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⑮ 구속 중엔 법정투쟁, 출소해서는 복직투쟁 출소환영식은커녕 징역 2년 선고 선고 공판 하루를 앞두고 오전에 변호사가 접견(변접)을 와서 판결문을 슬쩍 봤는데, “내일 집행유예로 석방된다”라며 “절대 법정 투쟁하지 말라”고 한다. 오후에는 조합원들이 면회를 와서 내일 환영식 장소를 잡았다고 환영식장에서 보자고 한다. 취침시간에 법정투쟁에 대해 솔직히 약간의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당시 구치소에서는 법정투쟁을 소홀히 한다며 신랄하게 비판했고 법정투쟁의 결의를 모았던 나로서 법정투쟁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호송 버스를 타고 법정에 도착했고 내 이름이 호명됐다. 법정에 들어가면서 외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노동해방 쟁취하자” 방청석에 앉은 동지 중 일부는 구호를 따라 했지만 다수는 긴장된 표정이었다. 변호사로부터 법정투쟁만 안 하면 출소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던 거 같다. 나는 판사를 노려보며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노태우의 똥개새끼 주제에 누굴 심판하겠다고 그 자리에 앉아 무게 잡고 있느냐?”며 소리치고 덤벼들다가 법정 경위들에게 막혔다. 기고만장하던 판사의 표정은 뭐 씹은 얼굴이었고, 법정 서기에게 볼펜을 달라고 하더니 판결문에 적힌 형량을 찍찍 긋고 선고를 했다. 구형량보다 높은 징역 2년이었다. 법정에서 교도관들에게 끌려 나오는데 누가 큰소리로 외친다. “양규헌 정말 잘났다. 잘났어.” 원망에 가득 찬 아내의 외침이었다. 당일 예정되었던 출소환영식은 무효가 되었다. 배려는 필요없다…투쟁으로 원직복직하겠다 회사가 구치소에 있는 나에게 인사위원회를 알려왔다. 소명하라는 문서였다. 징역에 갇혀 있는데 소명은 얼어 죽을 소명이냐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회사 간부가 특별 면회를 와서 “공문 보낸 거 받았냐. 신경 쓰지 마라”며 건강 챙기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출소해보니 예상대로 해고가 돼 있었다. 해고자는 구속되었던 여성부장과 나, 둘이었으나 복직투쟁을 해야만 했다. 단위노조, 지노협, 전노협 회의 다니기도 바쁜 와중에도 출퇴근 시간에 여성부장과 출근투쟁을 했다. 해고라는 것은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며 삶의 형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우선 사람과 사람 관계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고, 같은 조합원이라도 복직투쟁을 민망한 시선으로 보는 조합원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조합에서 생계비를 마련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조차 달라질 수밖에 없다. 출근투쟁 중에 회사에서 사무국장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남 장소는 민물장어 집이었다. 그때까지 민물장어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식당에서 풍기는 냄새는 침을 삼키기에 충분했다. 관리이사는 미리 와서 방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사무국장이 들어가자 장어를 굽기 시작하더니 “왜 복직하려고 하냐”고 묻는다. “그걸 몰라서 묻냐?”고 반문했더니 “복직해서 평생 월급을 받아야 얼마를 벌겠냐”며 회사가 고민 끝에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게 있어서 보자고 했다는 거다. 그 중요한 결정은 “회사의 자동 라인인 테이핑 라인을 줄 테니 그 라인을 받고 힘든 싸움하지 말고 편안히 사는 게 어떠냐?”는 거였다. 그걸 받아서 운영하든 양도하든 내 소유니까 내 맘대로 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노동자 삶에 있어서 해고가 갖는 의미가 어떤 건지, 내가 왜 복직투쟁을 하는지, 왜 해고수당을 거부하는지도 모르는 당신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관리이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 살아가는 방식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관계로, 회사가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한 거 같아 이번엔 참지만 앞으로 이런 식의 회유를 반복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싸워서 원직복직을 쟁취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장어집을 나왔다. 사무국장이 울먹이며 따라 나와 징징거린다. “그 돈 받아서 운동에라도 쓰지 그러냐?”고. 사무국장이 당시 왜 그랬는지 30년이 지나서 알게 됐지만, 사무국장의 인격을 생각해서 생략한다. 내부투쟁 시작되다 출소 이후에 경기노련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돌출되기 시작한다. 중장비노조 위원장이 노동운동단체 사무실에 화염병을 던진 사건이다. 개인의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는데 권력이나 자본가 집단에게나 해야 할 행동을 동지들이 생활하는 사무실에 한 것이다. 그 이후 그 중장비노조 위원장은 경기노련 수원지구에서 일하는 쟁의차장이 화염병 제작 방법을 가르쳐 줬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지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확인해 본 결과 수원지구 쟁의차장은 화염병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줬을 뿐이라며 강하게 항변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이적행위’ 건이다. 경기노련은 집행위원회가 있고 사무처 회의가 있는데 집행위에서 매주 논의하여 사무처 회의 안건을 준비한다. 사무처 회의는 안양, 안산, 수원지구 대표와 사무차장들로 구성돼 있다. 경기노련 사무처장을 맡은 나로서는 지역대표들과 안건에 대해 공유하고 회의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따라 사무처 회의 전에 지역대표들과 안건에 대한 사전모임 후에 사무처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모임을 이적행위로 규정하는 단체가 있었다. 그 단체와 전면전이 시작됐다. 나는 이적행위의 수괴가 되어있었다. 수차례의 토론과 논쟁에도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가 쉽지 않았다. 전노협 조직국 등에서 수차례 경기지역에 내려와 해결방안을 모색했지만, 한쪽이 이적행위라는 표현을 취소하지 않는 상태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긴 쉽지 않았다. 결국, 토론 자료를 만들고 성균관대 강당을 빌려 전국에 관심 있는 동지들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조직하게 됐지만, 토론회장은 사안의 본질과 의미에는 접근했지만 결정할 수 있는 단위는 아니었다. 토론회 후 경기노련은 대표자회의를 통해 이적행위라고 규정한 단체(조직)를 징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징계내용은 ‘경기노련과 공식적으로 연대를 포함한 사업을 안 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지루하고 힘들었던 논쟁은 막을 내렸다. 지긋지긋한 논쟁의 와중에 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동지의 멱살을 잡고 막말까지 내뱉으며 폭력 일보 직전까지 갔던 당시의 행위에 대해서 당시 경기노련 부의장을 맡았던 동지에게 미안한 마음 감출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