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26일 ‘인천지역 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가 만들어졌다. 공실위는 1988년 10월에 공식 해산을 하기까지 인천지역 노조운동의 실질적인 구심역할을 했다. 단위노조 결성의 지원과 상담 교육뿐만 아니라 인노협 결성과정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한다. 노조탄압에 대응한 집회 시위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인천지역의 각 서클이나 조직의 합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자신과 입장을 같이하는 정치조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공실위로 무게중심을 옮겨 공실위 논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 일종의 ‘시사협정’이 노조운동의 전망에 관한 내부의 통일성을 높여내, 불필요한 논란 없이 필요한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실위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 내외적 요구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공실위는 결성 처음 “노동조합의 지역조직 결성이라는 자기임무를 완성하면 스스로 해산한다”는 결정대로 해산한다.
민주노조와 노동단체 간 연대의 원형, 인천 ‘공실위’
이재성(노동자역사 한내)
인천에서 1987년 봄에 결성된 ‘민주노조건설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 일동(노동자 일동)’과 그 후신인 ‘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는 비공개 노동운동 써클들의 공동투쟁체로서 대표성과 집행력을 갖는 독자적인 조직이었다. 이후 노동운동단체들의 연대체로 조직된 ‘인노운협’은 공실위의 실무 단위가 그대로 하나의 조직으로 확대되고, 이전 공실위의 ‘운영위원회’ 체제가 확대개편된 형식으로 띄고 있었다. 즉 민주노조와 노동운동단체 간 연대의 원형을 보여주었던 조직이 바로 ‘공실위’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 일동’과 그 후신인 ‘공실위’는 인천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된 노동자대투쟁에서 가장 활발한 지원활동을 펼친 대표적인 노동운동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공실위’는 이후 민주노조들의 지역연대조직인 ‘인노협’을 결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나아가 ‘인천지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노운협) 결성에 기여했으며, 조직적 결정에 따라 스스로 해산(1988년 10월)하였다.
1. 민주노조건설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 일동(‘노동자 일동’)
1987년에 들어 노동운동 진영에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던 정파는 주로 NL계열이었다. 물론 PD계열의 써클들도 현장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87년 당시 인천지역에는 약 7~8개의 활동가 써클이 있었다. 이들은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면서 써클대표자회의(또는 써클협의회)를 운영하는 등 느슨한 연대의 틀을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경쟁하며, 연대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운영방식은 학생운동 조직 내의 써클과 유사하였고, 실제로 각 지역 써클의 멤버는 학생운동과의 연계 속에서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1987년 봄, 변화하는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각 써클은 대중적 운동을 위한 연대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고 새로운 반(半)공개조직을 결성했다. 그것이 ‘민주노조건설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일동’이라는 이름의 조직이었다.(주1) 이 조직은 노동현장에서 민주노조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가들의 공동투쟁단체였다. 인천지역의 비공개 써클들이 함께 ‘민주노조 지원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결정한 것은 1986년 인노련과 ‘5․3항쟁’ 등의 급진화된 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1984년 유화국면 이후 결성된 민주노조들이 1985년에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대부분 조직이 파괴된 상황이었다. 노동운동 진영의 주류적 상황 인식은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공개합법적인 민주노조가 가능한가’라는 강한 회의였다.
민주노조 지원조직은 ‘민주노조건설을 위해 싸우는(일하는) 노동자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봄에 임투 관련 교육자료를 발간했고, 여름에 [전국적 민주노조연합 건설하자]는 소책자도 발간하였다. 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는 홍보부에서 [공장에서부터 민주화를!]이라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였다. 기관지로서 정기적으로 [공장의 소리]와 사안에 따라서 [호외]도 함께 발간하였다. 6월 항쟁을 경과하고 노동자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전희식은 “민주노조건설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 일동”을 공개조직으로 전환하여, “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공개적이고 합법적 조직인 노동조합을 비공개적 조직에서 지원 지도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터져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건설을 담보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개조직으로 전환하여 자발적인 노동자 투쟁에 신속하고 공개, 공식적인 지원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1987년 8월 26일 ‘인천지역 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2. 인천지역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로의 전환
1987년 초에 ‘노동자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반공개 조직은, 6월 항쟁을 경과하고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급속하게 공개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그것이 8월 10일에 공식 출범한 ‘공실위’였다. 조직 구성은 공동운영위원장으로 유동우, 오순부, 박일성, 조금분 등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선배’들이 포진하였고, 사무국장에 전희식이 있었다. 지역 단체들의 책임자들이 모이는 의결기관인 ‘운영위원회’는 주 1회 열리도록 하였고, 사무국 회의는 주 2회 갖기로 했다. 사무국 아래에는 홍보부, 상담부, 교육부 등을 두었는데, 각 부서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일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성격이 강했다.
