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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노동자대투쟁
첨부파일 -- 작성일 1987-07-05 조회 277

1987년 노동자대투쟁

 

⦁ 시기 : 19877~ 9 

⦁ 요약 : 19876월항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6.29선언 이후 전국적, 전 산업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노동현장 민주화투쟁에 나섰다.

  

 

1987년 상반기 노동자들은 ‘413헌법개정반대조치이후 정부의 강경탄압으로 고립 분산적인 투쟁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3저 호황에 따른 노동자들의 기대 속에서 자연발생적인 투쟁은 계속됐다. 정부와 자본의 강경한 탄압으로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가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억압과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음은 분명했다. 특히 6월 항쟁을 통해 자각된 노동자계급이 ‘629선언이라는 정부 여당의 전술 후퇴에 힘입어 한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대투쟁의 전개

 

투쟁의 첫 봉화는 민주노조를 요구하는 함성으로, 울산에서부터 타올랐다. 75, 현대재벌이 금기했던 노동조합이 주력기업의 하나인 현대엔진에서 결성되자 노조결성 열기는 순식간에 울산지역 현대계열사 전체로 옮겨붙었다. 당황한 각 현대계열사 관리자들은 노조결성 방해 공작에 나서 급기야는 716현대미포조선 노조결성 신고서류 탈취사건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노동자들의 누적된 분노에 불을 붙였고, 국민의 재벌에 대한 비판을 가중시켰다. 마침내 노동자들이 민주노조 건설하여 민주 노동자사회 만들자며 파업투쟁으로 뭉쳐 일어나자 회사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투쟁은 6월 민주화투쟁을 고양시킨 노동자들의 승리로, 현대재벌 뿐만 아니라 다른 재벌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 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에서도 회사의 어용노조 결성에 반대하며 민주노조 쟁취투쟁을 전개했고, 88일에는 현대계열사 노조의 결합체인 현대그룹노조협의회가 결성됐다. 울산 현대계열사에서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파업은 지역적 연대파업으로 번져나가 8월 초에는 울산 및 온산공단의 대기업 대부분에서 임금인상과 노조 민주화,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투쟁의 불길이 타올랐고, 곧바로 하청중소기업체로 확산됐다.

 

울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7월 하순께부터 부산지역으로 옮겨붙어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세신정밀, 국제상사 등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투쟁에 합류했다. 8월 초에는 마산과 창원지역으로, 대구, 구미, 광주, 전북, 수도권으로 빠르게 확산돼 8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전국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노동부 집계에 의하면 629선언 이후 810일까지 노동쟁의 발생 건수는 서울 경기 76, 부산 경남 105, 광주 전남 11, 기타 지역 48건인데 비해 827일 집계된 노동쟁의 653건은 수도권 215(서울 50, 인천 41, 경기 124), 영남 201, 대구 112, 경남북 67, 부산 522, 강원 32, 광주 12건으로 나타나 노동자대투쟁이 영남 지역으로부터 수도권과 호남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사이에 강원, 충청지역의 광산 노동자들은 파업과 함께 철도와 도로를 점거하는 등 폭발적인 가두 투쟁을 감행했고, 전국 각 도시의 운수노동자들은 특유의 조직력과 기동성을 바탕으로 지역별 연대파업을 이끌어갔다.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그동안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과 폭력적 노동통제 속에서 신음해 온 노동자들의 자주적 투쟁이었다. 사업장 대부분에서 한결같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임금인상)와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며 권위주의적 관리체계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그렇게 노동자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이라는 생존권 투쟁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의 조직인 노동조합 결성, 어용노조 민주화를 포함한 노동3권을 쟁취해야 한다고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이익갈등을 넘어서 노사 간 역학관계를 재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투쟁 초기에는 보수적인 언론들조차 지지를 표명하고, 그동안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이 사태의 원인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원인별 지표를 살펴보면 당시 투쟁의 주요 요구는 임금인상으로 집약된다. 전체 3,749건 가운데 2,613건이 임금인상이었으며, 노동조건 개선(566), 부당노동행위(65), 해고(51), 체불임금(45) 등이다. 임금인상 투쟁은 전반적인 저임금정책을 반영, 신규노조냐 어용노조냐에 관계없이 분출됐다. 임금인상 요구율도 정률의 경우 50%까지 편차를 보이는 가운데 대개 2030% 인상을 요구하고 있어, 상반기 임금인상률 7.5%를 크게 웃돌았다. 타결은 대개 510% 선에서 이루어졌는데 상당수 기업에서 상반기 임금인상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표출돼 재교섭이 일반화됐다. 임금요구 중에는 정률 인상 외에도 정액 인상과 상여금, 가족수당, 근속수당 등 각종 수당의 신설이나 인상 요구도 많았다.

