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대우자동차 파업투쟁
⦁ 시기 : 1987년 8월 10일 ~ 10월 31일
대우자동차 노동자투쟁의 배경
대우자동차는 1985년 임금인상 투쟁 이후 계속된 와해공작으로 노동조합의 역할은 약화되고 노동강도는 한층 강화돼 갔다. 1986년 준공된 신공장의 잡수(시간당 자동차 생산대수)는 기존 공장(평균 13대)에 비해 대단히 높아 30대를 생산했다. 1987년 1월 27일에는 222명이 조립에 참가해 시간당 15대를 생산했는데 쟁의 직전인 8월 7일에는 420여 명이 34.5대를 생산해 급속도로 증가했다. 인원은 약 2배 증가한데 비해 잡수는 8개월 만에 2.3배로 증가한 것이다. 컨베이어 옆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는 2분에 한 대씩 생산해내야 하기 때문에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다고 하면서 생산라인 속도를 늦추어 달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중노동의 결과 노동생산성도 대폭 상승해 1980년에 비해 1인당 잡수가 1986년에는 2.6배나 증가하는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다.
이에 비교해 볼 때 실질임금의 상승은 매우 낮았다. 특히 이러한 생산성 증가를 위해 노무관리가 한층 강화되어 노동자들의 쟁의 조짐이 나타나면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동원했는데 여기에는 대졸 사무직, 고졸 사무직, 경비, 그리고 공권력이 이용됐다. 특히 상고출신으로 5급에서 4급 사원으로 승진한 사람들이 노무관리에 적극적이었으며, 노사분규를 주동할 우려가 있는 생산직 노동자는 사무직인 5급으로 발령하거나 전혀 관계없는 부서로 이동시켜 왔다. 이들 중에는 6․29선언 이전에 ‘원직복직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으며, 5급 사원들은 1987년 7월 28일 ‘오동회(五仝會)’를 조직하여 권익신장 투쟁을 준비해 갔다.
이러한 회사의 일방통행적 노무관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당시 노조 집행부에 대한 생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1985년 1월에 조사한 노동실태 설문조사에서 단체협약, 취업규칙, 노동조합 규약에 대한 인지도는 겨우 17%였고, 83%는 전혀 모른다고 응답했으면서도 노조의 필요성에는 91.3%가 동의했고, 83%나 당시 집행부의 퇴진을 원하고 있었다. 1987년 ‘대우자동차 노조 민주화 평조합원 대책위원회’는 5월 6일 타결된 임금 5%에 대해 노조 집행부가 회사 밖 모처에서 기관원들의 조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임금인상 투쟁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집행부를 불신임하자는 내용의 대의원 서명운동을 전개한 정희영을 조합에서 제명한 사실에 대해서도 노동자들은 분노를 표출했다.
1987년 6월 28일, 6월항쟁의 열기에 힘입어 1985년 임금인상투쟁 및 그 이후 투쟁으로 해고되거나 강제사직·부당전출된 노동자들 중심으로 ‘대우자동차 원직복직추진 노동자회 준비위원회(복노회_회장은 1985년 제조검사부 근무시 해고된 이용규, 간사는 1987년 조립부에서 해고된 이성재, 연락처로 ‘백마교회’ 이용)가 조직됐다. 이들은 저임금, 강제잔업, 장시간노동,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 어용노조의 개편 등을 요구하고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4·5급 사무직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이들이 발행한 7월 6일자 팸플릿은 “공장 내 민주화 없이는 나라의 민주화 없다” “대통령도 내 손으로, 노조 위원장도 내 손으로, 직장과 공장도 내 손으로” “노동자의 민주권리, 노동3권 쟁취하자” “노동자 농민 외면하는 직선개헌 속지말자” “모든 부당해고, 강제사직, 부서이동 반대하고 원직복직 쟁취하자”는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7월 28일에는 사무직 5급 사원들이 중심이 되어 ‘오동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으나 회사측에서 노조와 야합해 이들을 일괄 탈퇴시켜 비조합원인 상태였고, 이에 따라 1985년 투쟁 이후에도 소외되는 등 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현장조직들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투쟁이 경인지역으로 확산되며 대우자동차 주변의 한독금속, 남일금속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되거나 민주화되자 이에 크게 고무되어 8월 초부터는 같은 그룹사 대우중공업 노동자들과 합숙을 하며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8월 6일에는 ‘복노회’에서 기존 노조의 소극성과 비민주성을 통박하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구호 아래 노조민주화를 촉구했고, 8월 7일에는 ‘민주노조쟁취 평조합원 위원회’에서 8월 10일 회사측과 갖기로 한 단체협약 갱신협상에 앞서 노조 위원장 송성만에게 △더 이상 저임금, 장시간 중노동의 노예로 남을 수 없다 △노조민주화를 기필코 성취 △단체협약 공개적 진행, 해고자 복직투쟁 전개, 위원장 직선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부사장 한 명이 해외여행중이고 준비가 미흡한 관계로 교섭을 17일로 연기한다고 발표하자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게 됐다.