공실위 상담부는 노조 결성을 위한 상담과 지원활동을 맡았는데, 새로 결성된 노조의 사무국장 모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노조탄압저지특별위원회’에도 결합하였다. 교육부는 노조 결성 준비과정 및 결성 후 간부들에 대한 교육과, 조합원 교육 등을 맡았다. 교육자료를 제작하고 발간하는 일도 담당했으며, 각 노조의 교육부장 모임을 주관했다. 정책실은 노동조합 운동의 전망과 방향과 관련된 내용을 논의, 결정하고, 그와 관련된 홍보물과 문건 등을 발행했다. 마지막으로 홍보부는 공실위에서 나오는 공식 문건들과 자료들을 묶어 자료집을 펴냈고, 기관지 “민주노조”, “민주노조 호외” 등 각종 유인물을 발간했다.
민주노조운동 지원조직으로서의 ‘공실위’는 의미 있는 원칙을 세웠다. 우선 각 써클이 사람을 파견하되 파견할 때는 기존의 조직관계를 끊고 ‘공실위’ 내의 논의에 따라 활동하며, 각 써클들은 자신들의 조직원이 있는 사업장에서 투쟁이 있을 때 그 지원을 ‘공실위’에 맡기기로 하는 등, 써클들 간의 ‘신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즉, 공실위는 다음과 같은 조직의 임무와 목표를 정했다. 1) 민주노조 결성 및 노동조합 활동을 지원하는 지역 단일의 민주노조 지원조직이다. 2) 전국적 민주노조연합의 지역조직 결성을 목표로 한다. 3) 노동조합의 지역조직 결성이라는 자기임무를 완성하면 스스로 해산한다.
‘공실위’는 초기에는 화수동 산업선교회 건물과 함께 있던, 일꾼교회 지하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도화동의 ‘인천사회운동연합(인사연)’ 사무실 내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1988년 3월 5일에는 십정동에 별도의 사무실을 열어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홍보, 교육, 지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공실위의 독특한 활동방침은 하나의 사업장에 수십 명의 활동가가 각자 속한 조직이 달라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 대중투쟁을 그르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동시에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지역적인 통일성을 높이는 효과를 주었다.
[표] 공실위 발간 자료집 목록(1987년 8월~1988년 1월)
연월 | 자료집 제목 |
87년 8월 | [전민노련을 건설하자],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 |
87년 9월 | [노동운동사], [노동운동 왜곡보도 사례집], [노동조합 신문을 만들자], [노동운동 왜곡보도 사례집] |
87년 10월 | [민노련 건설에 박차를 가하자] |
87년 11월 | [노동법 개정은 노동자의 힘으로], [개정 노동법해설], [단체교섭], [대통령선거와 노동조합](11.28) |
88년 1월 | [노동조합 선전활동지침], [현시기 노동운동의 조직재편 방향 및 노조사업계획](1.8), [88년 임금인상 투쟁지원사업 계획서](1.12), [임금인상투쟁지침서], [7,8월 인천지역 투쟁사례] |
공실위에서 1987년 8월에서 1988년 1월 사이에 펴 낸 자료집의 목록은 위와 같다.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정치운동까지, 그리고 구체적인 노조 활동에 관련한 내용에서부터 전체 노동운동의 전망과 방향에 대한 추상적인 부분까지, 공실위에서 펴 낸 자료는 노동운동의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3. 공실위의 자진 해산
공실위는 1988년 10월에 공식 해산을 하기까지 인천지역 노조운동의 실질적인 구심역할을 담당했다. 공실위는 단위 노조결성의 지원과 상담 교육뿐만 아니라 인노협 결성과정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한다. 또 공개·비공개 노동운동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됐던 공실위 운영위원회를 통해서는 노조탄압 등에 집회, 시위 등의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8년 임금인상투쟁 시기에는 공실위와 참여단체들의 실질적인 조직책임자들이 참여하는 ‘공실위임투상황실’을 구성하여 예기치 않게 터지는 현안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인천지역의 각 서클이나 조직의 합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 자신과 입장을 같이하는 정치조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공실위로 무게중심을 완전히 옮기도록 한 것이 노조운동의 전망에 관한 내부의 통일성을 높여내, 불필요한 논란 없이 필요한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실위에 대한 호평으로 애초의 목표와 무관하게 공실위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 내외적 요구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공실위 결성을 처음 제안했던 전희식 사무국장은 단호하게 해산 결정을 고수했다. 공실위는 인노운협이 결성된 이후에는 인노운협의 한 가입 단체로서 활동하며 인노협과 기타 민주노조 운동을 지원했다.
<각주1> ‘노동자 일동’의 조직명은 가끔 ‘민주노조건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 일동’이라고도 사용되었다. ‘노동자 일동’은 기관지 [공장의 소리]를 발간했다. 그 후신 ‘공실위’는 기관지 [민주노조]를 발행했는데, 그 창간호에는 “[민주노조]는 [공장의 소리](1, 2호)를 이어받아 발간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적어서 조직적 연계성을 밝혀 두었다.
<참고문헌>
이우재·나준식·노현기. 2005.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사업 최종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재성. 2014. 《지역사회운동과 로컬리티: 1980년대 인천의 노동운동과 문화운동》. DE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