  

임금문제는 노동자대투쟁의 핵심적 사안의 하나였지만 투쟁을 이끈 주된 동인은 일시적인 임금인상보다는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에 상응하는 현장 민주화 요구였다. 민주노조 설립이나 어용노조 퇴진으로 표출된 노동현장의 민주화 요구는 노동자대투쟁 기간 중 노동조합 결성의 활성화로 나타났다. 19801,635개 노조(조합원 948,134)였던 것이 19876302,742개 노조(조합원 1,050,202)에서 같은 해 1231일에는 4,103개 노조(조합원 수 1,267,457)로 크게 늘었다. 이러한 노동조합 조직률 변화를 198710월 기점으로 연맹별로 비교해보면 자동차·금속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에서 가장 괄목할 만하게 성장했는데, 결국 이들이 노동자대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금속노련의 경우 신규노조가 기존 노조 수의 48%를 넘어서고 신규조합원 수 역시 기존 조합원 수의 32%에 육박하는 등 획기적인 조직발전을 이룩했다. 1987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의 주력 대오가 바로 이들이었으며, 그 후에 이들이 중심이 돼서 지노협, 전노협을 건설하고, 나아가 전노협을 지탱했다.

 

한편 1987629선언 이후 1031일까지 신규노조 설립현황을 살펴보면, 7월 초에는 평균 약 2, 7월 중하순에는 4, 8월에는 22개가 결성돼 정점을 이루고 9, 10월에는 대략 5개 노조 정도가 신규 설립됐다. 노동자대투쟁의 또 다른 주요 요구는 어용노조 퇴진이었는데, 노동자들은 기존 노조 집행부 또는 629선언 이후 회사 지원을 받아 신설된 노조에 대해 노조 집행부 교체, 위원장 직선제, 노조 활동 및 노조비 공개 등을 요구했다. 이같은 노조 민주화 요구는 노동자투쟁이 발생한 사업장 70% 이상에서 제기됐다.

 

이전의 현장이 군대식으로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게 인간다운 대우’ ‘근로기준법 준수등의 요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예를 들어 두발 자유화’ ‘생산직과 사무직 간 작업복·명찰 등의 차별 철폐와 같은 권위주의적 노무관리에 대한 개혁 요구가 분출했다. ‘관리직과 같은 통근버스 이용’ ‘간부식당 폐지’ ‘간이세면대 설치’ ‘체조 시간 폐지등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근무형태(3교대)의 변경, 초과노동에 대해 법정 잔업수당 지급, 연월차 유급휴가, 법정 유급휴가, 생리휴가, 국경일 휴일 인정, 도급제 폐지, 퇴직금 누진제 시행 등 다양한 요구들이 터져 나왔다. 이는 그동안 강요돼온 일방적인 노사관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반발임과 동시에 노동자들의 높아진 권리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987 노동자대투쟁의 양상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1987년 들어 발생한 노동쟁의는 3,749건으로, 19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쟁의가 일어났던 1980407건의 무려 9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투쟁이 전개됐다. 특히 19873,749건의 쟁의 중 3,341건이 629 이후 7·8·9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하루 평균 44건의 쟁의가 발생한 셈인데, 19860.76건에 비하면 무려 58배가 증가한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전산업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중 제조업이 1,955건으로 가장 많았고, 운수업이 1,365, 광업 135, 기타 294건이었다. 제조업의 경우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에 직접적으로 시달려 왔다는 점에서, 광업의 경우 사양산업 정리와 새로운 산업으로의 이전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는 전체 사업체 107,412개 중 3,749개 사업장이 참가했다. 이는 전체 사업장의 약 3.5%에 달하는 숫자다. 그러나 참가 사업장 중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제조업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 투쟁의 폭발력은 참가비율 이상의 의미가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 참여한 사업체를 규모별로 살펴보면 300인 이하 사업장이 전체의 76%를 차지하는 등 중소기업에서의 쟁의도 두드러진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에 참여한 사업체 중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53.3%로 절반을 조금 넘는 수치다. 1989년까지는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서도 쟁의가 발생하고 있지만, 그 이후는 대부분 노동조합이 있는 곳에서 쟁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1987년 대투쟁을 통해서야 노동조합을 통한 단체행동이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1987년 대투쟁은 그간 노동악법의 굴레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1987년에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쟁의는 겨우 5.9%인데 반해, 법적 굴레를 전면 거부한 불법쟁의가 94.1%에 이르러 이 사실을 증명한다. 이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먼저 쟁의에 돌입한 후 협상을 전개했다는 점을 나타낸다. 1987년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업거부, 농성 및 시위를 선택했다. 작업거부는 1986138건이었던 데 비해 1987년에는 1,226건이나 돼 전년 대비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집단 농성투쟁도 122건에서 2,428건으로 무려 20배가 넘게 늘어나 농성투쟁이 요구 관철과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한 효과적인 전술임을 보여주고 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주요 공단을 중심으로 한 전국 동시 투쟁이었다. 