파업투쟁의 전개
1987년 8월 10일, 현장 노동자들의 분노가 들끓는다고 판단한 노조 집행부가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자는 제안했다. 그러나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대우자동차 민주노조 쟁취위원회’ 주도 아래 민주노조 결성과 노동조건 개선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낮 12시 점심시간이 되자 태극기를 앞세우고 로얄 차체부를 시작으로 각 공장을 순회하기 시작했고, 대오는 순식간에 4,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노조측은 ‘노동조합’ 이름 아래 총단결하자고 호소했지만 노동자들의 마음은 이미 어용 집행부로부터 떠나 있었다. 대우자동차의 파업농성 소식이 알려지자 길을 지나던 여성노동자, 택시기사, 인근 노동자들이 빵과 음료수를 보내왔고, 퇴근했던 노동자들도 되돌아와 투쟁에 합류했다. 회사측은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휴업을 공고했다가 다시 16일까지 휴업을 연장하여 임금지급일을 이용해 농성대열의 이탈을 유도했지만 노동자들은 동요 없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결국 회사측은 8월 17일, “부품 공급업체의 파업으로 부품이 없어 무기한 휴업에 돌입한다”는 공고를 내붙였다. 회사측의 이러한 은폐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비난만 샀다. 회사가 이전에는 부품 공급이 원활치 않거나 불황으로 쉬게 되면 노동자들에게 풀 뽑기, 의자 만들기 등을 시켜왔기 때문이다.
한편 8월 12일에는 김순철의 양심선언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김순철이 원래 중졸인데 먹고살기 위해 고졸이라고 속여 입사한 사실을 알아낸 대우자동차 이사 연찬국과 인천 대공분실 이부장이라는 자가 김순철을 협박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동태를 줄기차게 파악해 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8월 20일에는 <오동회보>가 발간돼 5급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할 것을 선언했다. 한편 어용 집행부는 농성노동자들에게 집행부측으로 집결하라고 계속 설득과 협박을 병행하다가 8월 25일에는 농성자와 조합원들이 요구하는 11가지 사항을 반드시 관철하겠다고 밝혔다. 8월 26일 회사측과 아침 9시부터 교섭을 시작해 12시에는 교섭결렬을 선포하고 집행부 30여 명이 식당으로 몰려가 농성가를 부르며 대오를 형성하려 했지만 조합원들의 야유만 받았다.
이날 낮 12시 40분경, ‘민주노조 쟁취위원회’가 현 노조의 어용성을 폭로한 유인물을 나누어주며 결집을 호소하자 대오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1시 30분에 대표 남정희가 남문을 열고 대오에 합류하자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로써 기존 노조 집행부는 더 이상 투쟁의 현장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후 4시 50분경 어용노조 송성만 위원장이 본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500여 조합원이 본관 출입문을 에워싸고 송위원장 인도를 요구했지만 김성중 부사장이 시간을 끌다 빼돌려 버렸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 400여 명이 본관에 진입하여 본관 건물을 장악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회사측에서는 농성을 분쇄하기 위해 다양한 술책을 동원했는데, 특히 주요 농성간부들을 납치까지 해 노동자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로얄조립부 대의원 임세원은 25일 밤 집 앞에서 납치돼 경기도 이천으로 끌려갔다가 26일 6시경 농성장에 도착했고, ‘민주노조 쟁취위원회’ 남정희 대표는 회사측의 격리를 피하기 위해 출근 즉시 월차를 내고 회사 내에 은신 중 워키토키까지 동원한 관리자들에 의해 회사 밖으로 강제로 밀려났으며, 평조합원 고내현은 출근과 동시에 차에 강제로 실려 부평경찰서 대공과에 연행되었다가 27일에야 석방됐다. 특히 해고노동자 홍영표, 박재석, 김남헌, 이성재는 부평경찰서 대공과로 강제 연행돼 구속됐다.
8월 27일에는 1985년도 임금인상 투쟁 장소였던 기술센터 본관을 장악하여 파업농성을 계속했고, 26일 구속된 해고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한편 노조 집행부측은 ‘선 노사협의, 후 민주노조 결성’이라는 응급조치를 취하고 다음 날인 28일 조합원 총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조합원 총회에 혹시나 하고 참여한 1,500여 명의 조합원 앞에 총회소집을 공고한 송성만은 나타나지조차 않았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광장으로 옮겨와 농성을 계속했다. 8월 29일 오전, 처음 200명으로 시작한 농성은 이제 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노동자들이 아침시간에 정문으로 몰려들자 관리자들은 이를 제지했지만 농성노동자와 합류했으며, 이후 지게차를 동원하여 정문 바리케이드를 완전히 철거했다. 8월 31일에는 회사측에서 농성자들의 대표성을 계속 인정하지 않자 지게차를 앞세우고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청천동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정문 앞에서 밤늦도록 산발적인 투쟁을 계속했다.
