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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⑬ 업무조사 빙자한 전노협 탄압
첨부파일 -- 작성일 2021-11-15 조회 309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업무조사 빙자한 전노협 탄압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업무조사 빙자한 전노협 탄압

전노협을 탄압하려는 방안으로 대우전자부품노동조합에 업무조사를 알리는 공문이 접수됐다. 경기노련 산하 노동조합에 업무조사 공문이 날아들었고, 대우전자부품이 첫 번째 업무조사 사업장으로 기억된다. 조합원이 500인 이상 사업장은 노동부가 업무조사를 하고, 500인 미만 사업장은 시청에서 조사한다. 내가 수배 중이어서 임원들과 핵심 간부들을 비밀리에 만나 업무조사 탄압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결론은 업무조사가 대우전자부품에 가장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전선을 치지 않으면 다른 노조에도 탄압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강력히 대응하는 기조로 전술을 논의했다.

업무조사에 파견되는 근로감독관들을 담당하는 부서는 여성부가 맡았고 청년부는 외곽을 맡았다. 수배 중인 나는 노조에 들어갈 수 없는 안타까움에 잠을 잘 수 없었고, 업무조사 날이 되었다. 수시로 전화로 소식을 교류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 사업장 선도투로 중단시켜

근로감독관들은 노조 회의실로 들어와서 당당하게 업무조사에 필요한 노동조합 회계 관련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 여성부장을 비롯한 여성부원들은 업무조사 공문이 위원장 앞으로 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위원장이 수배 중인데 무슨 업무조사를 하냐고 항의하면서 점차 목소리들이 커켜갔다. 여성부장이 근로감독관 귀싸대기를 수차례 때리면서 노동조합이 조합비로 노조를 운영하는데 근로감독관이 무슨 자격으로 조사를 하나. 너희는 기본적인 양심도 못 갖춘 놈들이냐고 몰아세웠다. 그러면서 회의실 문 다 잠가. 저런 놈들은 다 죽여 버리든지 같이 죽든지 해야 한다고 회의실 문을 바깥에서 잠갔고, 밖에서 청년부원들은 쇠파이프를 콘크리트 바닥에 쾅쾅 울리면서 나오기만 하면 다 죽인다고 소리치는 상황이었다. 일부 여성부원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조합원을 동원하는 중에 근로감독관들은 창문을 뜯고 도망치고 있었다. 여성부원들이 쫓아가자 도망치는 감독관들이 급히 차에 올라타 문을 잠갔다. 현장 조합원들이 차를 둘러싸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준비한 달걀 수십 판과 밀가루로 근로감독관들이 타고 온 차를 완전히 도배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대우전자부품은 물론 지역에서도 업무조사는 중단됐지만, 대우전자부품노조 여성부장은 구속됐고, 여성부원 4명은 불구속됐다. 여성부 차장은 경찰의 회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201445, 홍대 쪽 공연장에서 노래로 보는 노동운동사공연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이 동지들이 공연장을 찾았다. 눈물 나도록 반가웠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 때문에 저녁밥 한 끼도 같이 하지 못하고 헤어져서 가슴에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다.

 

구미에서 연행안산 이송 후 진술투쟁

금강공업 사건으로 10개월째 수배생활을 하던 중, 인천 대우자동차 탄압과 관련해 구미에 대우그룹노동조합 비상회의가 잡혔다. 그 회의에 참석하려고 구미 톨게이트로 들어가다가 겹겹으로 에워싼 바리케이드에 갇혀 구미경찰서로 연행됐다.

구미로 가는 중 함께 가던 노조 사무장이 구미 코람플라스틱(대우 계열사)에 전화한 것이 도청된 것으로 확인됐다. 구미경찰서는 수백 명의 병력을 동원해 톨게이트에서 나를 덮쳤다. 나를 연행한 구미경찰서는 나의 죄명이 상해치사여서 갈피를 못 잡는 거 같았다. 자기들끼리 공안이 아니고 조폭 아니냐?”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비상대책회의에 참석했던 그룹소속 노조 간부들이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구미경찰서 안에서 술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에 안산으로 이송돼 조사를 받았다.

수배 동안 앞서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된 동지들의 진술 내용, 공소장을 다 읽어보면서 상해치사는 빠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사관들은 집요했고 초반부터 기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지 않아도 시빗거리만 생겨 봐라며 버티고 있던 나에게 교대로 조사하는 조사관이 반말을 하며 탁자를 쳤고 나는 그 조사관의 태도가 폭력적이고 강압 수사라며 항의했다. 과장이 껴들어서 무마시키려고 했으나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조사에 협조할 수 없고 내가 들은 바로는 묵비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지금부터 그걸 하겠다며 버텼다.

묵비가 이틀이 지나면서 자세가 한결 누그러진 조사관은 어디에서 가져 왔는지 모둠회 한 접시를 주면서 어떻게 해야 진술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두 가지 약속을 해라. 하나는 나에게 강압 수사한 것을 사과하고 또 하나는 내 진술에 대해 신뢰를 하고 들어준다면 진술할 수 있다고 했다.

금세 첫 번째 조건을 받아들인다며 하는 말이 연배도 있으시고 지역에 일정한 직책도 있는 분을 어린 학생 대하듯 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했다. 거슬리긴 했지만, ‘사과에 방점이 있으니 넘어갔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은 곤란하다고 했다. 내가 진술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내가 진술을 왜 해야 하는지 설명 좀 해 보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신뢰한다고 약속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한 구속 노동자 현황 _전노협백서(2003) 9권

 

동지들 덕에 행복했던 수배생활 끝나고 구속

조사관은 혐의를 벗어나는 사안에 대해서는 솔직히 진술하라는 둥, 사진이 찍혀있다는 둥 했다. 그때는 약간 긴장하기도 했다. “사진이 있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 앞에 내놓아 봐라”, “내 진술을 신뢰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를 반복하며 조사는 별 어려움 없이 끝났다. 조사관들이 몰려와 구속 사유가 없는데 왜 도망 다녔냐고 묻는다. “내가 죄가 있어서 도망간 게 아니고 경찰들이 못 잡아들여서 환장하고 쫓아다니니까 피한 거 아니냐?”고 했다. 나를 조사한 경찰은 구속영장이 안 떨어질 수도 있다며 투덜거렸고, 나는 다른 사람들 다 구속됐는데 나만 구속 안 되면 쪽팔리니까 제대로 구속영장 신청해보라고 했다. 결국 라성사거리 건(경감 사망)은 빠지고 한양대 교내 집회와 가두 시위에 따른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돼 51일 수원구치소로 들어갔다.

나는 내내 행복한 수배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현장 조합원들과 간부들이 부서별·반별로 편지를 써 인편으로 전해줘서 매번 반갑게 받아 읽었고, 고생한다고 허약해진다며 보약과 돈까지 모아서 보내주곤 했는데 그런 수배 생활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음 한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염치없음을 깨달았을 때는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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