 

1987 노동자대투쟁의 특징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전국, 전 산업에 걸쳐 폭발적 양태를 띠며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데 일차적 특징이 있다. 8월 중순 들어서는 하루 평균 300개 이상의 사업장에서 파업 농성투쟁이 진행되는 등 전국 곳곳의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봇물 터지듯 분출해 사실상의 전국 총파업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은 전국적 연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둘째, 노동자 대중의 자주적·자발적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소수 선진 활동가들이 의도적으로 조직하고 지도한 것이 아니라, 6월 민주화 투쟁의 연속 선상에서 629선언 이후 열린 정치 사회적 공간의 틈을 비집고 그동안 억눌려온 노동자 대중의 욕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즉 주체 면에서 광범한 노동자 대중의 자주적·자발적 투쟁이었다.

 

셋째, 법절차를 무시한 비합법 투쟁이었다. 투쟁형태를 보면 파업, 농성, 시위 등의 집단행동으로 시작해 를 형성한 다음 협상으로 이어가는 선농성 후협상의 특징을 반영한다. 이는 투쟁이 대부분 기존 법절차인 노동쟁의조정법에 따른 냉각기간을 무시한 비합법 투쟁이었음을 나타낸다. 이전의 작업장 농성, 사무실 농성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세를 결집한 후 가두로 진출해 시위를 벌이는 등 투쟁이 적극화·격렬화 됐다. 이 과정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경찰력을 무력화하는 등 실력행사를 시도한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넷째, 지역별·재벌그룹별 연대투쟁이었다. 지역별, 재벌그룹별, 산업별 연대투쟁이 주요한 투쟁형태로 나타났다. 지역별 동맹파업의 형태는 울산, 광주, 부산, 전주, 서울, 군산, 포항, 안양 등지의 운수노동자 동맹파업에서 가장 잘 나타났고, 재벌계열사별 동맹파업은 대우중공업의 창원(84), 인천(86), 영등포와 안양(87) 4개 사업장 동맹파업, 현대그룹 계열 내 울산지역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울산 현대정공과 창원 현대정공의 동맹파업 등이다. 특히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를 통한 연대투쟁은 한국노동운동 사상 새로운 투쟁형태를 정립한 것이다. 이는 독점재벌이라는 자본의 집중화된 형태, 기업 간 상호연관이 오히려 노동자의 연대투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마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지역별·그룹별 연대투쟁은 지역노조협의회, 그룹노조협의회 등으로 조직돼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 조직체계로 성장했다.

 

다섯째, 개별적 요구와 노조 민주화 요구가 결합됐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투쟁의 규모나 강도와 비교하면 요구수준은 아직 개별 사업장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노동3권 보장, 8시간 노동제, 생활임금 보장, 최저임금제 등 개별 사업장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요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민주노조 쟁취가 중심요구의 하나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권리 획득을 위한 단결과 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여섯째, 경공업·중소기업에서 중화학·대기업으로 노동운동의 중심이 이동했다는 점이다.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중공업·화학공업지역에서 폭발해 경공업지역 및 기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고, 대기업 노조가 요구사항 관철에 선도적 역할을 해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특징으로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향후 노동운동의 주축이 경공업·중소기업에서 중화학공업·대기업으로, 여성노동자에서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바뀌어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노동운동 주도세력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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