 회사관계자(과장급), 병무청 국장·과장·심사관들 모여 논의했으나 병무청의 입장은 시종일관 “군 복무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흘 뒤 새벽, 조수원은 병역특례해고자들을 위해 자본과 권력에 죽음으로써 항거했다.
전해투 산하 수많은 해고자, 전해투 지원대책위원회,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조수원 열사가 숨을 거둔 당일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집결해 곧바로 조수원열사장례대책위를 구성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조수원열사장례대책위에서는 우선 국회의 권고안을 무시한 병무청과 문제 해결을 방치한 신한국당, 그리고 원인 제공자 대우그룹을 공격 대상으로 정하고 △병역특례자 군 문제의 완전해결 및 병역악법 개정 △故 조수원 동지 명예 회복 △전국 해고노동자의 원직 복직, 이 세 가지를 당면 투쟁의 목표로 결정했다.
전해투 성원들, 대우정밀 일반 해고자와 복직자, 그리고 민주노총 수도권에서 비상동원된 조합원들은 12월 16일 오전 10시 병무청 타격투쟁에 돌입, 격렬하게 항의했다. 17일에는 대시민선전전을 벌였고, 18일에는 신한국당 앞에서 열사 영정을 든 결사대 35명이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채 전원 연행될 때까지 연좌 농성을 벌였다. 이러한 선도 투쟁은 대우정밀노조 조합원들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대규모 집회와 쇠사슬 농성, 대우 김우중 회장과 대우정밀 권오준 사장 자택 타격투쟁을 계속했다.
특히 12월 23일에는 대우정밀 노동자 450여 명을 비롯한 전국의 노동자·민중 1,500여 명이 서울역에서 추모대회를 거행한 후 병무청 타격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병무청은 병역특례자들의 현안을 해결하고 이후 임시국회에서 병역특례 관련 악법 조항을 개정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병무청이 무릎을 꿇은 뒤에도 대우그룹은 협상을 지연시키는 모습을 보였으나, 강도 높은 투쟁이 계속되자 결국 1996년 1월 3일 병역특례해고자 전원 복직, 조수원 열사 명예 회복, 민형사상 면책 등의 내용에 합의했다.
이에 조수원열사장례대책위는 1996년 1월 5일과 6일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장례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경찰과 사측은 끝까지 장례를 방해했다. 경찰은 애초의 입장을 바꿔 5일 장례식을 원천봉쇄하고자 장례식장 곳곳에 전경을 배치했다. 또 회사측이 6일 부산 대우정밀 앞에 도착한 장례 행렬을 봉쇄하는 바람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회사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례 행렬은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로 이동해 조수원 열사의 하관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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