이토록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고서야 9월 1일, 평조합원 대표들과 김우중 회장이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1,000여 명의 추인을 받은 대표자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김우중의 거부로 협상은 해보지도 못했다. 이에 흥분한 노동자들이 김우중의 차를 불태우기 위해 찾았지만 찾지 못하자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르망 승용차 한 대를 정문 앞으로 끌고 가 불태워 버렸다. 오후 2시에 회사측의 요청으로 재교섭이 열렸지만 시작하자마자 김우중이 조합원 대표들에게 “너희들은 뭐냐?” “난 민주노조 쟁취위를 모른다”며 외면하자 노동자들은 더 이상 그런 오만불손을 묵과할 수 없으니 부평로(부평 시가지 거리)를 점거해 버리자고 결의하기에 이른다. 농성장에서 재차 결렬소식을 전달받은 노동자들은 모두 가두로 진출해 인천 간석동에서 400여 명이 연좌시위를 전개했고, 경찰의 무자비한 최루탄 난사로 김영준은 양 눈에 중상을, 최길상은 오른쪽 볼에 최루탄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으며 35명이 연행됐다. 더 이상 노동자들도 참지만은 않았다. 이들은 약 2시간에 걸쳐 치열한 투석전을 전개하고 회사 본관으로 돌아와 농성에 돌입했다.
9월 2일, 어떠한 협상기미도 없는 상황에서 9월 1일 35명이나 연행되자 노동자들은 가스마스크와 안전모를 쓰고 가두진출을 시도해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4시간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경찰이 쏜 최루탄으로 자재야적장에 불이 났지만 노동자들이 이를 진화했다.
9월 3일에는 이틀전 부상한 김영준의 노모가 찾아와 정문에서 “아들이 실명하게 됐다”고 울음을 터트리자 극도로 흥분한 노동자들이 본관 사무실로 찾아가 관리직 사원들을 내보내고 김정웅 사장 등 임원들에게 항의하며 부상자 치료를 요청했다. 이들에게 정문 앞으로 함께 가 전체 노동자 앞에서 대화할 것을 요구하자, 이들은 순순히 동행했으며 아스팔트 바닥에 함께 앉아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장 등 맨바닥 앉히고 폭언’이라는 제하에 “사장 등 임원 18명을 강제로 정문 광장으로 몰고나와 맨바닥에 앉힌 뒤 꿇어앉아 사죄하라고 강요하다 농성노동자 대표들이 만류해서 중지했다”는 교묘히 왜곡된 언론보도(<동아일보 1987년 8월 4일자)로 도리어 노동자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어쨌든 이 협상에서 △35명 석방 △5일 노동자 비상총회 △회사측이 부상자 치료 책임 등에 합의한 뒤 곧바로 33명이 석방되어 회사로 돌아왔다. 이어 일부 노동자들은 총회 준비를 위한 실무작업에 들어갔고, 8월 26일 이래 연일 계속된 철야농성의 피로를 씻기 위해 귀가한 후 150여 명만 남아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측의 철저한 각본이었다. 이날 밤 9시 김우중 회장이 김효은 인천 시경국장을 방문해 공권력 투입을 정식으로 요청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동아일보> 1987년 9월 4일자 보도)
9월 4일, 6․29선언 이후 사업장에 최초로 경찰부대가 직접 투입됐다. 인천시경은 이날 17개 중대 2,500여 명의 경찰병력과 매트리스 1백 80개, 구조망 16개, 소방차 6대, 고가사다리차 2대, 구급차 10대, 조명차 3대 등 대대적인 장비와 병력을 동원하여 새벽 3시부터 작전 준비에 들어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1km 떨어진 지점에 전 병력을 잠복시키고 주변의 차량통행을 통제했다. 새벽 3시 41분, 경찰 병력은 일시에 노동자들이 농성중인 본관 건물로 진입함과 동시에 치안본부 소속 특공대 40명이 별도로 설계도 등 주요 문서와 중역진 20명이 있는 기술연구소로 진입했다. 농성중인 노동자들은 피곤을 달래며 단잠을 자던 중이라 거의 저항도 못해본 채 진압 당했고, 4명은 2층에서 뛰어내려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날 울산에서도 현대그룹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연행이 자행되어 8월 말부터 강경선회한 정부측의 선제공격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9월 5일, 출근한 노동자들과 연행자 가족들이 정문 돌파를 시도했지만 경찰에 강제 해산됐고, 9월 6일부터는 경찰의 삼엄한 현장 감시 속에서 강제노동이 진행됐다. 어용 집행부도 송성만 위원장이 사퇴하고 김응선 부위원장이 위원장 대행을 맡았다. 9월 9일, 생산현장에서는 조업이 다시 시작됐지만 현장은 경찰 병력에 완전히 장악돼 있었고, 심지어는 카빈소총을 들고 경계를 하고 각목부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5급 사무직 노동자들은 21일 대운동장에서 구속노동자 석방과 총회일인 24일 이전까지 경찰 병력을 완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9월 24일, 위원장 직선제가 통과되고 10월 16일 총선거를 통해 원용복 후보가 당선돼 10월 31일 새집행부와 회사측의 단체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투쟁은 일단락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