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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사라진 노동, 버스 안내원_정경원(110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06-14 조회 2582
 

70-80년대 버스를 이용한 이들은 다음 정류장은 신촌입니다. 내리실분 안 계세요?”, “오라이~”라며 우렁차게 외치며 만원버스에 승객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모습의 여성노동자를 기억할 것이다. 조금 젊은이들은 1990년대 중반 '버스 안내양'을 소재로 안 계시면 오라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인기 개그 프로그램과 이영자 씨를 기억할 것이고. 70년대 풍경과 추억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대표적인 노동이 버스 안내원이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때 그들의 노동이 추억으로 남기에는 가혹했음을, 늘 인권을 침해받고 있었음을 같이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노동 현장에서 드러나지 않는 착취와 인권 침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사라진 노동, 버스 안내원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교통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도입된 여차장제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 시내버스 개념의 교통수단이 선을 뵌 것은 1928년이라고 한다. 광화문에서 노량진까지 운행한 버스에는 운전사와 여자 차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매일신보 1928.7)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졌던 제도는 1961617일 여차장제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대도시로 유입되는 인구, 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시내버스와 고속버스 등에서 일했다.

통계청 기록에 따르면 196112,500명가량이던 안내원이 197133,500명으로 늘었지만([대한민국 60년 경제사회 변화]) 이들의 노동조건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물론 그 전에도 간간이 아름답고 감동적인이야기가 전해지긴 했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봉사활동 하는 안내양', '가난 때문에 못한 공부에 전념하며 일하는 안내양 '등.

 

안내양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항의 확산

1972년 하반기 한국노총이 버스 안내원의 인권과 환경 개선, 후생복지시설 시정 활동기간을 정하고 전국적으로 노동실태 조사에 나섰다. 한국노총은 신분보장, 불법 몸수색 폐지, 야간세차·작업 등 근무시간 외 과중노동금지, 충분한 식사시간 보장, 교양과 기숙사 시설 개선, 위생·보건·문화시설 개선 등을 문제제기했다. 한국노총의 이런 활동은 소속 부녀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70년대 들어 임금체불, 합숙소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는 버스안내양들의 농성이 빈번해진 것이다. 그 사례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3평 남짓 방 1개에 10~15명을 합숙시킨다거나 자정이 넘도록 세차를 시키고 심지어 임금도 안 주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버스 종점이 있던 외곽에는 상수도 시설이 돼 있지 않은 곳이 많아 펌프물을 써야 했다.(경향신문 1973.12.14.)

겹치기 근무를 해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문 잡고 졸다가 추락사하거나 실습하다가 떨어져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동차노조가 실태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시내 버스안내양 중 34%가량이 동상·무좀·위장병 등 직업병에 시달렸고 단체협약상에는 격일 근무제로 명시되어 있으나 대부분 2일 근무에 1일 휴무 노동을 했으며 삥땅을 막는다는 이유로 근무시간 내 기숙사 출입을 금하고 있어 땀에 젖은 양말을 갈아 신지 못한 채 계속 근무해야 해서 동상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숙사 안전도 문제인데 서울시내 버스회사 기숙사의 85%가 소화전이나 비상벨도 갖추지 않았고 71%는 비상구 없이 출입구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불이나 베개 등이 부족한 경우, 기준면적(10.8)에 미치지 못하는 경구가 절반이 넘었다.(동아일보 1977.2.23.)

당시 법원은 버스 안내원의 정년을 27세라 판결했다. 안내양 22세의 나이로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바람에 숨진 여성노동자 부모의 소에 재판부는 안내양의 정년은 일반적으로 여자가 결혼해야 할 나이인 27세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사고일로부터 27세까지는 안내원의 봉급인 일단 3493원으로 손해액을 산정하고 27세부터 가동연한인 55세까지는 성인여자 도시일용노동 임금으로 손해액을 계산해야 마땅하다고 했다.(경향신문 1980.1.12.)

정년이 아니라도 시내버스에서 3년 이상 버티는 경우가 없었단다. 박봉에 성희롱에. 박정희는 안내원 방한복을 손수 디자인하고(동아일보 1977.12.20.) 자동차노조는 교양대학 문을 열어(경향신문 1981.9.16.) 여성노동자들에게 시혜를 베풀었지만 정당한 임금, 안전한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노동자는 있는 힘을 다해 승객을 버스에 '구겨넣고' 닫히지도 않은 문에 매달려 시내를 달리곤 했다. (사진 한겨레)

 


 

사생활 간섭 말라

노동자들은 임금, 후생복지를 넘어 사생활 간섭 말라” “몸수색 하지 말라는 요구를 걸고 투쟁하기에 이른다. 신한교통 여성노동자들이 옷차림새, 머리상태 등까지 간섭하는 사측에 항의해 운행 거부를 한 것이다.(경향신문 1978. 3. 27.) 항상 삥땅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으며 일했고 하루 18시간 노동에 시달렸는데 수고했다는 말은커녕 온몸을 더듬는 눈초리, 심지어 험악한 손길을 감내해야 했던 노동자.

승객에 불친절했다는 이유로 사표를 강요당한 여성노동자가 결국 자살했다.(동아일보 1984.8.22.) “퇴직금을 줄이기 위해 1년이상 장기근무자들을 미리 내쫓아버리는 통상적인 버스회사의 변칙경영 방법이라고 동료들은 증언했다.

80년대 들어 버스운송 사업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안내양 2교대제 근무제는 실시 불가능한 실정인데 이유는 한 회사는 한 달 18명이 사직하고 6명이 새로 오는 정도가 됐다. 때문에 용모 교양 등 고려하지 못할 상황이란다. 이처럼 노동자 수가 급속하게 줄어든 것은 지하철의 등장으로 인한 교통체계 변화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안내양이 없는 시내버스

82년경부터 안내양부족현상이 두드러졌다. 1982년 자율버스 운행이 시작되며 요금선수제로 가는 길을 밟기 시작했고 이즈음 지하철2호선도 완전 개통했다. 84년부터 하차지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벨을 누를 수 있게 되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되면서 여차장은 급속히 사라졌다. 85년에는 서울운송조합에서 1천명 모집에 6명 지원하는 데 그칠 정도였다. 그리고 891230일에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의 6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조문이 삭제되었다.

몇 년 전 서울시가 버스안내원 재현을 한 적이 있다. 이에 앞서 20062월부터 시행 중인 태안군 농어촌 버스, 20104월부터 보령시 행복버스는 실제 차장을 두고 있다. 호응도 좋아 계속 유지하고 있다. 70년대를 대표적인 여성 노동을 돌아보며 시간과 효율보다 필요한 노동, 함께 나누는 노동이 확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내양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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